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1.
대학 시절, 학교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학교와 멀지 않은 번화가에 있던 작은 음반 가게였다. 난 버스 정류장 앞 음반 가게에서 3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기 중에는 주말, 방학 때는 주 6일 동안 일했다.
평소 음악 듣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큰 물리적 힘이 필요하거나 심리적 스트레스가 많은 일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내향적 성향인 나와 잘 맞았기에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시작해 졸업하고서도 한동안 그곳에서 용돈 벌이를 했다. 창밖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무수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대학 시절의 반 이상을 보냈다.
단골손님 중 유독 키가 컸던 한 사람이 있다. 30대 초반 나이에 체격이 호리호리했던 수진 언니. 가수 이승환의 열혈 팬이었던 수진 언니는 이승환의 새 음반이나 비슷한 분위기의 가수들이 음반을 낼 때면 어김없이 우리 가게에 왔다. 얼굴을 익히고, 말을 섞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뜨내기손님과는 다른 친분을 쌓았다.
이승환의 새 음반이 나올 때면 난 언니를 위해 따로 포스터를 여러 장 챙겨두곤 했다. 내가 곱게 말아 놓은 포스터를 건네면 언니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일개 음반가게 알바의 선의를 기쁘게 받았던 언니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에 소소한 간식을 품에 안고 우리 가게 문을 빼꼼 열었다. 그렇게 손님 이상의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수진 언니는 내게 달콤한 제안을 하나 했다.
이승환 좋아해요?
콘서트… 같이 갈래요?
나보다 10살은 더 많았지만 늘 단정한 존댓말을 써줬던 수진 언니. 절친도 아니고 가끔 보는 음반 가게 알바에게 같이 콘서트를 가자고 제안을 하다니. 1~2만 원짜리 공연도 아니고 결코 적지 않은 가격의 콘서트를 함께 가자고? 같이 갈 사람이 없나?
20대 초반의 나는 의아했다. 적지 않은 티켓 값 때문에 주저주저하는 가난한 알바생의 상황을 캐치한 언니는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몸만 오면 돼요. 서른 넘으니까 함께 공연 보러 갈 친구가 없네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언니의 말끝에 쓸쓸함이 느껴졌다. 서른이 되면 공연 보러 갈 친구도 다 사라지는 걸까? 서른이 한참 멀었던 어린 날의 나는 그때부터 서른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생겼는지 모른다.
당시의 서른은 지금의 서른과 달랐다. 20대 시절 함께 콘서트를 다니고, 환호성을 지르던 수진 언니의 친구들은 서른이 되기도 전에 가정을 꾸리고 엄마가 됐다. 싱글 시절처럼 자유롭게 공연을 보러 다니거나 친구들과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언니는 콘서트 메이트를 하나둘 잃고 홀로 남겨졌다.
그때만 해도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처럼 혼자 무언가를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외향적인 성향이 아닌 수진 언니는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콘서트를 포기해야 했다. 그러다 언니의 레이더망에 우연히 내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No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공연이 주말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빠져야만 했다. 조심스럽게 음반 가게 사장님께 상의를 했다. 단골손님인 수진 언니를 잘 알고 있던 사장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가서 맛있는 걸 사 먹으라며 용돈까지 쥐어 주셨다.
콘서트 당일, 언니는 나를 자신의 차로 데리러 와줬다. 가수의 땀구멍까지 보이는 스탠딩 1열에서 함께 땀을 쏟으며 공연을 즐겼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땀에 절은 날 집 대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대신 나는 언니에게 공연을 보기 전 식사와 커피를 대접했다. 다 합쳐도 콘서트 티켓값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었다. 당시에도 티켓팅이 하늘에 별 따기였던 이승환 공연을 볼 기회를 준 언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사 인사였다.
2.
까맣게 잊고 지낸 수진 언니의 존재가 다시 떠오른 건 얼마 전, TV에서 이승환의 공연을 볼 때였다. 코로나19로 쑥대밭이 된 공연계와 집 안에 갇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방구석 1열 콘서트>.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무대 위의 이승환은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무대를 선사했다. 가슴 절절한 그의 공연을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수진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선가 수진 언니도 이 공연을 보고 있을까?
지금쯤은 중년이 훌쩍 넘었을 수진 언니. 어쩌면 가정을 꾸려 아내로, 엄마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여전히 싱글 라이프를 즐기며 이승환의 공연에 꼬박꼬박 출석 체크를 하는 열혈 팬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황이든 언니가 선택한 삶 속에서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좋아하는 걸 마음껏 누리려면 경제적 안정이 제일 먼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해 준 수진 언니. 그녀를 비롯해 내 인생에는 무수한 언니들이 있었다. 줄줄이 옷도 물려 입고 또 정서적 가치관도 물려받은 두 명의 친언니처럼 늘 가까운 거리에서 크고 작은 영향을 준 언니들이 있다. 또 수진 언니처럼 잠시 스쳤지만 큰 깨달음을 안겨준 언니들도 있다.
‘여성스럽다’가 여성의 매력에 관한 최상의 칭찬인 줄 알았던 나의 편견을 와장창 깨준 멋쁨의 정석, 고등학교 선배 지현 언니. 밥벌이하고 있는 이 직업의 가치관을 바로 잡아 준 첫 사수, 선희 언니. 엄마로 사는 삶도 분명 소중하지만 변호사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단단히 살아가기 위해 잠시 삶의 브레이크를 밟고 아프리카로 날아갔던 용기의 아이콘, 미성 언니. 간호사라는 안정된 직업과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적지 않은 나이에 과감히 수능을 보고 대학생이 되고 또 유학을 떠난 도전 중독자, 희정 언니 등등.
피부 자극을 최소화하는 제모 방법부터 공공기관에서 쫄지 않는 방법, 끈덕지게 따라붙는 진드기 같은 인간을 떼어내는 방법, 무례한 존재들에게 우아하게 한 방 먹이는 방법, 상대방의 마음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 등등 인생의 크고 작은 꿀팁들을 안겨준 수많은 멋진 언니들. 캄캄한 망망대해에 외롭게 떠 있던 나에게 환한 불빛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준 등대 같은 언니들. 그녀들 있어 삐뚤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3.
나도 어느새 누군가에게는 어떤 언니로 기억될 나이다. 인생의 교과서가 되어 준 언니들만큼의 영향력이나 삶의 완성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여전히 나는 앞서가고 있는 언니들의 발뒤꿈치를 쫓아가며 흉내 내고 배우고 있다. 어쩌면 알게 모르게 내 뒤를 따라 걷고 있을 후배들, 동생들에게 ‘잘못된 지도’가 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내 길을 걸어가는 중이다.
그렇게 성실하게 내 몫의 하루를 채우다 보면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멋진 언니로 기억되지 않을까?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