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교수와는 2015년 겨울에 만났다. 서로 얼굴을 보고 마주한 것은 아니고, 그가 쓴 「시간강사 문제 교수들이 나설 때다」라는 칼럼을 읽고 그를 알았다. 나는 그 시기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방시)라는 책을 쓰고 대학에서 나왔다. 오전에는 맥도날드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는 대학에서 강의하거나 연구실에서 논문을 썼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는데, 그건 나에겐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삶이었다.
김누리 교수는 칼럼에서 “학문 세계에 들어온 자가 처음 경험하는 것이 불의와 부조리라면, 처음 느끼는 것이 자괴감과 후회라면, 그 나라의 학문은 이미 죽은 것이다”라면서 나를 언급해 주었다.
그런 그가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라는 신간을 냈다. 나도 한국 사회를 다룬 책을 몇 권 쓰기는 했지만 이 책은 나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한국 사회뿐 아니라 교육, 정치, 문화 등 여러 어려운 테마를 하나의 키워드로 묶어내면서 무척 쉬운 언어로 잘 쓴 책이다. 특히 우리의 ‘불행’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명쾌하게 답해준다.
68은 무엇을 만들었나
김민섭: 얼마 전 ‘차이나는 클라스’에 나온 뒤로 많이 바빠지셨지요?
김누리: 사실 그 방송을 잘 몰랐는데 아내가 열심히 보는 프로그램이라고 이건 꼭 하라고 하더라고요.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기념해서 통일 문제를 다뤄 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한국 사회와 독일 통일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68운동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말하고 왔어요.
김민섭: 명강의였다는 주변의 찬사가 많았어요. 저도 잘 봤고요. 그런데 68운동은 한국에서는 제대로 다루어진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2004년 대학 수업에선 한 마디로 넘어가는 정도였죠. 그렇기에 선생님의 강의와 이번 저서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가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김누리: 2004년이면 관련 서적도 별로 없었을 거예요. 사실 저도 독문학을 공부하고 석사논문까지 쓰고서야 68운동에 대해 처음 들어봤어요. 나름 1970년대 대학생 시절에 운동권 활동도 했는데 말예요. 독일로 유학 가서 독일 현대사를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독일 사회의 68운동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나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김민섭: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다 보면 68운동이 시작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들이 먼저 영향을 받았고 대학의 권위주의 타파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나와요. 예를 들면 대학교수에게도 “김누리 교수님”이 아니라 그냥 “누리!”라고 하면 된다면서요.
김누리: 네, 한국은 68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런 호칭을 생각하기 어렵죠. 독일도 사실 그 이전까지는 교수들의 독재가 심한 곳이었어요. 특히 교수를 호칭하는 방법도 굉장히 복잡해서 “아주 존경하옵는 박사님이자 교수님(Sehr geehrter Herr Professor Doktor)”이라고 호칭해야 했고 ‘정교수 대학(Ordinarienuniversität)’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죠.
말하자면 정교수들이 절대권력을 지니고 군림하는 영주들과도 같은 모양새였는데 그걸 대학생들이 68운동으로 깬 거예요. 그리고 ‘삼분할 원칙’을 마련했는데 대학의 3대 주체인 교수, 학생, 그리고 조교/강사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에요. 한국에서는 강사와 조교가 거의 없는 존재잖아요.
김민섭: 네, 저도 저의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 대학원생 조교로 존재했던 저를 ‘유령’으로 규정했어요. 다른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김누리: 독일에선 이들을 교수와 학생을 매개하는 ‘학문적 중간층(wissenschaftlicher Mittelbau)’이라고 지칭해요. 68운동 이후부터 대학의 3대 주체는 33.3%씩 모든 권한을 동등하게 부여받게 되었어요.
1969년에는 베를린대학교에서 대학원생 조교였던 롤프 크라이비히 (Rolf Kreibich)가 총장에 출마하여 압승으로 당선됐고, 임기 내 성과를 인정받아 4년 후 재선까지 했죠. 크라이비히가 총장이었던 그 시기는 베를린대학교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활기차고 풍성한 성과를 낸 것으로 인정받아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68운동의 물결에서 이루어진 것이죠. 그 이전에는 독일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에요.
김민섭: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도 그때 해체된 거지요?
김누리: 맞아요. 68운동 이후 소르본 대학도 없어졌지요. 소르본 대학을 해체한 것은 소르본 대학으로 인해 가장 고통을 받은 고등학생들이었어요. 수만 명의 학생이 파리의 거리로 나와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도 존엄한 인간이다”라고 외쳤죠.
결국 68운동은 억압과 해방의 문제예요. 인류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모든 해방은 기본적으로 자기 해방이었어요. 고통받는 자가 결국 저항하고 저항한 자가 해방되는. 누군가가 대신 해방해준 경우는 없었어요. 지난번 ‘차이나는 클라스’ 147회에서 말했듯이, 젊은 학생들이 스스로를 해방해야 해요.
김민섭: 68운동을 기점으로 그만큼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게 놀랍네요.
김누리: 그래서 우리는 68운동을 더 공부해야 해요. 68운동 이후 독일은 ‘교양사회’로 나아가요. 교양사회란 노동자 계층의 자녀들까지 전 국민이 최고의 교양을 갖출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는 사회를 일컬어요.
독일의 수상 빌리 브란트는 부잣집 아이들은 공부만 하는데 가난한 집 아이들은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에 부합하지 않는다 보았고, 그때부터 모든 대학생에게 생활비를 지급해요. 누구도 학습에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요. 그래서 독일의 대학생들은 1969년부터 아직도 한 달에 약 110만 원의 생활비를 받아 가면서 공부해요.
김민섭: 한국의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네요. 한국에서는 교내 근로를 하면서 그마저도 급여가 아니라 장학금의 형태로 지급받게 되는데요.
김누리: 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대학원생들에게 생활비를 장학금 형식으로 지급해주겠노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감사히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부했어요. 자신들이 시혜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연구보수(Studienhonorar)로 받겠다고 요구한 거죠. 연구는 자신이 아닌 사회를 위한, 사회적 노동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68운동 시기 학생들의 생각이 놀랍죠?
김민섭: 저는 조교를 할 때 어떻게 하면 장학금을 더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교내근로 일을 더 찾아보고 했는데, 대한민국에서 공부한다는 건 참 처연한 일이기도 하네요. 그러한 사유의 차이가 결국 68운동에서 나오는 것이군요.
김누리: 김민섭 선생께서도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책을 쓰고 계신 만큼 68운동에 관해 공부할 필요가 있어요. 저는 68운동을 알면서 한국 사회를 더 깊게 알게 됐고, 이걸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했지요.
김민섭: 공부하겠습니다. 김누리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68운동에 관심이 생기신 건가요?
김누리: 그건 최근의 일이에요. 1990년대 독일이 통일되면서, 주변 국가들이 전범 국가라는 과거에도 통일을 도와주고 용인해 준 데 대한 감사와 사죄의 명분으로, 1991년부터 독일과 유럽을 연구하는 기관을 지정해서 지원하기 시작했어요. 아시아 지역에서는 1호가 도쿄대학교, 2호가 베이징대학교, 3호가 중앙대학교예요.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독일로부터 매년 25만 유로 정도의 지원을 받아요. 우리 학교 독일유럽학과 학생들에게는 대단한 기회라고 할 수 있죠.
김민섭: 선생님이 센터장이시잖아요!
김누리: 하하, 제가 연구센터 설립에 일정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반재벌적인 목소리를 많이 내면서 두산 자본의 중앙대 잠식을 비판했기 때문에 중앙대에서도 마냥 좋지는 않았을 거예요. 두산 자본이 중앙대에 들어온 이래로 저는 오랜 기간 싸워왔어요.
김민섭: 독일은 타국의 연구기관에 돈까지 지원해 가면서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를 공부해 달라고 하는데, 반성이 없는 일본과는 너무 대조적이네요.
김누리: 맞아요. 사실 많은 사람이 21세기에는 동아시아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잖아요. 저는 그 이유를 일본의 과거, 한국의 현재, 중국의 미래, 이 세 가지 때문이라고 봐요. 일본은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탁월한 성과를 보이는 국가임에도 윤리적인 존중을 받지 못해요. 분단된 한반도의 현재는 물리적으로 동북아를 갈라놓아요. 거기에 미래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공포가 불식되지 않으면, 동북아는 서로 소통할 수가 없지요.
김민섭: 결국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나라에 미래는 없는 것이군요. 특히 일본이…
김누리: 아, 멋진 말이네요. 그런데 이 세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 단 하나의 나라가 있어요. 바로 독일이에요. 이걸 바탕으로 유럽연합을 구성할 수 있게 된 거죠. 독일은 전범국가였던 과거를 비교적 잘 청산했고, 아직은 이런저런 후유증이 있지만 통일을 잘 이뤄냈고, 통일 후 거대한 국가가 됐음에도 오랜 세월 동안 진정성이 포함된 반성을 해 왔기에 주변국의 불안을 불식시킬 수 있었죠.
그래서 중앙대, 도쿄대, 베이징대, 이렇게 3개의 학교가 돌아가면서 독일로부터 배우는 담론의 장을 만들고자 해요. 2018년이 한국의 차례였는데 68운동 50주년이니까 이견의 여지가 없이 그걸 주제로 하게 됐는데, 일본에서는 5명이 발표하겠다고 했고 중국에서는 4명이 발표하겠다고 했고 한국에서는 놀랍게도 한 명도 지원자가 없었어요.
일본과 중국은 68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한국은 그와 관계가 별로 없으니 발표할 거리가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결국 제가 발표했어요. “왜 한국에는 68운동이 없었는가”하는 것을 주제로 한국예외주의(Korean exceptionalism)를 제목으로 삼아 발표했죠.
김민섭: 왜 한국에는 68운동이 없었던 건가요?
김누리: 사실 한국의 현대사를 살피다 보면 박정희로 항상 귀결이 돼요.
김민섭: ‘또 박정희’인가요?
김누리: 68운동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 참상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이용당하는가 청년들이 자각하게 된 거죠. 그런데 다른 나라들이 억압으로부터 해방으로 나아갈 때, 한국은 참전을 했죠. 결국 정치적으로 민주화도 늦어지고, 문화적으로는 그보다도 더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군사문화적인 모습으로 퇴행하게 됐어요. 한국만이 68운동의 흐름에 역행해서 조직적인 억압의 사회가 된 거예요. 예를 들어 볼까요. 국민교육헌장, 예비군 훈련, 교련, 주민등록 등 전 국가를 병영화하는 제도들이 1968년 이후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와요.
김민섭: 한국도 68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면 지금의 대학뿐 아니라 사회의 분위기 자체가 아주 많이 달랐겠군요. 선생님도 아시지만 저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을 쓰고 대학에서 나왔어요. 그 이후에 제가 나온, 그러한 구조와 문화를 만든 기원은 어디에 있을까 많이 생각해 봤는데, 정말 68운동을 공부해 봐야겠어요.
김누리: 맞아요.
김민섭: 제가 대학에서 나왔을 때 선생님께서 ‘시간강사 문제 대학교수들이 나설 때다’라는 칼럼을 써 주셨잖아요. 외롭고 막막하던 저에게 큰 힘이 되는 글이었어요. 그때 어떤 마음이셨는지 꼭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김누리: 개인적으로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서평을 보고 바로 구해서 아주 공감하며 읽었어요. 학자 후배에게 너무 미안한데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었고요. 저 역시 대학을 민주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활동했지만 많은 것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학에 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글도 좀 썼지요. 그러면서 자본독재 치하의 대학이 왜 이렇게 됐는지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독일의 교육
김민섭: 저는 7살과 4살 두 아이의 아빠인데요, 당연히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있어요. 책에서 교육의 문제를 많이 다루고 계신 것이 인상 깊었어요. “독일의 청소년들은 비판의식이 굉장히 강하다. 독일의 교사들은 자신의 말을 믿지 말고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특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제1장의 제목은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는가’이다.”라고요. 사실 한국에서는 교사들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독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정답보다는 잘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 같아요.
김누리: 한국은 정답을 빨리 잘 고르는 아이들을 우수하다고 꼽는데 독일에서 그런 아이들은 바보 소리를 들어요. 독일의 교육은 비판 교육의 개념으로 봐야 해요.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규범과 질서, 언어 체계를 배워서 기존 질서에 적응하게 하는 것, 즉 사회화잖아요.
김민섭: 한국의 교육은 기존 질서를 옳다고 보고 답이 아닌 것을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데 비해서, 독일 학생들은 답이 아닌 것을 말하면서 그걸 답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같아요.
김누리: 맞아요. 독일에서는 기존 질서가 곧 권력의 질서이므로 비판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한 교육의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나치 독일의 과거, 그 파시즘적인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에요.
김민섭: 반성과 성찰의 교육이자 태도라고 볼 수 있겠네요.
김누리: 끔찍한 짓을 저지른 만큼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이들에게 사유하고 비판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보는 거죠. 모든 지식은 권력의 지식이니까요. 우리가 지식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기존 권력자의 지식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예요. 경쟁의 정의와 효율성을 숭배하는 한국의 경쟁지상주의 역시 경쟁을 통해 지배하는 한국의 권력계층이 주장하는 것임을 직시해야 해요. 독일 학생들 같으면 왜 경쟁이 가장 올바른 경제발전의 토대인가, 그 주장 배후에는 어떤 권력이 작동하는가 등등의 질문을 던져요.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들죠.
김민섭: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면 대학원 근처까지는 가야 하잖아요.
김누리: 대학원 가서도 못 듣는 경우가 부지기수죠. 좀 별난 교수를 만나야 할 수 있을 텐데요. (하하) 그러나 그건 미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예요. 독일의 비판 교육의 전통이 특출나게 강한 거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을 비판이론이라 일컬어요. 그 이론이 1970년대 독일 교육이론의 바탕이 되었죠. 어느 나라나 교육의 목표는 일반적으로 적응시키는 것이고, 기존 질서를 비판하는 교육은 어디서나 상상하기 쉽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와 같은 지식인도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사유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죠. 무지는 용서할 수 있으나 무사유는 범죄라고요.
김민섭: 어쩌면 지식을 쌓는 것은 개인의 몫이고 사유를 쌓는 것은 사회의 몫이 될 수 있겠네요.
김누리: 그러한 측면도 있죠. 한나 아렌트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무지는 지식의 부정이지만 무사유는 의미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유하지 않는 것은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행위예요. 한국 사회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길러요. 교육 자체에 범죄적인 면모가 있어요.
지난번 ‘차이나는 클라스’에서도 한국의 교육은 교육이 아닌 정도를 넘어선 반(反)교육이라고 말했어요. 안 받느니만 못한 교육이죠. 지난 세기 동안 이어진 한국의 교육을 복기해봐야 해요. 30여 년 동안은 황국신민을 만드는 것이 교육이었고, 40년간은 민간독재 10년과 군사독재 30년 아래의 반공투사와 산업역군을 기르는 것이 교육이었고, 소위 민주 정부 30년간마저도 인적 자원 양성이 교육이었어요. 단 한 번도 존엄한 인간과 성숙한 민주주의자 육성하는 교육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모두들 오늘날 이렇게 괴물처럼 된 거예요.
김민섭: 100년 전만 해도 (제국주의 시대에만 해도) 모든 국가가 지금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갔을 텐데, 말하자면 그 변화의 중심에 68운동이 있다는 것이겠네요.
김누리: 독일도 우리와 비슷했지만 68운동 무렵에 바뀐 거예요. 독일의 비판 교육을 강조하는 모습의 과거에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같이 5개의 선택지 중에서 혹은 단답형으로 정답을 고르는 파시즘적인 교육이 있었어요. 시키는 대로 외워서 그대로 암송하는 학생이야말로 파시즘적 교육의 이상이자 파시즘의 신민이에요.
한국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거 아녜요? SKY로 대표되는 한국의 최우등생들이 대접받으면서 양성된 후 만들어나간 세상이 바로 지금의 지옥 같은 모습이에요. 그에 대한 반성이 필요해요. 우병우, 조윤선, 김기춘 등, 소위 서울법대로 대표되는 한국 교육 제도의 최상품들이 한 짓거리를 봐요. 한국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산증인들이에요. 이런 것을 개혁해야만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어요.
※ 해당 기사는 해냄출판사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