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영역이 ‘부채’의 영역이다. 어쩌면 금융독해 능력을 볼 때 가장 중점적으로 봐야 하는 영역이 부채에 대한 이해가 아닌가 한다.
부채에는 선과 악이 없다. 그저 효율성을 담보하는 부채가 있고, 그렇지 못한 부채가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그런 부채가 어떻게 늘어나고 줄어드는지에 따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모든 것이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GDP 대비 부채율이 100%다, 200%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즉각적으로 ‘아이고 빚이 그렇게 많아서 어쩐대’하는 생각부터 한다. 근본적으로 부채 규모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일부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레버리지 즉 지렛대라는 좋은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항상 ‘레버리지가 높아서 걱정이다’라는 식으로 나쁜 의미만 있다고 간주한다. 부채는 욕심 혹은 부주의, 무절제의 동의어로 인식한다. 정부나 기업이나 가계부채를 이야기할 때 항상 그 ‘위험성’이 강조돼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신용과 부채는 돈보다도 훨씬 중요한 자본주의 사회의 피와 혈관이다. 신용으로 만들어내는 부채는 매일매일 곳곳에서 새로이 생겨난다. 예컨대 시장에서 3일 후에 20만 원을 갚기로 외상을 약속했다고 해보자. 그런 구두의 약속을 하는 순간 사회 전체의 부채 규모는 20만 원만큼 늘어난다. 여러분은 방금 신용 혹은 부채를 발생시킨 것이다.
국가 전체에 도는 대부분의 돈은 실제론 이런 식으로 신용이나 부채가 생산되는 형태다. 실제 현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이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무절제한 신용카드 부채 등 소비 중심의 부채는 생각보다 적다. 소득보다 소비액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대출하는 경우가 상환 가능성이 낮아질 문제가 있는 부채인데, 모든 부채가 이런 부채는 아니다.
부채는 구체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쓰인다. 여러분이 어느 무인도에 불시착했다고 해보자. 물을 구하는 것도 반나절이 걸리고, 그러다 보니 먹을 것을 구할 시간도 없고 집을 지을 시간도 도구를 만들 시간도 없다. 이게 여러분이 가진 자원이라고 해보자. 이때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10일 치 물과 밥을 빌려줄까? 그 대신에 다음에 자리가 잡히면 제사상을 차려서 모두 갚아야 한다.
신용 혹은 부채를 일으킬 기회가 열린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이 제안을 받겠는가, 아니면 ‘나는 재정 건전성을 믿는 사람이라 내가 가진 자원만 가지고 잘살아 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빚을 내면 큰일 난다고 했거든요’라고 답할 것인가.
물론 이렇게 얻은 물과 밥으로 10일과 탱자탱자 놀면, 즉 소비하는 데만 쓴다면 아마 산신령이 마귀로 변해 빚을 돌려받으러 나타날 것이다. 그 사이에 구조선이 도착한다면야 상관없겠지만 말이다. 이런 것은 나쁜 빚이다. 우리가 늘 목격하고 두려워하는, 하지만 실제 세상의 빚 중에는 극히 일부분인 빚이다.
이상적인 상황은, 물과 밥을 토대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도구들을 만드는 것이다. 비를 피하고 불을 지킬 수 있는 집을 빨리 만들고, 물고기를 잡을 작살과, 물을 퍼오거나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장치들을 빨리 확보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10일 후에 훨씬 많은 물과 밥을 얻어서 빨리 제사상을 차리고도 남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신령도 여러분도 모두 윈윈이 된다.
국가가 화폐 그 이상의 신용을 사회에 주입하고자 은행들에게 대출을 시켜주는 이유도 똑같다. 국가가 가진 자산이 100이더라도, 100 정도의 추가 신용을 만들면 산신령의 물과 밥처럼 기업들이 더 적극적으로 공장을 짓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스스로 목돈을 다 모으고 오로지 이익으로만 투자하는 상황보다 몇 배 빠른 경제성장을 줄 수 있다.
만약 그런 신용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업가의 수는 몇백분의 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력이 있어도 자본금을 전부 모으지 못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돈만 모아야 한다. 기업이 욕망에 빠져 과도한 부채를 사용한다는 관점은 일차원적이다. 모든 기업은 생산성에 자신이 있을 때, 즉 그 부채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때 적극적으로 타인의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그런 구조가 있기에 부자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부채들이 어느 순간 생산성에 기여하지 않는 수준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기업인들이 안일하게 부채를 얻기 시작하고, 그 부채가 공장을 짓는 데 쓰이지 않고 특정 자산을 사서 가격을 올리는 데 집중되곤 한다. 더욱이 그 자산들이 가격이 계속 오른다면, 어쩐지 좋은 담보처럼 보이기 시작해 부채가 더 늘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은행 입장에선 매번 그 담보 가치와 기업들의 생산성을 정확하게 분석하긴 힘들다. 그럴 때 장기 부채 사이클의 위기가 오곤 한다.
부채들이 알고 보니 회수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신용의 규모가 줄어든다. 손실로 줄어들었든 은행들의 조심성이 대출을 막게 되었든, 사회에 넘쳐나던 신용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생산성에 투입되는 자원도 확 줄어든다. 사회에 기회가 줄어들고, 이에 따라 기업들도 어려움이 가중된다. 이런 사이클이 돌고 도는 것이 자본주의가 아닐까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이 그런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이 돈과 신용을 이토록 뿌려두려고 하는 중이다.
문제는 우리가 개인으로서 신용이나 부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이다. 답은 단순하다. 개인 소비에 사용하는 것은 생산성이 낮으니 쓰지 말자. 우리의 미래 노동을 싼값에 팔아버리는 행위이다. 무언가의 가격 상승을 기대하고 돈을 빌려 쓴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생산성에 기여하는 행위는 아니고 실제 생산성 자체는 매우 낮을 수 있다. 그러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투자에는 적극적으로 부채를 써도 좋다.
긍정적 관점을 가지자. 오히려 부채라는 자원을 고려해 자신의 실력이나 포부도 양껏 키워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부자, 모든 개인사업자와 모든 투자자는 모종의 신용의 혜택을 받는다. 우리가 투자하는 절대다수의 회사들도 부채를 통해 더 높은 수익을 만들어간다. 타인의 자원을 빌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자원을 아주 협소하게 정의하는 셈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꿈도 열정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신용을 키우고, 부채의 작동 원리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두면, 쓸데없는 빚을 쓸데없는 순간에 지게 될 가능성도 줄게 될 것이고, 결정적인 기회를 결정적인 순간에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원문: 불릴레오 천영록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