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데믹이라니. 제가 살면서 이런 정도의 역병(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을 겪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스나 메르스도 상당했지만 코로나는 정말 엄청나네요. 길에서 보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거리가 이렇게 한산해지다니 놀랍습니다. 어서 진정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길 기원합니다.
취미가 국난극복이라는 우리 민족답게 우리나라는 코로나 대응 모범국가로서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있다고 하니 기분 좋은 일입니다. 코로나 극복을 위해 일상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재택근무의 활성화입니다. 회사 임직원들이 집단 감염되면 큰일이니 대기업부터 앞다투어 재택근무가 시작되었죠.
사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입장에서 재택근무는 기대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정보를 워낙 민감하게 다루는 데다 보수적인 회사이니 설마 재택근무를 할까 싶었는데… 코로나의 위력 덕분일까요.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회사를 비롯한 1 금융권은 거의 모두 망분리를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망과 사내망을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것이죠. 여기에 최근의 추세는 VDI(Virtual Desktop Infra, 가상 데스크톱)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회사의 물리적인 PC 속에는 아무 정보도 저장되지 않습니다. 어느 PC에서건, 제 VDI에 접속하면 제 바탕화면과 파일들이 나타납니다.
본디 정보보호를 위해 개발되어 온 시스템이 막상 재택근무를 시작하게 되자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더군요. 재택근무를 하기 위해서 다른 회사들이 메신저나 메일 시스템을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할 때, VDI를 쓰는 회사는 그냥 접속만 하면 업무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암튼 이러저러해서 시작하게 된 재택근무는 제게는 매트릭스의 빨간약이었습니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업무효율 상승을 경험했거든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이런 거지?! 하는 마음에 제가 저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오늘 글은 어찌 보면 재택근무 체험기가 되겠네요.
1. 출퇴근 시간
서울 중심가의 회사까지 저도 편도 50분 정도 소요됩니다.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서 나가려면 늦어도 7시에는 일어나야 9시 전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재택근무를 하니까 아침에 두 시간이 생겨버렸습니다.
파자마 차림으로 세수만 하고 노트북 앞에 앉으면 되니 이 시간 절약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삶의 질이 달라졌습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18시 이후 얻게 되는 1시간도 엄청나죠. 사실 18시 땡 하고 바로 퇴근하는 것도 아닌 우리들 직장인이니 이 차이는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하루 2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신가요? 2020년 총 공휴일 수는 115일입니다. 우리가 회사 나가야 하는 날이 250일입니다. (365-115=250) 2시간씩이면 올해만 500시간입니다. ‘자는 시간 없는 20일간의 휴가’라고 하면 좀 더 체감이 되실까요?
재택근무의 효용은 다른 것 다 제외하고 여기서 결정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습니다. 부동산 강의하는 분들이 매번 ‘직주근접’을 강조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루 2시간 세이브 만으로도 저는 재택근무의 가치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2. 복장의 해방
보수적인 금융권이기에 금요일만 자율복장이고 그 외에는 정장 또는 세미 정장을 입어야 합니다. 정장에 브리프케이스 들고 스타벅스를 한 손에 든 체 멋지게 출근하는 회사원. (따위는 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반바지에 슬리퍼가 가장 업무효율이 좋… ) 불행히도 회사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죠. 규정을 열심히 지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택근무를 하게 되니 복장 스트레스도 없어집니다. 화상회의가 잦은 것도 아니라서 상반신만 셔츠를 입고 있다든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자보다 복장에 더 예민한 여성분들은 만족도가 더 크겠지요.
지식근로자일수록 복장은 생산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라는 것을 크게 느낍니다. 더불어, 내가 입는 옷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3. 안 해도 될 커뮤니케이션의 해방
무언가 검색해보려고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다가, 1면의 자극적인 뉴스 기사에 홀려서 클릭 → 다른 기사 클릭 → 이리저리 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 내가 뭐 하려고 했지?’라고 자문한 경험. 다들 있지 않으세요? 아니면 독서실에 공부하러 가서 집중하려 할 때 옆자리 친구가 음료수 사줄게 나오라고 한 경험도 다들 있으실 겁니다.
사무실에 모여 있으면 회의하기 쉬워지고 업무 커뮤니케이션이 빠른 장점이 있지만, 별로 안 하고 싶은 업무 외적인 커뮤니케이션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생깁니다. 흡연자라면 더하죠. 동료들과 담배 타임 하려고 나가고, 엘리베이터 기다리고, 다시 들어오고 하는 시간들. 하루 중 꽤 될 겁니다. 출퇴근 500시간처럼 이 시간들을 연단 위로 생각해보면 작지 않죠.
이런 부분에서 재택근무는 오히려 생산성을 확 끌어올려 줍니다. 친구 없는 독서실, 가십 없는 포털사이트 느낌이랄까요.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제 직장생활 경험상 이처럼 전례 없이 강력하게 재택근무 필요성이 대두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요. 코로나는 재택근무 문화 정착에 큰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는 ‘재택근무’가 될 수도 있단 느낌입니다.
다만, 재택근무가 우리 직장에 잘 들어오려면 거대한 벽 몇 가지를 넘어야 합니다. ‘재택근무라니, 우리 회사는 안될 거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아마 아래 벽들을 넘지 못해서 일거 같은데요.
1. 병력이 곧 권력
현대전은 철저히 무기 성능으로 좌우됩니다. 사병 100만 명보다 탄도미사일이나 전투기 수십대가 훨씬 무섭죠. 따라서 군대도 병사를 운영할 돈으로 최신 무기를 사는 편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병력 규모는 좀처럼 줄지 않죠.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다들 끄덕이실 이야기입니다. 본인 휘하의 병력 규모가 장군들의 힘이거든요. 전투기 1대보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게 보기도 좋고 말이죠.
이는 회사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앞서 말한 생산성 향상 효과에도 불구하고, “관리자인 내가 출근했는데 감히 자리가 텅텅 비어있다고?!” 분노하실 관리자들이 많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실제로 윗분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게 편하죠. 모르는 것, 시킬 것이 있을 때 바로바로 불러서 지시할 수 있으니 편합니다. 사내 메신저를 치거나 전화하는 것보다 이게 수월하죠. 그리고 관리자는 재택근무를 하지 않는 회사도 많은 터라 직원들의 재택근무가 더 맘에 안 들 겁니다. 이게 첫 번째 벽입니다.
2. 정교한 성과관리 시스템의 부재
회사는 성과를 내러 오는 곳입니다. 유명 스타트업들이 자유로운 기업문화를 자랑하지만 이면에는 철저한 성과에 대한 평가가 있죠. 넷플릭스 같은 곳이 유명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성과를 보기 시작하면 재택근무라고 농땡이를 피울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웬만한 대기업들도 이걸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성과관리가 안되니 출퇴근 시간이라던가 자리 이석 여부 등 근무태도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보고서 정리를 끝내는 직원과, 정시 출근해서 네이버 부동산을 탐독하다 퇴근하는 직원. 어느 쪽이 회사에 더 도움이 될까요. 파자마 직원은 건물 관리비까지 절감해 주었네요! 하지만 정시 출근하는 직원을 더 성실하게 생각하는 회사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과관리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인사/평가 시스템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 터라 거대한 벽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라고 봐야죠. 어려운 일입니다.
3. 관리자의 역량 차
2번과 패키지 항목입니다. 2번이 회사 시스템의 문제라면 3번은 사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옆에 붙잡아 두고 일을 시키는 것과, 원격으로 업무를 지시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말과 손짓이 아니라 메신저/전화/메일로 지시를 해야 합니다. 말은 대충 해도 됩니다만 글자로 변환되는 순간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인지 아닌지 바로 차이가 생깁니다.
팀의 목표가 무엇인지, 개별적인 업무현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일정과 인력 투입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숙지하고, 지시해야 하는데 이를 원격으로 하는 것도 관리자의 능력이 되는 것이죠. 재택근무 상황에서도 효율적으로 팀원들의 성과를 끌어내는 것은 많은 부분 관리자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4. 개근상으로 대변되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
어릴 때 저는 개근상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정시에 학교를 안 가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학교 외에는 세상이 없는 줄 알았죠.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녀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학교, 고등학교도 개근상을 계속 받았던 걸 보면 시키는 대로 충실히 하는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학교 좀 빼먹는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 같은 봄날이면 학교 안 가고 경치 좋은 벤치에서 책이나 보다가 집에 가는 여유를 좀 부렸다면 좋았을 텐데요. 저는 그러면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늘 그렇게 배웠거든요. 12년이 넘도록.
지시받은 정해진 길만 가고, 다른 옵션을 새롭게 검토하는 능력이 확연히 떨어져 버린 게 우리 모습 아닐까요? 저는 공교육 + 군대를 겪으며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는 고스란히 회사에서도 나타납니다.
회사에서 시킨 것, 윗사람이 시킨 것 외에는 정답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근태가 나쁘면 안 좋게 보게 되는 데는 이런 경험이 영향을 미칩니다. 재택근무에 대한 독으로 작용합니다.
재택근무, 거대한 시험대에 놓인 회사
사실 재택근무를 하느냐 마느냐의 논쟁은 굉장히 자그마한 이야기입니다. 이 아래에는 우리 생산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투입시간을 성과로 인정해주는 현재의 우리 근무형태가 적합하냐는 것입니다.
재택근무를 해본 적이 없는 많은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해 보고 있고, 해 보니 생각보다 회사가 잘 굴러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가 빨간약을 먹게 된 시점인 거죠.
기업은 사무실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을 고민할 것이고, 개개인의 생산성을 관리 감독할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개인은 사무실을 벗어난 자유로움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치(성과)를 더 증명해야 하는 위기감을 동시에 가지게 될 것이고요.
2010년경, 통신사에서 신사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스마트워킹이 한창 화두였을 때 여러 가지 솔루션을 접하며 생각했습니다.
회사 밖에서 근무하는 날이 올까?
그때부터 여기까지 오는데 10년 걸렸네요. 설마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성큼 다가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빨간약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회사생활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