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25일은 고 김귀정 학생의 기일었다. 아마 너도 그 이름을 아득한 아픔으로 기억하리라 보네. 1991년 5월 25일. 그 해 봄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잔인한 해 중의 하나였을 거야. 강경대부터 김귀정까지 산지사방에서 사람들이 경찰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고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길바닥에서 숨막혀 죽어갔으니까. 김귀정은 그 잔인한 봄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대학생이 죽었다!”
복학한 뒤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아 이 근처에서 김귀정이 죽었을 텐데 하고 기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1991년 5월 25일 5시경 퇴계로에서 누군가의 날카로운 목청으로 ‘동’이 떴다. 인도에서 신호만 기다리던 학생들은 일제히 뛰어나왔고 퇴계로 3가에서 극동빌딩, 대한극장 앞까지를 가득 메우고 시위를 벌였지. 극동빌딩 앞에만 배치돼 있던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던 도중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걸 간파한 경찰이 퇴계로 4가와 스카라 극장 쪽에 병력을 투입했고 그들은 3면에서 치고 들어간다. 당시 기록으로 10분 동안 천여 발의 지랄탄과 최루탄을 쏴 댔다고 하니 경찰이 어느 정도 독이 올랐는지를 알 수 있어.
지금도 퇴계로 대로변의 골목길들은 좁고 옹색하거니와 당시에도 3면으로 포위된 1만여 명의 시위대들을 품기에는 역부족이었어. 학생들은 아우성을 치며 골목으로 스며들었지만 경찰은 그 위로 최루탄을 쏟아부었고 골목길에 주차된 차량들과 짐더미들 속에서 학생들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넘어지기 일쑤였지. 당시 공개된 사진을 보면 백골단들이 쓰러져 있는 학생들의 등어리를 밟으며 걷는 장면이 나온다. 이른바 ‘토끼몰이’의 완벽한 시전이었지.
경찰에 둘러싸여 있던 한 여대생의 귀에 “대학생이 죽었다!”는 외침이 들린다. 웅성거리는 사이에 경찰의 포위가 풀렸고 그 틈 사이로 다른 남학생 하나가 길바닥에 쓰러진 한 여학생의 모습을 발견해. 성균관대 불문과 88학번 김귀정이었지. 나랑 동기지만 나이는 한참 많은 66년 말띠.
원래 그녀는 외국어대 86학번이었어. 어머니가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던 상황에서 그녀의 대학 생활도 순탄할 수가 없었다고 하네. “공부하기 대학에 들어왔는데 대학을 다니기 위해 공부를 제쳐 두고 일을 하러 다닌다.” 고 일기에 쓸만큼.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취직을 해야 했고 하지만 또 공부는 놓지 않다가 88년 다시 성균관대 불문과에 입학했다고 하네. 내가 그녀를 만나고 몇 번 술자리를 가지기라도 했다면 동기랍시고 말을 놨을까?
그녀는 한때 운동권이 돼 버린 친구를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고 해. 사실 내 기억 속에도 데모하는 자체가 사치로 보인다고 중얼거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너희들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얘기하지만 나는 내가 먹고 살아야 한다고. 김귀정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다시 들어온 대학에서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던 친구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감정에 어쩔 줄 모르는 학생이 돼 가고 있었지.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91년이면 그녀가 4학년 때다. 아마 생각이 많았겠지. 그녀가 어느 조직에 속해 있었고 뭘 지상과제로 삼았든간에 4학년이란 학생과 사회 사이의 개찰구 같은 지점이었고 그녀가 죽던 날도 노점상을 하고 있던 어머니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장차 뭘 하고 먹고 살 건지에 대한 불안감도 홍수처럼 밀려 들었겠지. 아니라면 거짓말이고. 그녀가 동아리 일기장에 쓴 글을 보면 불안과 다짐 사이에서 왔다 갔다하면서도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려 애쓰는 한 청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난 무엇이 될까?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난 나의 미래가 불안하고 자신도 확신도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나이 서른에 우린>을 많이 불렀잖니.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지 않을까. 아마 김귀정도 딱 그 노래를 부르며 휘청이다가 슬몃 머리를 흔들다가 어금니 앙다물고 내일의 가투를 준비했을 거야. 그리고 거리에 나가서 그녀는 죽었다. 사진으로 봤던 단아한 얼굴과 빛나는 눈동자를 그 친구들은 다시 보지 못했지.
그녀에게는 애인이 있었다고 기억되는 게…… 성균관대에서 나온 추모시 가운데 그런 게 있었거든. “아무개야 이 군바리야 니 애인 죽었다…….” 아마도 군대에 있었던 모양이지. 그는 군복을 입은 채 통곡조차 못하고 얼마나 몸을 비틀었을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당시 너와 나를 포함한 많은 청춘들이 한 번씩은 했을 다짐이야. 새삼 “우리는 뭐하고 있나?” 따위의 얘기 하려는 게 아니야. 그럴 자격도 의사도 능력도 없다. 그리고 설사 자격과 의사와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비록 그 다짐이 처참하게 배신당하고 더럽게 나뒹굴고 냉소 속에 얼어붙었다 하더라도 다짐의 기억은 그를 공유한 사람들의 마음에 흉터로는 남아 있겠지. 그 흉터를 영광의 상처로 드러내는 사람과 행여 보일까 살색 페인트로 칠해 버린 사람과 가끔 목욕탕에서 들여다보며 슬그머니 손바닥으로 가리는 사람들 모두에게.
김귀정의 최소한을 기억하며
23년 전 그녀도 불안했다. 10년 뒤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어. 미래는 모호했고 자신감은 줄어들었고 확신은 미약해지고 있었지. 자신감은 제로에 확신은 마이너스가 된 우리가 우리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그때 김귀정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다짐을 했다고 봐. 최소한 남 밟지는 않고 살겠다….. 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만 살지는 않겠다. 저 메모의 앞에는 “끊임없이 역사와 함께 하는” 운운 운동권 사투리도 등장하긴 하지만 본원적인 다짐은 그녀의 최소한의 다짐이었다고 생각해.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차피 비루하게든 힘겹게든 지루하게든 살아가겠지만 네 말대로 “곤경에 빠진 사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어떻게든 서로 도우며 살아가라.”고 아이들에게 얘기하고 “너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좋은 건 결코 아니다.”라고 설득하고 우리 역시 누군가 길바닥에 별안간 넘어지면 좀 옷에 흙 좀 묻더라도 부축해 주고 약속 시간 좀 늦더라도 119라도 불러 주고 119가 오면 자초지종 설명해 주는 성의를 가지는 것.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사실에 최소한 분노는 해 주고 “세상이 다 그런 거지”에 완전히 함몰되지는 않는 것. 그건 우리의 최소한이 아닐까 해. 최대한은 최소한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김귀정의 최소한을 기억하며.
Isabel Marant Sneakerfor babies and C9 for kids at Targ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