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인간의 욕구를 절대적 욕구와 상대적 욕구로 구분했다. 천사가 아닌 인간은 굶고 살 수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빈곤하면 인간이 피폐해진다. 의식주 등 절대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폭력에 쉽게 기대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하거나 비루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결국 동물과 똑같이 된다. 더욱이 존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로 강등된다. 결국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 악의와 울분을 품다 불행하게 생을 연명한다.
‘기본소득’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지불되어야 할 소득이다. 존엄성이란 본래 그 나라의 물적 기반이나 경제적 효과와 무관하게 지켜져야 할 절대적 가치다. 곧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경제학적 소득인 동시에 ‘인문학적’ 소득이다.
이 절대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고대사회부터 국가는 다양한 구휼제도를 갖추고 이를 실행해왔다. 명목상으로 그친 경우도 많았고 폭군과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도 많았지만 국가는 적어도 그런 의지를 표명해 나름 노력하곤 했다. 중국 수나라 때 이런 활동을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불렀다.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제한다. 이를 줄여 ‘경제’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의 역할은 경제제민, 곧 경제다.
예컨대,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 때 실시된 진대법(賑貸法), 986년 고려 성종 때 설치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의창(義倉)은 춘궁기에 국가가 농민에게 양곡을 대여해 주고 수확기에 갚게 한 대표적인 구휼제도다. 이처럼 물적 토대가 취약한 고대사회에서도 백성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국가는 경세제민을 외면하지 않았다. 국가는 그동안 쌓아 놓았던 ‘환곡’을 풀어 민중을 구제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2,000년이 지났다.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3만 1,349달러에 도달했다. 1950년 한국전쟁 후 500배로 크게 증가한 것이다. 3만 달러라고 하니 몇 푼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환율을 1,200원 정도로 잡으면 얼추 3,700만 원 가량 된다.
한 사람의 연평균소득이 3,700만 원이라고 하니 4인 가족으로 치면 그것의 네 배인 대략 1억 5,000만 원이 된다. 12개월로 나누면 월 1,240만 원이다. 한 가족의 소득이 이 정도면 풍족하게 쓰고도 남는다. 지금의 성장수준만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가족이 충분히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이런 계산과 거리가 한참 멀다. 우리나라 총 가구를 소득에 따라 다섯 집단으로 구분하자. 그렇게 하면 각 집단에 20%의 가구가 속한다. 가장 가난한 첫 번째 20% 집단을 1분위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제일 부자 20%가 속한 집단은 5분위가 될 것이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2018년도 소득분위별 평균소득은 다음과 같다. 하위 20% 가구인 1분위의 월 평균 소득은 110만 4,000원이다. 2분위는 272만 5,000원, 3분위는 457만 7,000원, 4분위는 697만 7,000원이다. 그리고 5분위는 1375만 4,000원이다! 5분위, 곧 상위 20%만 1인당 국민소득인 1240만 원을 상회한다. 쓰고도 한참 남을 것으로 예상된다. 내가 그 정도 받아 본 적이 없지만 그 다음 20%인 4분위도 뭐 그리 엄살 떨 정도는 아니리라 생각된다. 이 집단의 통장에는 돈이 나날이 쌓여 간다.
3분위에 속하면 좀 불안할 수도 있지만 고만고만 살아갈 수는 있다. 4인 가족을 거느린다면 똔똔이거나 허덕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1–2분위 집단에겐 이 마저도 언감생심이다. 좀 산다고 생각하니 학원비도 들고, 어쩌다 여행도 다니고 아파트 장만하려니 이 소득으로는 만만찮다. 나처럼 자식 하나만 낳으면 몰라도, 둘을 키우자면 저축이 쉽지 않을 것이다. 저축은 못해도 스트레스 좀 받더라도 대충대충 하루를 넘길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요즘 엄청 홀가분하고 행복하다.
이제 나머지 40%가 문제다. 2분위에 속하는 20% 가구는 270만 원 정도로 가정을 꾸려야 한다. 애는 빽빽 울어대고, 배우자는 돈 없다고 맨날 타박이다. 머리가 아프다. 무슨 얼어 죽을 저축이냐? 자식들 기 안 죽이려고 하니 돈이 더 들어간다. 빚을 내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
가장 가난한 1분위 20% 가계야 말해 무엇하랴? 반세기 전엔 100만 원 가지면 백만장자였다. 21세기 백만장자는 거지다. 존엄성이란 털끝만큼도 확보될 수 없다. 빚낼 곳도 없으니 굶고 살아야 한다. 21세기에 청빈한 삶은 치욕과 분노의 삶이다. 40%에 달하는 가구들은 몇 푼이라도 더 들어오면 즉시 쓸 수밖에 없다.
⅓에 해당하는 하위 40%의 1–2분위는 왜 불안한 삶과 치욕과 분노의 삶을 살아야 하나? ⅔에 해당하는 상위 60%가 전체 소득의 87%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하위 1분위와 하위 2분위, 곧 하위 40% 가구가 차지하는 소득은 각각 3.8%와 9.3%에 불과하다. 40%의 가구가 13.1%의 소득으로 연명한다. 매일매일 허덕이는데 저축은 무슨 얼어 죽을 저축? ‘언발에 오줌누기’밖에 안 되지만 몇십만 원이라도 준다면 쓰기에 바쁘다. 긴급하게 써야 할 곳이 무궁무진하다.
내가 나머지를 ⅔로 퉁쳐 버리니 중간 3분위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이들 20%도 전체 소득 중 15.7%만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머지 하위 40%보다는 훨씬 양호하다. 자기가 좀 불안하다고 진짜 가난한 사람들을 못 보면 안 된다. 3분위 가구에게 추가소득이 주어지면 쓸 수도 있고 저축할 수도 있다. 내 경험으론 쓸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들의 항의도 근거 없지 않으니 상위 40%에 집중하자. 가장 부유한 20%집단인 5분위는 전체 소득의 47.2%, 그러니까 절반을 독점하고 있다. 그 다음 20%는 23.9%를 차지하고 있으니 상위 40% 가계가 전체 소득의 70% 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은 번 돈 중 대부분을 저축한다. 더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추가로 돈이 주어지면 모두 저축할 것이다.
인간은 존엄한 삶을 누려야 한다.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 지금 손들고 반박해 보라. 반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존엄하지 않는 삶을 체험해봐야 정신 차릴 것이다. 그러니 그 입 다물라!
기본소득은 존엄한 삶을 위해 필요하다. 적어도 불안과 치욕, 분노에 찬 40%의 국민을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인문학적’ 소득이다. 더욱이 현재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가 넘는다. 기본소득에 대한 물적 기반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존엄한 삶을 지키기 위해 돈이 모자란단다. 도대체 얼마가 더 있어야 하나?
주류경제학자들에게 기본소득은 ‘낭비’로 오해되지만 경제적 효과도 낳는다. 팔리지 않는 상품에 대한 소비를 촉진시켜, 정체되어 있는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팔리지 않으면, 만들 필요가 없고, 만들지 않으면 이익도 없다. 기본소득은 낭비가 아니라 ‘비용’이며, 비용이 지출되어야 경제가 돌아간다. ‘비용의 역설’! 기본소득은 인문학적 소득인 동시에 ‘경제학적’ 소득이다.
지금은 빈곤의 시대가 아니라 풍요의 시대다. 그러니 이제 나눌 때도 되지 않았나? 이제 ‘모두 함께’ 존엄한 삶을 누릴 때도 되지 않았나? 3–5분위를 포함하는 ⅔ 시민들이여, 도대체 ‘파이’를 얼마나 더 키워야 그 성장과 독점의 욕망을 멈출 것인가?
그리고 지금은 국가 재난의 시대다. 코로나 19로 1–2 분위 ⅓의 백성이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 구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혼자 못 빠져 나온다고 훈계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재난기본소득 지급하면 저축한다고? 정말 모르는 소리다.
이때 ⅔가 연대를 발휘해야 한다. 경세제민, 곧 진정한 ‘경제’를 실행해야 할 때다. 그건 국가의 의무지만 ⅔ 시민들의 책무이기도 하다. 지금은 긴급하니 일단 모두에게 지불하고 ‘저축된 3–5분위의 돈’은 나중에 세금으로 도로 납부하자! 정부는 ‘코로나 재난세’를 징수하라!
유승민이 재난기본소득을 “악성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주자”고 한다. 유승민에게 묻고 싶다. ‘엘리트주의’는 괜찮고 포퓰리즘은 왜 비난받아야 하는가? 경제정책은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경제의 본질인 동시에 경제정책이 추구해야 할 최종목적이다.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에 주눅들지 말자. 하물며, 민중의 최소 ⅓이 도탄에 빠지지 않았나? 포퓰리즘이 더 강화되어야 할 때다. ‘포퓰리즘 경제’가 필요한 때라는 말이다. 쌓아 놓았던 ‘환곡’을 풀어야 한다.
그러나 필요한 사람에게만 주자는 그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받을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은 다시 환수해 달라고 청원해 국고에 ‘환곡’을 비축하자. 이게 진정한 깨어있는 시민들이 지녀야 할 자세다. 국가에만 모든 것을 맡기고 시민들은 뒷짐 지면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