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당 위기는 ①중장기-구조적 요인과 ②단기적-주체적 요인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 중에서 ②에 해당하는 것은 ‘연동형 비례제’와 ‘비례 위성정당’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정의당 위기의 진짜 근원은 ①중장기적-구조적 요인 때문이다. 이 부분은 더 넓게 보면 조직노동과 연계한, 세계 사민주의 정치가 처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2.
한국에서 진보정당이란 NL/PD가 주도했지만, 사실 조직노동과의 연대를 핵심으로 한다. (여기에서 NL은 민족해방파, PD는 민중민주파를 의미한다)
조직노동 및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타도를 추구하던 ‘혁명적 레닌주의’ 노선을 걸었던 PD파가 ‘사민주의 복지국가’ 노선을 수용하게 된 접점의 역할을 했다. 2004년 원내 진입한 민주노동당이 정치적 성공을 이룰 수 없었던 이유로, 정책은 사민주의 흉내를 내고 있지만 행위자-주체는 자본주의 타도를 추구하는 혁명적 공산주의 마인드를 갖고 있는 NL/PD파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3.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는 사민당-노동당-사회당류와 조직노동의 ‘끈적끈적한 연대’는 실제 정치적으로도 성공했다. 그 결과물이 복지국가였다. 복지국가는 결과이고, 실제로 투입된 것은 사민주의적 노선에 입각한, 사민주의적 정치 실천이었다.
그럼, 사민주의적 정치 실천은 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조직노동과의 긴밀한 연대를 핵심으로 하는 사민주의적 정치 실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조직노동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미조직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민중들의 이해관계와도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3개의 정치주체-유권자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 조직노동
- 노동자 계급 전체
- 노동자가 아닌 민중들
이들 세 집단은 사민주의 전성기 때에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다가 자본주의적 환경변화로 인해 이해관계가 불일치하게 됐다.
4.
조직노동과의 연대가 나머지 유권자 집단의 지지도 이끌어냈던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경제적 문제’가 핵심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1970년대는 인플레이션이 일상적이었다. 산업 경쟁력-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임금 안정이 중요했다. 임금 안정은 (자영업자를 포함) 경제주체 전체에게 외부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임금 안정의 중요성은 조직노동과 유대관계가 강한 사회당-사민당류가 집권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집권한 사민당-사회당-노동당은 조직노동에게 임금 안정을 요구했다. 요구의 구체적 내용은 생산성 상승 이내에서 임금 인상을 해달라는 것이다. 이를 생산성 연동 임금제라고 표현한다. 조직 노동은 노동당-사민당 정부에게 요구했다.
내가 과도한 임금인상을 자제하면, 너네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이때 국가는 (기업 분야, 임금인상 자제의 대가로) 사회임금을 준다고 약속했다. 여기서 사회임금의 다른 표현은 ‘복지 확대’다. 그리고 사민당류의 정부는 그에 필요한 재원-세금을 총 자본에게 요구했다.
이는 총 자본 입장에서도 수용할만한 내용이었다. 과도한 임금인상은 당장 기업의 경쟁력에 타격을 받게 되지만, 기업의 세금과 사회보험료는 경기 상황 및 지불능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게 사회민주주의적 계급 타협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동시에 사민주의적 복지동맹=다수파 정치연합의 작동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5.
여기서 유의할 것은 ‘누가 양보를 하고 누가 혜택을 받았는가’에 관한 부분이다.
임금인상 자제를 양보한 주체는 조직노동이었다. 즉 노동조합 총연맹, 산업별 노조 등이었다. 그런데 ‘사회임금=복지확대’의 혜택을 받은 주체는 조직노동도 포함되지만, 미조직 노동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와 노동자가 아닌, 민중들도 포함됐다.
즉 양보는 ①조직노동이 했는데, 혜택은 ②미조직 노동자 집단과 ③노동자가 아닌, 민중들 모두가 혜택을 봤다. 이 경우 조직노동이 했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역할의 본질은 ‘헌신을 통한 유능함’이었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 조직노동이 파업을 해도 국민들이 동의했던 본질적인 이유는 프랑스 국민들, 독일 국민들의 국민성 자체가 ‘파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노동조합이 헌신을 통해, 국민 전체의 소득 증대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한국의 86세대가 국민적 동의를 얻는 과정과 일치한다. 80년 광주학살 이후 전두환이 집권한 상태에서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게 된 한국의 대학생들은 결단을 해야 했다. 학살자를 몰아내기 위해 구속-고문을 각오하고 투쟁할 것인지, 아니면 학살자가 대통령인 것을 인정하고 그저 입신양명만 신경 써야 하는지.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헌신을 택했다. 구속과 고문을 각오하고 학살자를 몰아내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직업적 활동가'(혹은 직업적 혁명가)가 되는 선택을 했다.
드디어 1987년, 학살자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 에너지로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통한 ‘민주적’ 정권교체의 성공, 2002년 86세대의 열정을 대표하는 노무현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요컨대 유럽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에서 조직노동 헤게모니의 본질은 ‘헌신을 통한 유능함의 입증’이었고, 한국 민주화운동에서<86세대 헤게모니의 본질 역시 ‘헌신을 통한 유능함의 입증’이었다. 유럽에서는 헌신+유능함의 결과물이 복지국가였고, 한국에서는 헌신+유능함의 결과물이 정치 민주화였다.
언제나 헤게모니의 본질은 헌신을 통한 유능함의 입증이다. 여기서 헤게모니란 주도권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데, 동의에 의한 지배=주도권을 의미한다.
6.
문제는 유럽에서도 ① 조직노동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과 ② 미조직 노동을 포함한 노동자 전체, 그리고 ③ 노동자가 아닌 민중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의 불일치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집약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원인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 핵심은 사회경제적 환경의 구조변화다. 세계화로 인한 국제분업구조의 변화, ICT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경제의 서비스화,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로 인한 노동력의 여성화, 고령화로 인한 연금 부담 등이 사회경제적 구조변화의 내용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노동은 중심부 노동시장을 꿰차게 되고, 미조직 노동에 해당하는 청년-여성-노인들은 주변부 노동시장에 위치하게 된다. 게다가 일정한 수준의 복지국가에 이미 도달했기 때문에, 사회임금으로 주고받기를 할 게 많지도 않다. (1950년대~1970년대는 ‘복지국가 초입기’였기 때문에 주고-받기할 여력이 많았다)
김일성이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다고 해서 50년이 지난 이후에도 진보라고 분류할 수는 없는 것처럼, 유럽의 조직노동이 복지국가를 주도했다고 해서 2020년 지금도 ‘진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마크롱의 연금개혁을 반대하는 프랑스 노조를 진보적 행태로 보기 어렵다)
노동조합은 존재 그 자체로 다른 계급-계층의 이익을 증진시켜주는 존재가 아니다. 거꾸로 다른 계급-계층의 이익을 증진시켜 줄 때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사회-정치적 지지여론이 형성되는 것이다.
7.
다시 정의당 문제로 돌아와 보자. 정의당은 왜 비례대표 후보 1번, 2번을 ‘조직7동’을 대표하는 노동자 후보’로 선정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장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 중에는 조직노동을 대표하는 후보가 있었지만, 그 사람들을 앞 순번으로 전략 배치하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
정의당 기호 1번과 2번인 류호정 후보와 장혜영 후보는 득표를 1위~2위 한 게 아니라, 앞 순번으로 전략배정됐기 때문에 앞 순번으로 갈 수 있었다.
8.
‘소선거구제’ 그 자체가 양당제를 강요하는 효과가 있다. 한국에서 진보정당은 후발주자이다. 유럽의 사민당-사회당-노동당류는 자신들이 보통선거권을 쟁취했고, 정당정치를 선도하고 복지국가를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소선거구제 하에서, 후발주자인 한국의 진보정당이 살아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남 진보벨트 전략이었다. 포항-울산-부산-거제-마산-창원으로 이어지는 대기업-제조업-중화학공업 중심의 노동자 밀집지역이다. 다른 하나는 비례대표 전략이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 진입할 때, 국회의원은 모두 10명이었다. 그중에서 권영길(창원), 조승수(울산북구) 2명은 지역구였고, 나머지 8명은 비례대표였다. 비율로 치면 2:8이다. 권영길, 조승수는 어떻게 지역구 후보로 당선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
- 지역주의적 대립구도가 너무 강력해서 영남에서 민주당은 호남당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영남 노동자들도 민주당은 찍지 않았던 이유였다.
- 조직노동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덜 심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2018년 지방선거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민주당은 부산 전역을 기준으로 볼 때 자유한국당보다 많은 구청장을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거에는 후보도 못 내던 울산에서 민주당 후보가 진보정당 계열 후보와 다자 구도하에서 다수가 구청장으로 당선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영남 진보벨트로 불렸던 지역 전부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포항, 울산, 부산, 거제, 마산, 창원에서 예외가 없었다.
9.
지역주의적 대립구도도 붕괴하고, 조직노동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 역시 과거만 못한 상태에서, 게다가 소선거구제는 여전히 강력한 상태에서 진보정당의 독자적 지지기반은 무엇일까?
바로 이 질문이 현재 정의당이 마주하고 있는 <위기의 근원>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정의당의 생존전략은 두 가지가 있다. 둘 다 민주당과의 차별화이다. 민주당은 수권정당을 지향하기에, 두 가지 제약조건이 작동하게 된다.
- 수권정당은 대통령 임기 5년 이내에 할 수 있는 것을 주장해야만 한다. 최저임금 1만 원을 둘러싼 논란 역시 ‘임기 5년 안에’ 하기 어려운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경제성장률이 3%가 안 되는 사회에서, 최저임금을 3년 연속 15%씩 올리면 당연히 ‘경제적 과부하’가 생기기 마련이다)
- 수권정당은 국민 51%가 동의하는 이슈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국민 중에 강한 진보성향을 갖는 사람들은 동의하지만, 아직 51%의 합의가 형성되지 않은 사안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동성애자 이슈, 난민 이슈, 동물권 이슈들이다.
다르게 말하면, 진보정당의 차별화 지점은 수권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즉, 등대 정당 노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 진보정당은 5년 이내에 실현 불가능한 것을 주장할 수 있다. 실은 최저임금 1만 원도 그런 것이고, 정의당이 총선 1호 공약으로 발표한 만 20세 청년에게 3천만 원을 주겠다는 것도 실현 불가능한 공약이다.
- 진보정당은 국민 중에 20~30%가 동의하지만, 51%의 동의는 얻기 어려운 이슈에 집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당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이슈, 난민 이슈, 동물권 이슈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소위 ‘정체성 정치’에 해당한다.
정리해보면, 5년 이내에 실현 불가능하고 국민 중에 20~30%만 강하게 동의하는 이슈에 집중하는 것이 정의당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전략은 유럽 정당으로 치면, 녹색당+해적당+여성당의 짬뽕 정도를 의미하게 된다. ‘사민당-노동당스러운’ 진보정당이 아닌, 고학력-고소득-중산층의 관심사에 어필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한국적 현실을 고려할 때, 진보정당의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진보적 가치와 진보 유권자 사이의 딜레마에 대해 정공법으로 맞서는 전략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연공급 이슈이다. 연공급 폐지 이슈는 조직노동이 강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연공급은 청년들의 취업을 가로막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고, 동시에 생산성과 연동되지 않는 연령기준-높은 임금으로 인해 동료의 해고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장년 노동의 조기퇴직을 촉진하는 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당도 정의당도 조직노동의 눈치를 보며 연공급 이슈를 강하게 제기하지 않는다.
조직노동과 청년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이슈는 ‘국민연금 개혁’ 이슈가 있다. 국민연금은 제도적 속성 자체가 좋은 노동시장과 링크된 제도이기 때문에, 조직노동에게 유리하고 미조직노동, 노동자가 아닌 민중, 소득 하층일수록 제도적 혜택을 받기 어렵다.
그렇기에 국민연금 급여율 상향 정책은 결과적으로 미래세대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워서, 중심부 노동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것에 불과하다.
10.
정의당이 민주당과 차별화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논리적으로 2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5년 안에 실현될 수 없지만+진보성향 20~30%가 강하게 동의하는 이슈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선택의 약점은 고학력-고소득-중산층의 관심사를 대변하는 것이란 점이다. 더 가난한 민중들의 삶은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동성애, 동물권, 이주민, 난민 문제에 집중하는 경우다.
둘째, 51%의 동의는 얻지 못하고 당장 실현되지 않을 수 있지만, 옳은 주장을 하는 경우이다. 이 선택의 약점은 조직노동, 즉 민주노총 및 한국노총과 한판 붙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연공급 폐지, 국민연금 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유권자 재정렬이 불가피해진다. 역사적-이념사적 맥락으로 보면 전통 사민주의 노선의 ‘부분적 폐기’를 내포하고 있다.
다만, 이 선택의 강점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편에 선다는 점이다. 동시에 청년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앞으로 더욱 많아질’ 새로운 유권자층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은 유권자 비중으로 10~20% 비중에 불과하지만, 10년~20년이 지나면 중심 세대가 된다.
연동형 비례제는 조직노동과의 끈적끈적한 연대를 핵심으로 했던 진보정당-정의당이 직면하고 있는 장기적-구조적 위기 원인에 비하면, 오히려 해프닝 수준에 불과할 수 있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