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참 냉엄한 시절이다. 각각 청운의 뜻을 품고 아무것도 없이 이 작은 나라로 건너왔을 사람들. 혹은 새로운 곳에 자리 잡고 싶어 노력하는 이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묘해지면서 도와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2020년 3월 기준 지금 싱가포르에서 이직하거나 구직하는 계획은 ‘악수’라고 말해두고 싶다.
한국인에게 박해지는 싱가포르
몇 년 전,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한국인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호감과 좋은 점수를 따고 시작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국 콘텐츠로 통용되는 소프트파워의 힘인지, 성실하고 센스 있는 한국인 직원들이 본보기를 세워서인지는 모르겠다. F&B, 호텔 산업군에서도 경력 없는 한국인 직원들이 많았다. 급여, 일하는 환경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취업도 생각보다 쉽고.
그러나 예전에는 ‘한국인이어서’ 고용했다면, 이제는 ‘한국인이니까’ 해고하는 사례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무직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고객들과 대면 접촉이 잦은 호텔 프런트 데스크, F&B 웨이터 및 웨이트리스 등은 사정이 다르다. 한 사업장에서 ‘한국인 몇 명만’ 동시에 해고했다고 한다. 싱가포르는 해고가 잦고, 현재 싱가포르 경제도 악화 중인 것은 맞다. 하지만 콕 집어 ‘한국인들’만 레이오프했다? 이는 싱가포르에서 한국인을 바라보는 달라진 눈초리를 의미한다.
저번 주, 나도 이직을 위해 싱가포르로 다시 돌아왔다. 한국인 입국을 금지한 뒤였다. 공항에서 IPA 레터(고용주 측에서 피고용인의 취업을 보증해주는 문서로 입국 시 이민국 카운터에 제출하면 된다)를 냈다. 분명 1년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없는데도 이민국 직원은 15분 동안 나를 세워 두고 취조를 시작했다.
싱가포르에 얼마나 있었어? / 대구나 청도에 있었던 적 있어? / 너 한국엔 언제 방문했어? / 싱가포르엔 몇 년 동안 일했는데? / 한국 주소지 좀 불러줘. 체크해봐야겠어. / 싱가포르 입국 전 체류했던 도시는 어디야? / 싱가포르 입국 전 체류했던 도시에서 정확히 며칠 묵었어?
원하는 대답을 했고, 절차상 입국에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도 그 직원은 날 세워 두고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식은땀이 나고 예전의 불쾌한 악몽이 되살아났다. IPA 레터와 시큐리티 본드를 자세히 살펴본 뒤, 내 여권을 한 장 한 장 훑어가며 한국 체류 기록을 확인하고, 한국 주소지를 검색해 본 후 그녀는 여전히 수상쩍어하며 시간을 끌다 입국을 허가해주긴 했다.
전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고 사실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국민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처사이니 심정적으로 이해는 갔다. 비자가 거의 나온 상황에서도 이랬는데, 관광 비자로 들어오려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가혹할지.
자체적으로 채용 프로세스를 동결하거나 연기하는 기업들
꼭 필요하니까 한국어 가능자 직무 혹은 한국 마켓을 담당하는 롤을 채용하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싱가포르 기업들은 채용 프로세스를 무기한 연기하거나, 대규모 채용 계획이 있던 팀도 계획을 축소해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혹은 FURTHER NOTICE가 상부에서 나오기 전까지 사람을 구하지 않고 기존 인력을 재배치하는 등 벌써 채용 시장은 악화되었다.
심지어 1/31일자로 싱가포르 정부는 중국인의 관광비자 및 취업비자까지 전부 발급을 금지했기 때문에, 중국인 국적자는 취업이 확정되어도 신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겪는다. 또한 이탈리아, 한국, 스페인, 프랑스, 이란에서 ‘비자를’ 취득해 들어온 사람도 강제로 14일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
해외에서 어플라이한 지원자를 채용한 뒤 빠르게 트레이닝을 시켜도 모자랄 판에, 14일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를 쉽게 채용할 너그러운 회사가 많을까. 가뜩이나 외국인 신분으로 취업하기 쉽지 않은데, 악재 끝에 악재가 오다니…….
세계 경제의 침체, 싱가포르 경기의 급속한 둔화
코로나19가 싱가포르를 덮치기 전에도 싱가포르 경제성장률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다. 2020년 1월 초 싱가포르 정부에서 발표하길, 4분기의 싱가포르 경제는 전년 대비 0.8%밖에 성장하지 못했다고. 2018년에는 3.2%의 경제 성장률을 보여주었으나, 2019년에는 그보다 훨씬 못 미친 수치를 보여주었다.
2020년 1분기에는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산 넘어 산이라고……. 1월 말부터 더러운 조짐이 있던 코로나19는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도 한국만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인데, 전 세계적으로 소비 심리가 위축되니 수출이 원활할 수가. 동시에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공장 가동을 멈추니 생산도 없어 전체적인 경기에 빨간불이 켜졌다. 딱히 묘수도 없는 점이 함정.
심지어 MICE 산업, 관광으로도 활력을 얻었는데 이놈의 바이러스 때문에 온갖 이벤트 및 콘퍼런스가 줄줄이 취소되고 일반 관광객의 입국도 금지되었으니 호텔 공실률은 치솟았다. 전체적으로 시시각각 세계 경기가 가라앉는 우울한 시점에서, 작은 기업뿐 아니라 굴지의 대기업들까지도 대규모 채용을 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조금 과장해서 당장 내일 떡락할지 모르는 불황 속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고, 일을 가르치고,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상황이 이러니 이미 싱가포르에서 일하지만 이직 계획이 있던 사람들조차 이직 계획을 미루기 시작했다. 채용 시장이나 경기가 좋아질 조짐이 보이면 그때 커리어를 변경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물론 이토록 버거운 시기는 시간이 지나면 분명 극복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 혹은 유년기에도 이런 판데믹은 몇 번이고 왔었다. 인류가 전염병 종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세계 경기 및 사람들의 일상도 언젠간 좋아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면 좋은 타이밍에, 좋은 회사를 찾아 의미 있는 일을 찾는 것은 지금은 어려울 듯하다. 만약 지금 싱가포르로 건너와서 믿는 구석 없이 구직할 계획이라면…… 일단 넣어두고, 상황이 나아져 있을 반년 후로 일정을 재점검해보는 걸 추천한다. 현지 상황이 안 좋다.
원문: 가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