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가에서는 “도둑맞은 아싸”라는 말이 공감을 얻는다고 한다. 실제로는 친구도 많고, 애인도 있고, 딱히 소외되지도 않은 ‘인싸’들이 스스로 ‘아싸’라고 칭하면서 아싸를 패션처럼 소비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자신들이 ‘아싸’라는 콘셉트로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며 브이로그를 올리거나 SNS에 일상을 공개하며 조회 수를 끌어모은다. 혼자 밥을 먹고, 대학가를 거닐고, 자기의 취미생활을 보여주면서 자기가 아싸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아싸들이 보기에는 그저 재미 삼아 아싸인 척하는 인싸들일 뿐이다.
과거에 왕따라든지 아싸라든지 하는 이들은 실제로 부정적인 존재로 취급받았다. 다같이 과 활동을 하는데 유달리 소외되어 학교 활동에도 잘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며 배제되는 사람이라든지, 여러 이유로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가 부족한 이들이 실제로 아싸였다. 스스로도 아싸라는 데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 자체가 상처이기도 한 시절이기도 했다.
요즘 아싸란 그렇게 부끄러운 것도, 상처받을 일도, 스스로가 잘못되었다고 여길만한 존재도 아니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퍼지는 듯하다. 사실 아싸 브이로그를 가리켜 도둑맞은 아싸라곤 하지만, 브이로그를 찍는다고 해서 아싸가 아닌 건 아닐 것이다. 실제로 복학하고 친구 없이 홀로 학교를 다니거나, 혼자 강의를 듣거나, 혼자 밥을 먹는다면 과거의 기준으로는 ‘아싸’가 맞다.
물론 개중에는 어느 정도 인간관계도 맺고 교내에 친구도 있지만, 일시적으로만 혼자 지내며 유튜브 찍는 ‘가짜 아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오히려 그런 아싸야말로 인싸보다 더 보편적인 현상이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아싸가 보편적인 현상이 된다는 건 그만큼 학교가 공동체의 역할을 거의 상실하고, 학교조차 개개인이 거치는 그저 하나의 장소로 전락해감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삶이 너무나도 전적이 되었고, 자기 자신의 삶만을 온전히 살아내는 데 몰두하는 것만이 더 중요해졌다. 여기에서 각자의 삶이란, 직선상에서 흐르는 자기 삶의 시간을 따라간다는 걸 의미한다. 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서는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삶에서 지나가는 하나의 스펙을 쌓는 장소, 필요한 것을 얻어야만 하는 실용적 관점에서의 한 과정일 뿐이다.
실제로 몸은 학교에 있겠지만, 나의 마음이나 정신이랄 것은 내 삶에 속해 있다. 그러한 나의 삶에서는 나의 스펙, 나의 진로, 나의 계획, 나의 세계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그래서 브이로그를 찍는 아싸는, 실제로 학교에서는 아싸일지 모르지만, 그가 인싸인 세계를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학교는 혼자 다니지만, 학교 밖에서는 뮤지컬을 하거나 독서 모임을 할 수도 있고, 유튜브에서는 인기 계정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학교 내에서의 활동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었지만, 이제 학교라는 공간은 그런 ‘내 삶의 무대’로서의 기능을 많이 잃어버린 듯하다. 각자에겐 각자가 선택한 각자 삶의 무대가 있고,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만큼 종래의 집단적 기준이었던, 이를테면, 학교에서 얼마나 친구들과 같이 몰려다니느냐, 학교에서 인기가 많느냐 같은 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을 지니지 못하게 된 셈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는 자발적이고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아싸가 되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깊은 외로움이나 피해의식, 깊은 상처와 관련되어 있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도둑맞은 아싸”란, 그렇게 자기에게는 무척이나 절박한 문제를 패션처럼 갖고 노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나온 말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역시 아싸가 더 이상 과거와 다른 의미망에 속하게 되었고, 그런 아싸의 당연화야말로 이 시대의 많은 것들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아싸란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고, 고정된 것도 아니며, 누군가에게는 아싸야말로 더 자기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지녔다는 증명 같은 게 되기도 하는 셈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