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보면 사람들은 여러 설명을 만듭니다. 만들 때만 해도 그것들이 아마도 그럴 수 있다거나 여러 설명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단 어떤 설명에 납득하면 더 이상의 설명을 찾지 않거나, 심지어 누군가가 다른 설명을 해줘도 그걸 고려해보지도 않습니다.
이번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대응을 설명하는 것에서도 우리는 같은 일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왜 다른 나라와 다른가’라는 질문의 답을 알고 싶어 합니다. 대만이나 태국, 홍콩, 중국도 그래프만 보면 잘하는 것 같지만 여러 이유로 참고할 대상이 되지 못하기에, 한국은 거의 유일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왜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아주 많은 외신기자는 한국이 메르스 사태를 미리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 한국의 누군가가 말해줬겠죠. 또 다른 설명은 한국의 의료상황이 외국과 다르다는 겁니다. 한국의 인구당 병실 수는 외국보다 몇 배나 큰 정도이기 때문에 소위 의료대란을 겪지 않을 수 있어서 치명률이 낮다는 겁니다. 한국 정부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트럼프를 욕하는 미국 언론이 그렇죠.
한국이 IT 강국이라서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고, 한국이 서구보다 프라이버시를 무시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국이 작은 나라라서 가능했다고 말하는 중국인들도 있고, 사실 한국이 잘하는 것이 없다고 아예 무시하는 일본 같은 나라도 있습니다. 물론 제일 안전한 답은 이 모든 것이 답이며, 이 조합이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저 답을 모르겠다는 말을 멋지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멋은 있지만 하나만을 말하면서 그게 답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다지 뛰어날 게 없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지지자로서 저는 문재인 정부의 유능함이 이 사태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냉정히 판단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태 초기에 신천지교회 중심으로 대구 경북에서 무섭게 환자 수가 늘어날 때 이러다가 방역 포기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저도 했습니다. 제아무리 정부의 유능을 크게 잡는다고 해도,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 자체의 역량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애초에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입니다. 즉 자발적인 시민 참여가 이 나라를 발전시킨다는 이념으로 만들어진 정부라는 뜻입니다. 시민의 역량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도움을 주는 것이 이번 정권이 가지는 기본 이념이라면 이념입니다. 그래서 정보를 공개하면 혼란이 오고 테스트를 많이 하면 의료대란이 올 거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대신, 사실을 파악하고 그걸 알리는 데 가장 중점을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첫 번째 키는 빠르고 투명한 정보 공개였습니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었죠. 능력도 없으면서 남을 믿을 수는 없으니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정보를 차단하고 심지어 왜곡하는 것부터 생각합니다. 외국이 그렇듯 사람들 못 움직이게 강압하고 정보 공개는 늦고, 테스트를 아예 안 하기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방송에서 테스트 왜 하냐고, 테스트하면 해롭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교육하기도 하더군요.
한국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겠지만 여기 문제가 있고, 정보가 있다고 알리는 태도를 취합니다. 문제를 전부 정부가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수수방관인 것도 아닙니다.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그걸 합치자는 겁니다. 드라이브 스루나 워크 스루 같은 방식을 정부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니죠. 자원봉사자들을 정부가 다 끌어모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신속히 실행하고 홍보하고 격려했던 건 사실입니다.
한 사회에 위기가 닥칠 때 그 사회의 역량을 모으는 방법에는 전체주의적인 방법과 민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전체주의적인 방법은 중앙에 독재 권력을 주고 총동원령을 내린 후 정보를 독점하라고 말합니다. 전쟁이 났을 때 그러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방식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문제는 이 방식이 실패하면 정말 처참하게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정보나 자원을 중앙이 독점해 버리니까 사회적 역량을 중앙에서 잘못 배분해 버리면 문제는 어마어마하게 커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명박, 박근혜 시절의 한국이나 경상북도, 대구시의 운영에서 봤고 지금도 봅니다. 중앙이라고 주장하면서 권력은 독차지하고 싶은데 정작 반응은 느립니다. 게다가 그 발상이 자꾸 나보다 더 큰 조직에 기대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대구에 난리가 났는데 정부가 어떻게 해달라고만, 적극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는 대신에 두루뭉술하게 도와달라고만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긴급재난자금을 보내도 한가하게 지금은 선거 준비로 바쁘니 몇 주 후에 처리하겠다고 하고, 일선 의료진에게 피로나 쌓이게 만들고, 심지어 나중에는 이 긴급한 시기에 피곤하다며 병원에 가서 누워버립니다. 메르스 때의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 잘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잃는 것은 이래서 그렇습니다. 똑같은 공무원과 똑같은 시민이라도 박근혜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을 테니까요. 세월호 때처럼 말입니다. 가만히 있어라, 우리가 하겠다면서 정보는 차단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죠.
민주적인 방식은 훨씬 더 어려운 것이지만 성공만 한다면 훨씬 더 뛰어납니다. 일단 모든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우리 스스로라는 주인의식을 가지는 데서 시작합니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가 아니라 이러면 안 될까, 저러면 안 될까 사람들 하나하나가 궁리하게 만드는 데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빠르고 투명한 정보공개와 신뢰입니다.
그게 되니까 민주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역량을 결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죠. 시민들은 신천지 상황에서도 검찰이나 경찰을 비판도 하고 촉구도 했지만 뒤에 물러나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다 자기가 아는 정보를 짜내서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고 했죠. 그리고 현장에서 필요한 것이 뭔지 언론이 알려주기만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SNS로 직접 알아보고 알리는 일을 했죠. 그러면서 기업과 시민과 의료계와 정부가 답을 맞춰 나간 겁니다.
위기는 누가 친구이고 누가 악당인지 알려줍니다. 이번 위기에서 두드러진 것은 대구 경북의 시장과 도지사였고, 검찰이었으며 언론이었죠. 물론 부정적인 방식으로 두드려졌습니다. 이들은 민주적인 방식이 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힘을 모아야 할 지자체장은 실종 상태거나 정부 도움만 요청하면서 느릿느릿했고, 그 때문에 신천지 교도가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죠.
당연히 신천지 신도 명단을 구하는 일이 급했는데 검찰은 갑자기 매우 민주적인 검찰처럼 행동하면서 비실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국내 언론도 이번 위기에서 별로 역할을 못 했습니다. 대구 현지의 사정을 BBC를 보고 아는 일이 일어나서 국민 정론지는 BBC나 뉴욕타임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국내 언론은 그저 국민 분열과 부질없는 비판만 해댈 뿐이었습니다. 이만희에게 질문을 던져도 처음 던진 질문이 정말 영원히 사냐는 거였으니까요.
한국의 코로나19 대처가 외국과 다른 이유에는 분명 여러 요소가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바로 민주적인 역량 결집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없는 능력도 짜내게 만들었고, 있는 능력들이 결합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한국의 민주적인 역량 결집의 능력이 외국보다 뛰어나다는 표현은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한국은 다른 선진국보다 더 민주적일 것도 없습니다. 민주정치의 역사가 긴 유럽이나 미국보다 한국이 못하다는 것이 제대로 된 평가겠죠.
다만 한국은 지금 경제 선진국인 동시에, 그 민주화를 이뤄낸 세대가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 다릅니다. 이 지구상에 이런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은 아직 혁신을 이뤄낸 세대가 사회의 몸통을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어떤 나라는 그들을 위대한 나라로 만든 세대가 이미 무덤에 있습니다. 그들은 혁신을 행한 지 너무 오래되었고, 다만 있는 제도에 적응해 버렸죠. 또 어떤 나라는 혁신을 해본 적이 없으니 민주적 역량결집이 불가능합니다.
일전에 ‘왜 요즘 소위 한류라는 한국문화의 인기가 강해지는가’도 바로 이것으로 설명했습니다. 한국은 혁신의 능력을 잃지 않은 유일한 경제 정치 선진국입니다. 그래서 민주적 역량결집이 가능한 겁니다. 1987년 혁명이나 촛불혁명의 세대가 아직 젊습니다. 그것이 문화물의 매력으로도 작동합니다. 말하고 싶은 메시지가 가슴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보수적이 되어서 100년 전의 영광만 떠드는 다른 선진국과는 다르고, 민주국가가 되지 못한 중국과도 다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입니다만, 다른 곳에서 듣기 힘든 설명이며 많은 사람이 인정하기를 꺼리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일단 한국에서도 언론들과 보수권은 이걸 부정하죠. 그들은 한국은 뭐가 다르냐는 외신기자의 질문에 다르게 답합니다. 세계 또한 차차 한국을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이렇게까지 원천적인 곳에서부터 인정할 용기를 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고작해서 메르스 때 교훈을 얻었다, 한국 사람은 빨리빨리 병이 있어서 그렇다,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다 하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한국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탄생 후, 아니 촛불혁명이 시작된 이후, 그 상처와 부끄러움이 싹 치료되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 몇 년 만에 세상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나 싶습니다. 요즘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쳐서 한국인들이 오만해질까 걱정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많은 사람이 변화를 느끼면서도 세상이 정말 정확히 어떻게 변했고 뭐가 그 핵심인지는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저와는 다른 곳에서 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충분한 것처럼 그 답을 반복합니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