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 전 필자가 수정해 게재한 4년 전 글을 수정해 올립니다.
경제학자지만 한국경제신문, 매일경제신문 등으로 대표되는 경제신문을 읽지 않는다. 왜 그런가? 온통 주식, 채권, 펀드, 부동산, 수출, 수입, 기업매출, 이자 등 나와 무관한 기사로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경제가 아니다. 그건 시장이며 도박이다.
이런 걸 경제라고 착각하며, 자신이 경제를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서글프다. 경제는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필요한 유·무형 재화를 생산, 분배, 소비하는 활동과 그것을 관리하는 행위다. 주식, 펀드, 부동산투기, 이자는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활동이라기보다 투기 활동이다.
물론 ‘시장’ 경제이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외면할 수 없다. 하지만 시장경제에서도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시장적 항목들은 많다. 생산과 소비만큼 ‘분배’라는 경제활동이 중요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더욱이 금수저 물고 나온 부자가 아니라면 중산층, 저소득층에게 일자리만큼 중요한 건 없다. 물가는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사람에게 관심사다.
보통 전자를 고용(employment), 후자를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고용의 반대말은 실업(unemployment)이니 인플레이션과 실업은 중산층과 서민, 나아가 노동자의 최대관심사다. ‘경제’신문은 분배, 노동, 실업, 인플레이션 등 진정한 ‘경제’ 주제를 더 많이 담아야 하지만 오히려 ‘도박’과 관련된 반경제적 내용을 더 많이 다르니 내가 경제신문을 안 읽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경제생활과 더 가까운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가 ‘나는 경제 잘 몰라, 별 관심 없어’라며 시큰둥하게 반응할 것이다. 뭣이라? 별 관심이 없다고? 물가가 오르면 같은 월급으로 이전보다 더 적게 살 수밖에 없고, 직장 잃으면 굶어 죽는데도 ‘나는 경제는 모르쇠’ 하며 외면하면 안 된다.
이제 인플레이션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작년에 100만 원 월급으로 100만 원짜리 TV 한 대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TV 가격이 200만 원으로 뛰면 똑같은 월급으로 ½대, 곧 반 대밖에 못 산다. 명목임금(nominal wage)은 동일한데 실질임금(real wage)이 감소한 결과 살 수 있는 능력, 곧 구매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좋은가? 똥 씹은 기분이다. 같은 월급으로 장바구니를 반밖에 못 채웠는데도, 열불이 안 나면 무책임한 가장이다.
일자리 잃으면 어떨까? 말할 필요도 없이 끔찍하다. 들어오는 돈이 없으니 뭘 살 수가 없다. 소득이 없으니 소비가 불가능하다. 굶거나 초라한 행색이 된다. 자신감을 잃어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다. ‘방콕족’으로 진화한다. 처음엔 친구들이 위로주를 사주던데, 이젠 전화도 안 받는다. 고립된다. 우울증, 알코올중독, 그리고 극단적 선택. 실업은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인플레이션도 실업도 모두 피하고 싶은 ‘나쁜 것’(bad)들이다. 어쩌면 둘 다 최악(the worst)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제학의 실증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꺼번에 둘 다 피할 방법은 없다. 이건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필립스(William Phillips)가 진행한 1861–1957년간 영국의 물가상승률(임금변화율)과 실업률에 관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은 ‘열불 나는’ 물가상승과 ‘죽음으로 이끄는’ 실업, 이 못된 것들을 동시에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나? 실질소득을 유지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전략을 선택하면, 일자리를 잃는다. 반대로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고용 확대 전략을 선택하면, 실질소득이 감소한다.
이런 서로 배반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골치가 아파 손을 놓아 버린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책을 연구하는 경제정책 교과서는 이런 관계를 ‘마의 삼각관계’(성장, 안정, 국제수지)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교과서가 가르치듯이 그렇지 않다.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중요하다. 인플레이션은 모든 이에게 불리하다. 봉급생활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부자들에게도 그렇다. 은행에 엄청난 돈을 저축해 두었는데, 물가가 상승하면 돈의 가치가 절딴난다. 100억의 명목 예금이 50억의 실질 가치로 하락하면 청천벽력이 된다. 반면 비교적 예금과 현금이 적은 서민층에게는 그런 효과가 크지 않다.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인플레이션은 부자들만큼 중요하지 않다.
실업은 다르다. 부자들에게 실업은 없다.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서민에게 실업은 곧 죽음이다. 은행에 돈이 좀 있는 중산층도 예외가 아니다. 코딱지만 한 예금의 실질 가치 하락하는 것보다 실업 상태로 수년간 아무것도 못 버는 상황이 더 위험하다. 또 일자리 못 나가면 고립되어 폐인으로 전락한다.
자, 중산층, 서민, 노동자들이여. 무얼 선택할 것인가? 모두 똑같이 나쁜가? 그렇지 않다. 둘 다 나쁘지만 ‘가장 나쁜 게’ 있고, ‘덜 나쁜 게’ 있다. 나쁜 것 중에서 최악(the worst)과 차악(the second worst)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중산층, 노동자, 서민이라면 둘 다 나쁘다고 선택을 포기하거나 골치 아프다고 남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며, 선택할 기준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가가 올라 똥 씹은 느낌이 들겠지만 굶어 죽거나 폐인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 그놈이 그놈 아니다. ‘좀 덜’ 나쁜 놈이 분명히 있다. 그거라도 선택하는 게 낫다.
많은 사람이 자조한다. 정치판을 보니 그놈이 그놈이라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그중에도 최악이 있고, 그와 구별되는 차악도 있다. 최악이 미워 차악마저 포기하면 이 세상은 최악이 창궐할 것이다. 똥 씹은 기분이 들겠지만 굶어 죽거나 폐인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염세적 양비론에 붙잡혀 세상 모든 것을 혐오하기보다, 희망을 품고 하나라도 고쳐 나가야 하지 않을까?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