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12시가 넘어 과거의 오늘을 살펴보다 마침 1년 전 이맘때가 딱 버닝썬 사건이 터졌을 즈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그 이름만 남아 있고, 누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대부분의 머릿속에서는 대략 희미해졌을 그 사건. 아이돌 그룹 출신의 승리라는 연예인이 클럽을 운영하면서 거기에 찾아오는 여성 손님들에게 조직적으로 약물을 먹여 정신을 잃게 만든 뒤 ‘VIP 고객들’에게 ‘제공’했던 사건. 그런 여성들의 나체를 촬영해 동료 연예인들이 속한 단톡방에서 돌려보고 품평을 하며 적극적으로 강간을 조장하고 방조했던 사건. 그럼에도 주동자 대부분이 미약한 처벌을 받거나 혹은 아예 무죄로 풀려났던 사건. 피해자들은 그렇게 많았으나 가해자들은 아무도 남지 않았던 사건. 지금은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 사건.
이 버닝썬 사태에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이 참으로 많았다. 아이돌 출신의 이미지 좋은 연예인들이 실은 남몰래 성범죄를 저지르고 다녔다는 사실을, 클럽에 그렇게나 많은 불법 약물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피해자를 특정할 수조차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불법 촬영물이 ‘단톡방’에서 그토록 활발하게 공유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이 많은 놀라움 중에서도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이 사건을 둘러싼 뭇 남성들의 반응이었다. 버닝썬의 여러 비밀이 공개되었고 그중에는 버닝썬의 술값에 대한 매뉴얼도 있었는데, 적지 않은 수의 남성이 버닝썬이 팔아먹은 술값이 이렇다느니, 이거 사는 놈이었으면 분명 VIP 서비스를 받았을 것이니, 개새끼들 역시 돈 있는 놈들은 이렇게 술값을 쓰고 다닌다며 분노했다. 역시 저런 건 다 돈 있는 1%의 놈들이 하는 거라며 화를 냈다.
그들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강간당한 여성, 불법으로 나체가 촬영되어 낯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영상이 공유되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는 없는 돈과 권력이 누군가에게는 있다는 데 분노했다. 자신은 돈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양 그렇게 억울해했다. 그때 버닝썬에 연루된 사람들과 ‘뭇’ 남성들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돈이 있었으면, 그럴 기회가 있었다면, 그들 역시 충분히 정신을 잃은 여성을 강간하고, 촬영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N번방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인 ‘박사방’ 조 씨가 구속되었다. 조 씨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지에 관심을 받고자 노출 수위가 높은 사진을 올린 여성들의 신상정보를 해킹한 뒤 말을 듣지 않으면 신상을 죄다 공개해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해 성적으로 착취하고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해온 남성이다. 텔레그램에는 N번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자가 운영하던 ‘박사방’ 외에도 수많은 방이 존재하는데, 여기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26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26만 명. 종일 이 숫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자그만치 26만 명. 중소도시 하나의 인구에 해당하는 인원의 남성들이 70만 원에서 150만 원에 이르는 ‘입장료’를 내고, 미성년자를 비롯한 여성이 강간당하는 모습을, 고문당하는 현장을, 학대당하는 장면을 지켜본 것이다. 과연 이것을 ‘일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가. 전국에 존재하는 신천지 신도가 25만 명이라 해 놀란 이들이 그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일부’ 남성의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26만 명은 결코 ‘일부’가 아니다. 또한 이것은 평소 수없이 공유되던 ‘후방주의’의 사진들과, 연예인 ‘은꼴사’(은근하게 꼴리는 사진)와, 평범한 남성들이 아주 쉽게 주고받는 ‘좋은 데 갈까’의 농담과 아주 상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여성을 물건 취급하는 것, 당신의 욕망을 해소하는 쓰고 버리는 두루마리 휴지쯤으로 취급하는 것, 그저 찰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카메라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이 사건과 아주 무관할 수 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가서 버닝썬과, 양진호와, 미국에서 수배령이 날아온 아동 포르노 유통범과, 같은 반 남고생 거의 전부와 성관계를 해야 했던 ‘쿨한’ 여중생과, 빨간 마후라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거리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고, 아니 사실은 아주 가깝다고 생각한다.
원문: 한승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