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소아암 치료를 받으면서 의료 공공성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남들에 비해 많았다. 아이가 장애를 갖게 되고 내가 일하는 회사인 옥션 장애용품 코너인 ‘케어플러스’를 열면서 한국 장애용품 시장이 좁고 용품이 수입 위주라는 점도 알게 됐다.
미국에서 코로나 대비 의료용품이 부족한 상황에 대해 많은 미국 언론이 보도 중이다. 강대국 미국에서 마스크가 없어 의사가 죽는다는 상황이 의아하면서도, 그동안 내가 고민했던 내용과 일맥상통할 듯하여 읽어보았다.
1. 진단시약 부족
트럼프 대통령은 요즘 코로나 브리핑에서 “왜 아직도 한국처럼 코로나 검사를 바로 못 받는 거냐”는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이젠 한국보다 우리가 이젠 검사 더 잘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현실은 여전히 WHO가 코로나 억제를 위한 가장 첫 번째 요건으로 든 “Test, test, test”가 안되고 있다. 진단시약이 턱없이 부족해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에서 먼저 터지고 전세계 공급망이 마비되면서 진단시약이 원활하게 수급되고 있지 못하다. 진단에 필요한 장비 대부분도 미국 내가 아닌 중국 등 타 국가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미국은 몇 주가 지나더라도 한국만큼 검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검사를 못하면 지역감염은 더 심각해질 것이며, 그러면 경제활동을 더 오래 틀어막을 수밖에 없다.
2. 마스크
미국은 20여 년 전부터 인건비 싼 중국에서 마스크를 대부분 생산하여 수입해오는 구조다. 평시라면 수급상황이 원활할 텐데, 판데믹에서는 안 먹힌다.
중국(그리고 한국) 등의 마스크 생산국에서 자국 수요를 우선해서 수출을 막고 있다. 자연스럽게 미국 내의 마스크 부족 현상이 심화됐다. 미국 기업 3M의 월 최대 생산량이 3500만 개인데, 뉴욕 병원 한 군데에서 쓰는 마스크 수량만 2백만 개니까.
3. 병상
병상 부족 또한 수십 년 전의 정책 결정이 오늘날 판데믹에 영향을 주는 상황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메디케어(65세 이상 노인을 위한 공공보험)와 메디케이드(65세 미만 저소득층/장애인을 위한 공공보험)를 도입한 후, 병상이 남아돌면 그대로 공공 의료재정에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74년에 병상을 일정 정도 이상 늘리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법이 통과되어 병상수 증가가 억제됐다. 1974년 이후 병상 수는 50만 개 줄어들었고, 이는 지금처럼 여유분 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4. 인공호흡기
현재 미국에서 가장 절실하지만 가장 구하기 어렵고 해결책도 어려운 장비다.
원래 인공호흡기는 1만 달러 가량의 비싼 장비로 운영 인력도 많이 필요하다. 사실 미국 연방정부도 나름 가격을 낮추고 생산량을 늘리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2012년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로젝트 아우라’를 추진하기도 했다. 저렴한 인공호흡기를 4만 개까지 생산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인공호흡기만 전문으로 만드는 뉴포트 메디컬 인스트루먼트라는 중소기업이 참여했다. 그래서 단가를 3천 달러까지 낮춘 저렴하고 이동도 가능한 인공호흡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 회사가 코비디언이라는 대형 의료기기 회사에 인수된 이후다. 코비디언은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지원금을 더 달라’, ‘더 비싸게 팔게 해 달라’라는 식으로 지연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정부는 나름 이 프로젝트를 되살리려고 노력했으나, 코비디언 입장에서는 영 수지타산이 안 맞았던 셈이다(<The Hill>에서 뉴욕타임즈의 기고문을 인용해 말하길, 코비디언이 자신들이 이미 생산하고 있던 값비싼 인공호흡기를 계속 공급하고자 시간을 끌었다고 분석했다). 이후 코비디언은 전 세계 의료기기 시장이 대기업 위주로 재편될 때 메드트로닉이라는 기업에 인수됐다.
2020년 3월 31일 현재, 미국 전체에 수급 가능한 신규 인공호흡기는 16,000개에 불과하다. 그런데 뉴욕 앤드류 쿠오모 지사가 뉴욕에만 3만 개의 인공호흡기가 필요하다고 3월에 연방정부에 촉구했을 정도로, 저 수량은 심각하게 부족하다.
뉴욕뿐만이 아니다. 50개 주 전체가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연방정부의 배분 절차는 불투명하고 비밀에 부쳐져 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 주에 보낸 인공호흡기는 고장이 나 있었다고 한다(그런데 이걸 실리콘밸리에 보내서 싹 고쳤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각 주에서 알아서 사서 써라”라는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감염병 전문가인 미네소타 대학 마이클 오스터홈 박사는 “Wrong”이라고 말했다. 주 정부의 대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방정부가 전시물자법을 가동해서 GM 등의 기업에서 생산하겠다고는 하지만, 생산 라인을 바꾸고 부품을 조달하는 데만도 최소한 몇 달이 걸린다는 게 문제다. 인공호흡기는 부품만 수천 개에 달하고 섬세한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론
1. 이 모든 난리가 지나고 나면, 내년 미국 의료보험은 최대 40%까지 보험료가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민영 의료보험이 의료의 중심축을 이루는 미국에서 임시직이나 비정규직은 의료절벽 상황으로 더욱 몰릴 것이다. 이는 이후 판데믹이 한 번 더 유행할 때 취약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의료양극화는 더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2. 시장경제·신자유주의는 최대한 잉여 생산을 줄여서 효율성을 높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적 전염병 확산 상황에서는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데’ 기여한다. 의료물자와 정책을 영리화하고 비용 효율적으로 접근하면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시장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는 식은 먹히지 않는다.
3. 미국 인공호흡기 사례를 보면서, 문득 1년 전 어느 회의 자리에선가 장애용품 개발기업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저렴한 신제품을 개발했더니 기존 업체들이 시장 교란한다며 난리를 치더라.
뉴욕타임즈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군수 시설은 전쟁이 없어도 유지하는데, 의료 시설은 왜 수요가 없으면 줄이는가?” 코로나 확산으로 영리·민간 위주인 미국 의료시스템의 취약점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지금 비교적 코로나 사태를 잘 틀어막고 있는 한국 역시 의료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영리병원 확대? 무조건 효율을 추구하는 게 옳은가?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공공병원 폐쇄를 하는 게 옳은가? 효율과 공공의 효율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우리 국민들은 이렇게 ‘유사시 의료 가용 리소스’를 위해 의료보험비가 확대되거나 세금이 인상되는 것까지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원문: 홍윤희의 페이스북
참고
- The New York Times, 「It’s Too Late to Avoid Disaster, but There Are Still Things We Can Do」
- The New York Times, 「The U.S. Tried to Build a New Fleet of Ventilators. The Mission Failed.」
- The Hill, 「Saagar Enjeti: Corporate Dems, Republicans doomed thousands to death」
- The New York Times, The Daily Podcasts 「Why the U.S. Is Running Out of Medical Suppl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