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옛 글자를 모방해 만들었다.” 세종실록은 훈민정음 창제를 다루면서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고 썼습니다. 이 표현을 가지고 ‘한글은 수입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습니다. 한글은 다른 곳에서 쓰던 문자 또는 예전에 쓰던 문자를 새롭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목화씨=문익점, 한글=혜초?
대표적인 게 ‘구자라트 문자’ 유입설. 구자라트 문자는 마하트마 간디가 태어난 인도 구자라트 주(州)에서 쓰는 문자입니다. 글자 생김새만 보면 얼핏 한글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역만리 구자라트에서 쓰던 글자가 어떻게 한반도까지 넘어왔다는 것일까요? 혹자들은 신라시대 스님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근거를 찾습니다. 혜초가 인도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구자라트 문자를 신라에 가지고 왔다는 주장이죠.
하지만 혜초는 인도 여행 이후에도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혜초가 입적한 곳은 중국 오대산에 있는 건원보리사입니다. 게다가 왕오천축국전을 둔황(敦煌)에서 발견한 건 1908년입니다. 처음 이 여행기를 발견했을 때는 혜초가 신라 사람인 줄도 몰랐습니다. 혜초가 구자라트 문자를 가지고 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보다 시대를 앞선 주장도 있습니다. 가야국 김수로왕비 허 황후가 인도에서 들여왔다는 주장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허 황후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죠. 그런데 허 황후 시대까지 거슬러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한글과 구자라트 문자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건 알파벳 E가 한글 ㅌ과 비슷하다고 두 문자 사이에 유사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인도 네루대 한국어학과 라베 교수는 “생김새가 비슷한 글자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발음과 표기법이 전혀 다르다. ‘ㄹ’ 말고는 같은 기능을 하는 모양도 없다”며 “한글은 홀소리와 닿소리가 모여 글자를 이루는 체계지만 구자라트 문자는 이런 면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일본인들은 왜 가나를 만들었을까?
일본 아히류(阿比留) 문자에서 한글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히류 문자는 신이 살던 시대에 쓰던 문자라고 해서 신대(神代) 문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아히류 문자 역시 생김새가 한글하고 비슷합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고대 일본에서는 아히류 문자를 썼지만 369년 왕인이 백제에서 일본에 한자를 전하면서 이 문자가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9세기 이전에 신대문자로 쓴 것으로 보인다는 비석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19세기 히라다 아츠다네(平田篤胤)가 일본에 퍼져 있는 문자를 수집해 ‘신자일문전(神字日文傳)’에 싣기 전까지 아히류 문자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또 과학이 발달하면서 9세기에 썼다는 비석이 19세기 중반에 쓴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죠.
양심적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히류 문자가 한국의 한글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한글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아무 데도 없다”는 의견이 대세입니다. 일본 ‘국어학 사전’에도 “아히류 문자는 한글의 모양을 변형한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원로 국어학자인 남사 이근수 박사는 “현재 일본에서 쓰는 가나보다 아히류 문자가 훨씬 진화된 형태”라며 “정말 아히류 문자가 존재했다면 가나를 만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일축합니다.
이런 데 못 빠지는 환단고기
아히류 문자가 중요한 건 ‘환단고기’에 그거를 둔 가림토(또는 가림다) 문자 기원설을 폐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주장은 가림토 문자가 일본으로 건너 가 아히류 문자가 되고, 아히류 문자가 다시 한글이 됐다는 주장이니까요.
그밖에도 한글의 뿌리를 두고 수많은 이론이 있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이스라엘에 이르는 지역에서 쓰는 문자는 모두 기원설에 포함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심지어 창틀에 비친 달빛을 보고 만들었다는 ‘창호상형 기원설’도 있었습니다.
해례본의 등장
이런 의혹을 한 번에 풀어준 책이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이 책에는 한글 기본 글꼴이 발음 기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뜨고, 설음 ㄴ은 혀(끝)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떴다”는 식입니다.
여기에 서양보다 수백 년 앞서 완성한 음운론과 천지인 철학을 바탕으로 글자 조합을 완성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습니다. “ㅋ은 ㄱ에 비해 더 세게 소리나는 까닭으로 획을 더하였다.”, “초성은 일어나 움직이는 뜻이 있으니 이는 하늘이 하는 일이며, 종성은 멎어 정하게 하는 뜻이 있으니, 이는 땅이 하는 일이다. 중성은 초성의 생김을 이어 종성의 이룸에 잇대주니 사람이 하는 일이다.”
전 세계에 글자 시스템을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록한 책은 이 해례본 하나뿐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이 계속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세종실록에 나온 옛 글자는 무엇을 뜻할까요? 평생을 한글 연구에 바친 눈뫼 허웅 선생은 생전에 “자방고전은 훈민정음이 바로 고전 글자에서 왔다는 것이 아니라 꼴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본뜬 모양새가 옛 글자와 비슷하게 되었다고 해야 한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한글을 만들고 보니 한자 5대 서체 중 하나인 전서(篆書)와 비슷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어떤 글자가 한글하고 생김새가 비슷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학, 철학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과학적 문자는 세상에 한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계 4대 문명이 우리 겨레에서 시작했다는 사이비 역사 책 주장보다 앞으로 한글로 만들어갈 문명사를 더욱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원문 : kini’n cre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