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때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시대적 사명에도 어쩔 수 없이 모여야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입찰에서 제안서를 설명 및 평가하는 자리다. 지난주 근무일 5일 가운데 4일을 평가장에서 보낸, 어쩌면 ‘평가(혹은 심사)’가 전문일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써 여러 가지가 변화하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고 몸이 가벼운(?) 편이라 개발협력을 비롯한 각종 심사에 자주 초대받는 편인데, 코로나19가 번진 뒤로는 가는 곳마다 다른 형식으로 심사를 하니, 장래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 일단 이걸 적어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병존
우선 오프라인형은 나라장터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평가를 제외하면 기존에 대부분의 입찰 기관에서 늘 하던 방식이다. 지금도 일부 기관은 이 방식을 고집한다. 대기실에서 제안사 별로 초조하게 발표 순서를 기다리고, 제안 발표 자는 확신에 찬, 혹은 무척 떨리는 목소리로 시간에 쫓기며 설명하고, 발표가 끝난 뒤 평가위원들과 조심스런 질의응답이 오가는 풍경… 모두가 아는 그런 모습이다. 제안서와 발표 자료는 인쇄, 제본하여 평가위원 앞에 쌓아두고, 평가 결과를 담은 평가지 역시 종이에 빈칸을 채우고 적는 식이다.
세 번째에 있는 100% 온라인형 역시 새로워 보이지만 최근에 새로 만든 방식은 아니다. 2008년에 처음 도입되었으니 이미 10년이 넘었다. 다만 최근 코로나19 때문에 오프라인 평가에 부담을 느낀 입찰 기관이 온라인 평가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래서 새로워 보인다.
여기서는 제안서를 온라인으로 제출하고, 온라인으로 제안 설명을 하고, 온라인으로 질의응답을 하며, 온라인으로 평가지를 작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표 자뿐 아니라 평가위원들 역시 각자의 공간에서 평가에 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라장터가 10여 년 공들여 키워온 온라인 평가 전용 웹사이트의 역할이 크다.
평가위원이 각자의 공간에서 평가를 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따른다. 제안서, 발표 자료 등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아야 한다. 또 평가위원이 평가과정에서 외부와 연락하면 안 된다. 자료 유출은 디지털 권리 관리(Digital Right Management, DRM) 시스템이 막아주는데, 평가위원이 외부와 연락하는 걸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인다. 다만 이 문제는 다수의 평가위원을 배치하고 임의로(Randomly) 선정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방지된다고 본다.
두 번째 분류에 있는, 요새 새로 선보이는 유형은 오프라인형에서 온라인형으로 넘어가는 절충형이다. 원래 입찰 평가가 잦은 공공 기관은 PC방처럼 생긴, 평가위원마다 모니터와 컴퓨터가 배정된 평가 전용 공간이 있다. 거기서 제안서와 발표 자료 등을 파일 형태로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 기관에서는 아직까지도 종이로 출력해 제본한 자료를 내놓기도 한다. 절충형의 특징은 발표 자가 직접 나와서 하던 제안 발표를 화상회의 방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절충형 가운데 전용공간을 활용하는 제안평가장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제안서도 발표 자도 없는 평가장
일단 제안서와 발표 자료를 출력한 서류뭉치가 없다. 평가위원 앞에 놓인 모니터에 제안 요청서와 진행 순서 등을 담은 문서가 열려있고, 제안사 이름이 달린 폴더에는 제안서와 발표 자료 등이 담겨있다.
이전에도 IT 업무를 하는 입찰처에서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으나, 최근 들어 모든 부문에서 비접촉(Untact) 방식이 늘면서 더 많은 입찰에서 종이 서류가 사라지는 모양이다. 환경을 위해서도 좋은 현상이다. (과거에는 잠깐 보고 버려지는 많은 제안서류를 두고 ‘나무야 미안해’ 프로젝트라는 자조적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 입찰평가장에는 발표 자도 없다. 진행요원과 평가위원만 있다. 그것도 매우 띄엄띄엄 앉아있다. 마스크를 낀 채로…
제안서 발표는 스크린을 통해 원격으로 한다. 발표 자료를 제출할 때 아예 녹화한 설명 자료를 제안서와 함께 제출한다. 어떤 입찰은 녹화 파일을 트는 것으로 발표를 대신하고, 다른 입찰에서는 실시간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통해 발표를 한다. 실시간 발표를 하는 입찰에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녹화 파일 제출이 의무화되어 있다. 이러나저러나 녹화는 해야 한다는 얘기다.
실시간이나 녹화 파일로 화상 발표가 끝나면 실시간 질의응답이 시작된다. 이때 평가위원들은 발표 자를 볼 수 있지만, 어떤 입찰에서는 발표 자에게 평가위원을 보지 못하게 한다. 평가장 카메라를 천장으로 향하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면 평가위원은 좀 더 심리적으로 용감(?)해진다.
더 진일보한 질의응답 방식도 있다. 화상 발표 전에 입찰 기관이 화상회의 프로그램이나 스카이프(skype) 등 별도 통신 프로그램에 제안사별로 채팅방을 만들어 둔다. 나라장터 온라인 평가 전용 프로그램에도 채팅창이 있는데, 평가위원이 발표 시간에 질문을 채팅창에 입력해 두면, 발표를 마친 발표 자가 그 질문에 하나씩 응답하는 방식이다. 공평하기 이를 데 없는 어떤 평가위원은 똑같은 질문을 모든 제안사에게 Ctrl + C, Ctrl + V로 던지기도 한다.
여기서도 평가위원은 위원 1, 위원 2, 위원 3 같은 아이디를 쓰기 때문에 익명성에 기대어 용감하게 질문할 수 있다. 나라장터 온라인 평가에서는 실명을 까고(?) 하지만, 이런 채팅 질문은 장점이 많다. 평가위원이 말로 물을 때보다 글로 쓸 때는 아무래도 좀 더 명료하게 묻게 된다. 답변하는 발표자도 평가위원의 감정(!)이 배제된 채로 올라오는 건조한 글을 읽으면서 답변하기 때문에 좀 더 유리하다.
변화에는 대응할 뿐
이런 변화에 제안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제안서와 발표 자료의 편집 기준을 출력된 종이 문서가 아니라 전자 파일(pdf)에 둬야 한다. 단순하게 같은 문서를 출력하면서 프린터로 종이에 하느냐, pdf로 전환하느냐 하는 차이만이 아니다. 아직까지 많은 평가위원은 pdf로 오래 글을 읽지 못하는 연배다. 종이 서류와 가독성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조금만 컴퓨터 사용에 익숙한 평가위원이라면 종이 제안서와 달리 ‘검색’ 기능을 활용하여 궁금한 사항을 순식간에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고려대상이다.
화면에 어떻게 비칠지도 중요하다. 어떤 화상회의 프로그램의 경우, PPT 파일이 4:3이나 16:9 비율이 아니라 정사각형(!)으로 나온다. 제안서 구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또, 이를 미리 파악하지 못하면, 정사각형 공간에서 위아래를 다 까먹고 중간에 플래카드처럼 올려진 16:9 PPT 파일 때문에 경쟁사보다 훨씬 작은 글씨로 발표하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둘째, 제안발표 녹화는 파워포인트 녹화 기능을 사용하는 편이 좋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수많은 교수님이 이걸로 고생할 테지만, 잘 만들면 나쁘지 않다. 기업 회의실에서 스크린을 통해 발표 자료를 보여주면서 발표 자가 설명하는 걸 카메라로 촬영하는 방식은 의외로 잘 안 보인다. TV 화면을 카메라로 찍으면 어떤지 생각해 보시라. 발표 자가 정우성급 외모가 아니라면 굳이 화면에 나와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음질 역시 중요하다. 발표 녹화를 위해 전문 스튜디오를 찾을 수는 없더라도 웬만한 수준의 마이크를 쓰시라. 잡음 없이 깨끗한 목소리로 설명을 들으면, 어쩐지 신뢰가 더 간다. 발표 자가 말이 좀 느리다면 편집 과정에서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교수님이 힘이 없을까 생각하던 학생이 녹화강의를 평소처럼 2배속이 아니라 원래 속도로 들어서 그랬다는 얘기를 생각해 보시라.
셋째, 발표 앞부분에서 중요한 얘기를 다 해야 한다. 현장 발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녹화 발표는 듣는 도중에 평가위원들은 질문을 준비한다. 그들이 발표 자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은 발표를 시작하고 고작 3분~5분 정도다. 10분~20분인 발표시간을 생각하면 그것도 많이 준 거다. 기승전결 있는 발표랍시고 앞에서는 입찰 배경과 제안사 소개만 하다가 맨 뒤에 대미를 장식하려고 하면 기회는 오지 않는다.
넷째, 언제나 질의응답이 가장 중요하다. 보통 제안서를 읽어보는 시간을 따로 주기도 하지만, 얼마만큼의 시간을 주든 평가위원이 그 자리에서 제안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모두 읽어보기란 불가능하다. 평가위원의 경험에 의존해 중요한 포인트를 찾아보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제안서보다는 발표(자료)를 더 신경 써서 보고, 발표보다는 평가위원 본인이 궁금한 내용에 어떻게 답하는가가 더 중요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화상회의를 통한 발표에서는 평가위원이 질의를 더 정밀하게 한다. 질문을 준비할 시간이 많고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외부인의 시각에서 질의응답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화상 발표에는 현장 발표에 적용되는 참석자 수 제한이 없다. 제안서를 쓴 담당자들이 배석해 있다가 각 분야 질문마다 화면에서 안 보이는 쪽에 앉아 도움을 주거나, 아예 답변자를 바꿔가면서 대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질문의 대답도 앞쪽이 중요하다. 우선 평가위원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고 부수적인 설명을 더해 가야 한다. 앞에서 요점이 아닌 다른 얘기부터 줄줄 늘어놓으면 듣지를 않는다. 노련한 평가위원들은 질의응답 시간에 항목별 점수를 다 매긴다는 점을 잊지 마시라. 마지막 발표 자의 질의응답이 끝남과 동시에 모든 평가점수를 척 내놓고 일어설 수 있도록 말이다.
마지막으로 ‘플랜B’도 준비해야 한다. 기업의 화상회의, 대학의 온라인 강의에 이어 4월 6일부터 초중고도 온라인 개학을 했다. 특정 시간대에 트래픽이 몰리면 화면이 일그러지거나 심한 경우 끊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질의응답을 음성으로만 진행하는데, 당황하지 말고 발표 자료를 최대한 활용해서 답변하도록 준비해야 한다. 음성만으로 설명하는 상황을 가정해 본 것과 그러지 않은 것만으로도 차이가 크다.
제안 발표의 미래는?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코로나19가 가져올 여파 가운데 제안 발표 관행의 변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상 발표와 질의응답은 비용과 시간 측면에서 확실히 이점이 크다.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도 생겼을 변화가 좀 더 일찍 도착한 것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앞으로는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의 제안 발표 기법이 등장할 수 있다. 화상 발표가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 지금까지 써왔던, 발표 자가 현장에서 앞으로, 뒤로, 포인터 버튼만 조작하면 발표하는, 정적 화면이 아니라 3D나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는 등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진다. 이미 화상에서 색연필을 사용하는 발표 자를 목격했다! 어쩌면 이런 자료를 큰 돈 들이지 않고 쉽게 만드는 앱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전자문서가 제안서 표준이 되면 편집 방식 역시 바뀔 수 있다. 제안서 본문에 링크를 달아 제출할 수도 있다. 지금도 pdf 화면에서 인터넷 출처를 Ctrl 키와 함께 누르면 웹페이지를 열 수 있지 않은가? 참조하기 편하도록 제안서 안에서 관련된 부분을 ‘☞’ 기호와 함께 서로 연결해 두는 것도 가능하다.
코로나19는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긴 변화는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늘 하는 입찰 업무에서부터 변화를 준비해보면 어떤가.
원문: 개발협력에 마케팅을 더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