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매거진 《언유주얼 An usual 7호 – 그럴 나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언유주얼에서는 마시즘의 인생음료 에세이는 물론 다양한 덕후, 작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어요!
부와 명성. 그리고 두 번의 우승까지. 한때 야구의 모든 것을 얻었던 남자. LG 트윈스 전 구단주 故구본무 회장은 세 번째 우승 선물을 준비하며 말했다. “나의 보물? 원한다면 주도록 하지. 우승만 해 봐. 이 세상 전부를 거기에 두었으니까.”
… 표절하고 있네. 무슨 『원피스』냐?
친구는 짜증을 내며 말했지만 안다. 속으로는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말이다. 프로 야구가 시작되는 봄에는 야구팬의 마음속에 ‘우승 설렘주의보’가 펼치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친구 역시 올해의 LG 트윈스는 다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탄탄한 선수층, 승리에 대한 남다른 목마름이 있기 때문에 우승은 당연히 LG의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문제는 이게 10년 전의 레퍼토리라는 것이고, 더욱 문제는 매년 같은 소리를 알람처럼 반복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마시기 힘든 음료, LG 트윈스 우승주
음료덕후 마시즘이 왜 난데없이 야구 이야기를 한 것일까. 그것은 구본무 회장의 우승 선물 중 하나가 ‘아와모리 소주’였기 때문이다. LG 트윈스 2군 선수들의 이름까지 외울 정도로 소문난 ‘야빠’였던 구본무 회장은 1994년 일본 오키나와 전지훈련장에 방문하며 지역 특산주인 ‘아와모리 소주’를 샀다. 그는 “올 시즌 우승을 하면 이 술로 건배하자”라고 제안을 했다. 그리고 그 해에 LG 트윈스는 정말로 우승을 했다.
구본무 회장은 다음 해 전지훈련에도 방문해 ‘아와모리 소주’를 사고, 다음 우승 때 마시기로 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아와모리 소주의 뚜껑이 25년간 열릴 일이 없었다는 것을.
매년 스포츠 기자와 야구팬 사이에서는 ‘올해의 LG 트윈스는 우승주를 마실 수 있을 것인가’로 시즌을 시작한다. 우승의 상징이었던 팀이 동네북처럼 변하자 구본무 회장은 당시 8,000만 원 상당의 ‘롤렉스 116598 SACO’를 사서 한국시리즈 MVP에게 주겠다는 공약을 한다. 물론 이 롤렉스 역시 누구의 손목에도 채워지지 못한 채 구단의 금고 속에 잠들어 있다.
2000년, 구본무 회장은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 ‘백주 수표’라도 써 주겠다고 초강수를 내놨는데, 팬들 사이에서는 ‘회장님께서 사실상 우승 확률이 0에 수렴한 것을 눈치챈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나이만 곧 서른, 아와모리 소주는 남아 있을까
비슷한 일이 메이저 리그에서도 있었다. 시카고 컵스가 준우승에 그치자 다음 우승 때 마시겠다고 아껴 놓았던 캔 맥주를 32년 만에 꺼낸 팬이 있다. 맥주는 이미 식초가 되어 버려서 마시지 못했지만, LG 트윈스 우승주는 식초가 될 우려가 없다. 아와모리 소주는 보관만 잘하면 100년이 지나도 풍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술이다. 애초에 43도짜리 고도수의 술은 상할 염려가 없다.
문제는 증발이다. 항아리에 담긴 술은 매년 조금씩 증발한다. 스코틀랜드의 사례를 보자면, 오크통에 담긴 위스키들은 한 해에 1~2%가 증발하여 사라진다고 한다(같은 오크통이어도 기후 때문에 한국에서는 5~10%가 증발된다). 이렇게 사라진 위스키를 ‘엔젤스 셰어(Angels’ Share)’ 즉 천사의 몫이라고 부른다.
최악의 상황(매년 10% 증발)을 고려한다면 26년 된 LG 트윈스의 우승주는 현재 93%가량이 날아갔을 것이다. 천사 치고는 너무 많이 마셨다. 하지만 LG 트윈스 경기를 맨정신으로 보기 힘들었다는 이유에서라면……. 음.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깊어지는 것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듯 승리를 따내는 녀석들은 모른다. 술이든 승리든 고통과 인내, 추억을 함께해야 그 맛과 향이 깊어지는 법이다. 오키나와 아와모리 소주의 경우는 구매한 사람들이 10년 후를 기약하며 각자의 꿈이나 편지, 사진을 술병에 걸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었을 때 술을 열어 마신다. LG 트윈스의 우승주 항아리에 술이 얼마나 남았건 그것을 열어 기념할 때의 기쁨은 어떤 술보다 깊고 맛있지 않을까?
코로나19에, 시범경기 취소에 우승 설레발(?)도 낄 틈 없어 지쳐있는 LG 트윈스의 팬에게 위로를 건넸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포기하면 안 된다고. 우승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한 경기, 한 경기의 추억이라고 말이다. 만약 네가 입은 유니폼에 새겨진 LG 트윈스 박용택 선수와 LG 트윈스 우승을 바꿀 수 있는 버튼이 있다면 감히 누를 수 있겠냐고 말이다. 야구와 팬의 관계는 그런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친구는 감동한 듯 말했다.
그런 버튼이 있다고? 가져다만 줘 봐. 그 위에서 탭 댄스라도 출 수 있으니까.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