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님, 괜찮아요? 정신이 들어요? 삽질은 처음이죠?
비즈니스 토론클럽 인사이터 매거진B 오프라인 모임의 오퍼레이터이자, 광고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한나입니다. 오늘은 제가 스스로 마케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던 과거를 되짚어 봅니다.
평범한 마케터 A는 과제를 받습니다. 우리 회사 신제품을 밀레니얼 타깃에게 2천 개 팔아오세요. 예산은 목표매출의 15%입니다. 보통 이런 과제를 받으면 우리 신제품이 안착해야 할 시장에 대해서부터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선크림을 팔아야 한다면 자외선 차단제 시장을 먼저 떠올리겠죠. 마케터마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타깃 소비자에서부터 고민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가격대나 우리 제품의 특징을 봤을 때, 안착해야 할 소비자 타깃 시장을 정의하는 거죠.
어쨌든 마케팅 과제를 풀기 위한 시작점을 어디로 삼든지 간에 대개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실무 플로우는 비슷할 겁니다. 우리가 안착해야 할 목표 시장의 특징과 경쟁사를 파악하고, 소비자들의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분석하고, 우리는 어떤 지점을 파고드는 전략을 취할 것이며, 그들의 기억 속에 남는 제품이 될 것이며, 사게 할 것인지 아이디어를 내는 흐름으로요.
이 과정에서 마케터들은 몇 가지 삽질 루트를 탑니다. 그 루트에 따라 마케터 유형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요. 제가 탔던 대표적인 삽질테크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다섯 가지 유형을 거쳐 저는 퇴사를 했답니다.
1. 평론가
뭐야 우리 제품 세상에서 제일 구려. 쓰레기야. 왜 출시했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첫인상부터 우리 제품이 별로라고 생각하는 유형입니다. 생각보다 마케터 중에는 이런 유형이 많습니다. 자신은 시크하고 유능한 마케터인데 불행하게도 하필 맡은 제품이 구려서 실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입니다. 이미 내가 아는 경쟁사 제품과 비교했을 때 자사 제품이 덜 떨어져보이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혀 일을 도저히 진전시킬 수가 없죠. 바들바들 떨면서 5초에 한 번씩 이딴 신제품을 만들다니… 생각합니다.
마음속으로 기획자나 CEO를 경멸하기도 합니다. 내가 못 팔아서가 아니라 제품이 구려서라는 생각을 이미 전제하기에 판매를 시작하기도 전에 100% 마케팅이 망하는 케이스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 제품의 부정적인 면에만 주목하는 마케터는 절대 마케팅을 성공시킬 수 없습니다. 설령 부족할지라도 제품의 차별점을 발굴해내는 것도 마케터의 중요한 자질입니다. 이런 유형의 마케터가 해결해야 할 것은 완벽한 제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발견해내는 통찰력입니다.
2. 흥선대원군st
아우 나라면 안 사지 이런 건~ 난 내가 쓰는 것만 써서~ㅋ
1번의 연장선에 있는 마케터 유형입니다. 자사 제품, 서비스 이용해보지 않고 판매하는 경우입니다. 취향과 소비가 확고해서 마음속에 이미 쇄국정책을 펼친다면 여기에 해당합니다. 소비자가 되어본 적이 없는데 시장을 이해할 리가 없죠. 사실 어떤 제품의 마케팅을 가장 잘해줄 수 있는 건 구매해 본 소비자들일 겁니다. 입소문이 알아서 잘 나면 좋겠지만 대개 그렇지 않기 때문에, 돈을 주고 살만한 제품의 구매동인을 찾아내서 전략을 만드는 마케터라는 직업이 필요한 것일 텐데요.
어떻게 해야 주머니를 열까 백날 앉아서 상상해봤자, 자기 주머니를 열어본 적 없으면 절대 소비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제품을 사용해보지 않고서 제품의 시장성을 만든다는 건 좀 웃긴 일입니다. 간도 안 보고 음식을 파는 거랑 똑같은 거죠. 우연히 성공할 수 있겠으나 좋은 습관을 가진 마케터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3. 알파고st “구글 검색으로 시장조사 다 뿌심”
일단 검색부터 하고 보는 유형입니다. 마켓에 대한 조사를 구글 신에게 완전히 위임한 경우인데요. 기본적인 자료 조사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문제는 자료조사 – 결론으로 갑작스럽게 생각이 이어지는 마케터가 많다는 겁니다. 마케터 뿐만 아니라 누구든 새로운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구글링은 기본일 겁니다. 예전에 저도 구글밖에 의존할 데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트렌드 분석, 시장 규모, □□□ 트렌드 설문조사 등을 수천 번 검색하고 또 검색하곤 했습니다. 2020년 트렌드 찾고 싶은데 검색 결과에는 2017년 트렌드만 나와서 미칠 것 같은 경험도 많이 하곤 하죠.
마케터는 통찰하기 위해 양질의 정보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인맥이라는 말 개인적으로 좀 불편하지만, 인맥이 중요한 직업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어 구글에만 의존하는 마케터는 참 슬픕니다. 몇 시간을 공들여 찾은 결과물이 방구석 분석인지, 정말 공신력이 있는 정보인지 알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헤매기 일쑤입니다. 요즘 이런 사업이 뜬다더라~ 대박 난 걔는 이게 전략이라더라~ 하는 몹쓸 카더라 사이에서 전략을 만듭니다. 이것 역시 정말 대표적인 마케터 삽질 유형이죠.
4. 인간복사기 유형 feat. 레퍼런스
마케터는 좋고 나쁜 마케팅 사례에 참 예민합니다. 좋은 사례를 보면 마음이 설레죠. 나도 저런 마케팅 번 해보고 싶다. 그리고 과제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내내, 가슴 한 켠 저장해두었던 그때 그 좋았던 레퍼런스를 놓지 못합니다. 의도치 않게 좋다고 생각한 레퍼런스의 일부분이 내 아이디어와 닮아감을 느낍니다. 전략이 아니라 아이디어부터 생각하는 전형적인 실수를 범하는 케이스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시간이 없는 경우이거나 or 대표나 선임이 레퍼런스없이는 아이디어를 절대 컨펌하지 않는 상황이면, 대개 마케터가 쉽게 이런 유형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레퍼런스는 마케터에게 선악과같은 겁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먹으면 독이 되는 것이기도 하죠. 레퍼런스에 관한 설명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생략하고, 제가 인사이터에서 공부했던 자료를 통해 따로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5. 잡스 주니어
제품이 아니라 가치를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거의 모든 마케터가 잡스병을 앓은 경험이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마케터라면 제품이 아니라 상황을 팔아야 한다는 말에 가슴 한 번 뜨거워져본 적 있을 겁니다. 기술이 아니라 인문학을 판다고 말했던 잡스의 철학과 닮아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마케터는 일단 제품을 판매한다는 것을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나 마케터는 시장에 물건을 내놓는 사람들입니다. 장사꾼이냐고요? 네니오. 어떻게 하면 장사가 잘 될지 전략을 만들고 실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장사꾼이 맞습니다만, 고객의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장사꾼에만 그치지 않는 것도 맞습니다.
그럼 여기서 주니어 잡스들이 간과하는 점은 뭘까요? 마케터에게 고객의 가치 창출이 ‘이윤창출’을 매개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잡스 같은 사람들은 이윤창출이 티 나지 않게 참 잘 하죠. 그러나 이윤창출 티 나지 않게 하려고 마케팅만 잘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탐스의 사례를 아시나요? 신발 한 켤레를 구매하면 그만큼 기부하는 브랜드로 존경할만한 브랜드인 것 같았지만,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마케터가 무조건 팔려고 하는 사장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지만(저도 그랬고), 사실 비즈니스를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관점을 마케터 역시 고려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치열하게 사는 회사에서, 마케터만 홀로 철학하는 사색가로 남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홀로남기는, 1번 마케터 유형부터 4번 유형까지 연쇄적으로 마케터의 삽질루트를 만드는 시발점이되기도 합니다.
마케터로 산다는 것
마케팅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해도 해도 부족하죠. 좋은 상품의 부재, 인지도 부족, 예산 부족, 인력 부족, 정보 부족, 탓을 하려면 할 것이 넘쳐나는 일이 마케팅입니다. 게다가 성과가 마케팅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좀 애매한 경우가 많죠. 잘되면 사장 탓이고 안되면 마케팅 탓인 경험 다들 몇 번씩 해보셨나요? 이런 상황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갉아먹을 일이 참 많은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객과 브랜드의 다리를 연결하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자 가치와 의미가 넘치는 일이며, 가장 변화가 많고 생동감 넘치는 일이라 마케팅은 중독성이 있는 일이기도 하지요. 과거를 되돌아보니 내가 좋은 마케터가 되려면 이래야 하겠구나 몇 가지 생각이 정리가 되더군요. 여러분도 마케터로 사는 어제와 오늘을 한 번 되짚어보고, 좋은 마케터로 성장하기 위한 단초를 스스로에게서 발견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원문: 한나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