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 〈살인의 추억〉(2003), 〈아무도 모른다〉(2004), 〈누구나 아는 비밀〉(2018)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름을 고백하는 영화들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은 영화의 마지막에 에바와 대면해 이렇게 말합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 한편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형사는 영화의 마지막에 유력한 용의자 앞에서 좌절하며 말합니다. “모르겠다.”
케빈은 엄마의 사랑을 위해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냉혹한 인물입니다. 그랬던 그가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마음은 기계가 아닙니다. 동전 넣으면 물건 나오는 오락기가 아니죠. 케빈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박두만 형사도 그렇습니다. 그는 사건의 종결을 위해 수사 조작도 주저하지 않는 비열한 인물입니다. 그랬던 그가 진심으로 범인을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역시나 사람의 마음은 기계가 아닙니다. 그의 무당 눈깔로도 범인을 알아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인간의 마음을 상상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이에요. 타인에게 가장 가까워지고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모름을 고백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영화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눠봅시다. 해답을 제시하는 영화와 모름을 고백하는 영화. 저는 두 종류의 영화를 모두 좋아하는 편이지만 특히 더 좋아하는 쪽은 후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보통 그런 영화들이 기억에 더 오래 남기 때문입니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만약 당신이 관객에게 해답을 준다면 당신의 영화는 극장에서 간단하게 끝이 나버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질문을 제기한다면 당신의 영화는 끝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사실 당신의 영화는 관객 각자의 내면에서 지속될 것이다.
멋진 말이죠. 그는 질문하는 영화가 관객의 내면에서 지속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을 제목으로 말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 이 영화는 1988년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합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집을 나가고, 버려진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다 끝내 비극을 맞이했던 실제 사건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고레에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각색하면서 ‘아무도 모른다’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영어 제목은 ‘Nobody knows’입니다.
이 영화의 아이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도 이 아이들이 실제 겪었을 상황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엄마를 기다렸을지, 장남인 아키라가 또래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밥을 먹으면서 어떤 고민을 했을지 알지 못합니다.
나중엔 전기와 가스가 끊깁니다.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로 가득한 거실에 옹기종기 누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영화의 후반부에 공항 근처에서 마침내 끔찍한 일을 벌이는 아키라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인터넷에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검색하면 온갖 정보가 쏟아집니다. 몇 월 며칠 장남이 어쨌다. 며칠 차남이 어쨌다. 막내가 어쨌고 그래서 장남이 어쨌다. 그러나 이런 정보들은 사건을 글자로 재구성한 것일 뿐입니다. 그들이 했던 행동들을 사후에 글로 옮겨 놓은 것일 뿐이에요. 정작 중요한 것은 정보나 글자가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겪었을 자세한 사정과 내밀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상상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제목은 그래서 붙게 되었습니다. 모르기에 고레에다 감독은 상상합니다. 상상하기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비참한 상황 속에 버려져 있던 아이들의 마음을 영화로나마 생각해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무도 모른다〉가 주는 감동의 많은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비밀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언제나 질문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모름을 고백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어요. 이번에 국내 개봉한 감독의 신작 또한 모름을 고백하는 영화입니다. 재밌는 건, 〈아무도 모른다〉와 정반대의 제목이라는 것이죠. 〈누구나 아는 비밀(2018)〉. 줄거리를 빠르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딸이 납치됩니다. 딸의 엄마인 라우라와 그 친지 가족들은 패닉이 되어 딸을 찾아 나섭니다. 이때 가족이 아님에도 열심히 딸을 같이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파코. 그와 라우라는 한때 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죠.
여기까지는 특별한 점이 없는데, 영화가 흐르면서 아주 특별한 두 가지 과거가 밝혀집니다. 하나는 오래전 라우라가 파코에게 시세보다 낮은 값으로 많은 땅을 팔았으며 파코는 이 땅을 포도농장으로 잘 성장시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납치된 딸이 라우라와 남편 사이의 자식이 아니라 사실 라우라와 파코 사이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과거가 왜 중요한가. 라우라와 그의 가족이 파코에게 돈을 요구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중요한 건 납치된 딸을 되찾을 수 있는 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라우라의 가족들은 파코에게 그 돈을 요구합니다. 예전에 싸게 샀던 땅에 대해 보상하라는 겁니다. 라우라도 파코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사실 납치된 딸이 파코의 딸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죠. 결국 파코는 땅을 팔아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딸을 되찾는 데 성공합니다.
놀라운 건, 딸을 납치한 사람은 라우라의 친가족 중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범인은 라우라와 파코의 관계를 의심했습니다. 그 둘은 오래전부터 연인이었고, 라우라의 딸은 어쩐지 어렸을 적 파코와 무척 닮아있습니다. 혹시 라우라의 딸은 파코의 자식이 아닐까. 만약 맞다면 파코가 땅을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 땅은 라우라에게 싸게 샀던 땅이기도 하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범인은 무자비하게도 자신의 조카를 납치합니다.
자, 이제 영화 제목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누구나 아는 비밀. 영어 제목은 ‘Everybody knows’. 누구나 압니다. 무엇을? 라우라의 딸이 파코의 자식이라는 비밀을. 딸을 구하기 위해선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파코의 땅을 팔아야 했고, 땅을 팔면 사실은 딸이 파코의 자식이라는 비밀이 만천하에 밝혀집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누구나 아는 비밀이 되는 것이죠.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런데 허무하지 않습니까. 사실 라우라와 그의 남편을 제외하곤 출생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사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었어요. 그런데 의심이 싹틉니다. ‘파코의 자식일지도 몰라.’ 의심은 범죄로 이어집니다. 범죄는 비밀을 폭로합니다. 라우라의 남편, 알레한드로는 파코가 땅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모두가 알게 되겠군(Now, everybody knows).
‘이제’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은, 그전까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랐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영화의 제목인 ‘누구나 아는 비밀’은 실제로 ‘누구나 아는 비밀’이 아닙니다. 숨겨진 말을 풀면 영화의 정확한 제목은 ‘누구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도 정확히 몰랐던 비밀’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는 비밀〉과 〈아무도 모른다〉는 정반대의 제목, 화법, 스타일임에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과 그들의 사정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정답을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용기 내 모름을 고백하고 다만 질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나는 세상에 해답보다는 질문이 더 필요하다고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몰라도 아는 척해야 살아남는 게 세상이죠. 끝까지 우기는 사람이 이기는 게 세상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질문은 어리석음이나 모자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자람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질문의 힘은 시작됩니다.
나는 사실 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알아가고 싶다.
모름을 고백하는 모든 영화가 저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와 같은 영화의 진실한 태도 때문입니다.
원문: Discus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