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isclaimer
한국에서는 한 회사만 8년 정도를 다녔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한국에서의 이직 경험이 없어서 이곳과 한국을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곳에서 3년간 일한 회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다시 옮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어떤 회사는 초반의 전화 인터뷰에서 고배를 마셨고, 어떤 회사는 최종 합격을 했는데도 오퍼를 받지 못해서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 이 모든 시행착오가 차곡차곡 쌓여서 나중에는 원하던 복수의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을 정도로 나름 능숙한 인터뷰어가 되긴 했다. 사실 ‘능숙해졌다’라기보다는 ‘인터뷰가 지겨워서 긴장도 덜 하고 차분해졌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하지만 다시 이직 시장에 뛰어들라고 하면? 여전히 긴장할 것 같다.
나는 디자인 쪽에서 근무하고 있다. 흔히 실리콘밸리라고 부르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굉장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곳의 구직, 이직 프로세스가 완벽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앞선 기술과 서비스로 미래를 선도하려는 많은 기업들이 있는 까닭에, 구직·이직 프로세스 또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다듬어졌다고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형태에 가깝지 않을까?
이 글에는 이미 다른 많은 글들(내가 예전에 썼던 글 포함)에서 볼 수 있는 인터뷰 프로세스나 인터뷰 시의 팁 같은 내용을 담진 않는다. 그보다는 일반적 관점에서 이직을 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들, 인터뷰에 익숙해지기까지 겪었던 어려움의 단계들을 나눠본다.
인터뷰 후 받아든 좋지 않은 결과를 본인의 부족함이나 실수로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쓰고 있다. 분명 많은 것들은 노력이 해결해 준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몇몇 요소들은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한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2. 실력의 문제
가장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실력이다. 여기서 ‘실력’이라고 하지 않고 ‘실력의 문제’라고 한 건, 실제 실력의 좋고 나쁨의 문제라기보다는 채용하는 곳에서 원하는 실력의 범위와 종류, 능숙도와 내가 가진 그것과의 매칭(matching)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묘한 차이일 수도 있지만, 가령 어떤 부분에 있어서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채용하는 회사에서 그 분야를 주요 기술이나 필수 경력으로 치지 않는다면 의미가 적다는 말이다.
내가 인터뷰를 보러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타인을 인터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인터뷰 전 이력서도 꼼꼼히 읽고 지원자의 프로젝트를 상세히 살펴본 뒤 질문할 것을 미리 생각해 가면 좋겠지만, 나도 실무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이라 미리미리 스펙과 실력을 알아보고 들어가는 일은 미안하게도 거의 없다. ‘x월 x일 x시에 xx회의실로 들어가세요’라는 인터뷰 통보 이메일을 받아 늦지 않게 가기만 해도 다행인 경우가 많다. 물론 리크루터들은 나 같은 면접관에게 미리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보내주지만, 미리 검토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이 몇 주, 혹은 몇 개월을 투자해서 준비하는 포트폴리오가 중요하지 않은 건가?
역설적이게도, 포트폴리오를 눈여겨 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대해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상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를 되짚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A. 느긋하지만 확실한 한방
연애에 비유해서 생각해 보자. 연애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전부터 상대방에게 본인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면 십중팔구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포트폴리오도 마찬가지다. 모든 내용을 다 드러내기보다는, 본인 작업 내용의 큰 줄기만 하이라이트로 굵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디테일을 어필할 만한 시기는 연애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온다.
B. Not your skill, but your story
본인의 실력을 드러내는 비주얼만 기계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본인만의 이야기나 생각을 담는 편이 효과적이다. 여기서 ‘효과적’이라는 말은 면접관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는 말도 되고, 본인이 프레젠테이션 때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진정성 있는 이야기는 디자인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억지로 말도 안 되는 독특한 이야기를 끌어다 붙이지는 말자. 평소에 생각하는 가치관, 추구하는 디자인 방향, 인생의 모토, 커리어 방향성 등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면 본인만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포트폴리오를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평소에도 진정성 있게 고민해보면 좋을 듯하다.
C. 언어의 문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쌓았고, 그것을 보여주는 포트폴리오도 어느 정도 완성되었는데 계속 좋지 않은 결과를 손에 쥐게 된다면, 1차적으로 언어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UX 디자이너의 업무 특성상 다른 실무자 및 이해 관계자들과의 회의가 자주 있는 편인데, 언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떨어지게 된다.
예전 디자이너 직무는 언어가 좀 부족해도 디자인만 잘해도 인정해줬지만(이 경우에도 많은 회의들은 시니어 선임이나 매니저들이 커버했을 것이다), 요즘은 팀의 막내 디자이너들도 회의를 직접 뛰어다니는 경우가 많으므로 기본적인 언어의 장벽은 뛰어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또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언어의 ‘기본적 수준’은 직급이 높을수록 까다로워진다.
예전에 어떤 언어학자가 언어를 배운다는 것에 대해 한 말이 있다.
Learning a foreign language is not about studying, it’s about familiarizing.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영어를 대하는 자세를 바꿔 주었다.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서 단어를 외우고 기사를 읽는 것보다, 출퇴근 시간에 관심 있는 분야의 영어 팟캐스트를 듣는 게 도움이 되었다. 여전히 영어에 대한 부담감도 느끼고 스트레스도 있지만, 분명한 건 1~2년 전보다 훨씬 성장했다는 것이다. 내년 이맘때에는 올해보다도 능숙해지는 것이 목표다. 디자이너든 엔지니어든, 언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에.
3. 이해의 문제
또 다른 문제는 프로세스의 이해에 관한 것이다. 가장 극복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나처럼 한국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인터뷰 준비에 관한 팁이나 프로세스에 대한 설명은 이미 인터넷에 꽤 있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 또한 채용 프로세스가 낯설었기 때문에 앞으로 겪을 사람들에게 경험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프로세스를 이해하지 못해서 인터뷰를 제대로 준비 못 하는 경우는 막아야 하니까.
이보다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문화에 대한 이해다. 사람들은 문화 차이라는 것을 ‘한국은 집에 신발 벗고 들어가고, 미국은 신발 신고 들어간다’ 정도로 생각하는데, 문화 차이는 생각보다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대화 대상, 주제, 방법, 타이밍 등등 일상 구석구석에 널려있다.
가령 링크드인을 예로 들어보자. 이제는 한국에서도 제법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곳처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여기서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관심사가 비슷하거나 배우고 싶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리낌 없이 1촌을 맺어 대화를 이어나간다. 내가 이직하고 싶은 회사, 팀에 재직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연락해서 그 회사나 팀이 하는 일을 알아볼 수도 있다. 반대로 회사의 리크루터나 매니저라면 필요한 사람을 채용할 때 먼저 연락을 주기도 한다.
한국이라면 ‘이거 학연·지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공채라는 제도가 없다. 그래서 회사 입장에서는 원하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타겟팅하여 알아보는 것이다. 반대로 구직자 입장에서도 본인과 가장 잘 맞는 복수의 회사들을 타겟팅한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고 대화를 이어 나간다는 것.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잘 못 하는 부분이다. 게다가 영어로 해야 한다. 하지만 남들은 자연스럽게 취하는 과정이다. 이를 모르고 지나친다면 많은 기회를 날려버리게 될 것이다.
4. 운의 문제
필자가 상단의 Disclaimer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최종 인터뷰까지 합격한 후 TC(Total Compensation) offer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복수로 진행되던 후보자와 먼저 계약이 체결되었다며 프로세스가 종료된 적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최종 인터뷰 초대까지 받고 날짜를 조정하던 중 해당 회사가 IPO(Initial Public Offering: 기업공개. 기업 설립 후 처음으로 외부 투자자에게 주식을 공개하고 판매하기 시작하는 것) 진행을 하면서 모든 채용 절차가 멈춰버린 적도 있었다.
결국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고 해도, 타이밍과 운이 나쁘면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러니 인터뷰 과정에 실패하더라도 너무 자책하지는 말길.
원문: SEH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