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10살 조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아우 심심해! 이모 심심해요. 할머니 나 심심해요! 엄마 나 심심하다고오!
조카의 ‘심심해요 타령’은 시도 때도 없다. 본인 집에 없는 TV를 보러 외할머니 집인 우리 집에 와서 몇 시간이고 각종 만화 프로그램을 순례를 한 후에도 심심하다고 한다. 가족여행으로 다 함께 캠핑장에 갔을 때도 한참 근처 산을 뛰어다니며 밤을 줍고서도 돌아서면 심심해 죽겠다고 말한다. 우리 집 앞 문방구에 신나게 뽑기를 하고 돌아와서도 금세 심심하다고 아우성을 친다.
조카가 그럴 때마다 뭐가 심심하냐고 머리를 콩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불끈 차오른다. 하지만 과거, 그 나이 때의 나를 생각해 보니 조카가 말하는 심심함이 뭔지 알 것 같아 조용히 꽉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나의 하루가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으로 딱 두 가지로만 구별될 그때는 그 두 개가 아니면 뭘 할지 몰라 심심하다고 느꼈다. 그게 아이들이 ‘심심해요 타령’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조카의 ‘심심해요 타령‘을 듣고 생각해 봤다. 난 마지막으로 심심하다고 느낀 적이 언제였지? 오래 생각해 봤지만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많은 성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생각해 보면 심심할 겨를이 없는 일상이다. 눈을 뜨면 부리나케 준비를 하느라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그래도 출근길에 오른다.
경기도에 살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길다. 오고 가는 내내 음악을 들으며 스마트 폰으로 쌓인 뉴스를 읽거나 최신 이슈 거리 탐방을 한다. 그러다가 마음이 슬쩍 찔리면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겨우 커피 한잔할 시간을 빼면 숨 돌릴 틈 없이 일한다. 사실 그렇게 정신없이 주중을 보내면 주말에는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거나, 내 방식대로 방전된 몸과 마음을 충전한다. 그렇게 심심할 겨를 없이 일주일 이 가고 한 달이, 1년이 훌쩍 지나간다.
사실 몸보다 머릿속이 한층 더 심심할 겨를이 없다. 마스크가 슬슬 떨어져 가는데 마스크 품귀 현상을 뚫고 마스크를 어떻게 사야 하지? 도서관 반납 기일이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열어 보지도 못한 저 책 3권은 언제 다 읽지? 며칠째 냉전 중인 엄마랑은 무슨 계기를 만들어서 화해하지? 제주도 비행기 티켓이 택시 기본요금 수준으로 떨어졌다는데 어떻게 해야 시간을 낼 수 있지? 가고 싶은 공연 티켓팅 날짜가 코앞인데, 피케팅을 뚫고 어떻게 티켓을 잡지?
뭔가를 계속 생각하고 걱정하고 고민한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애쓴다. 그래서 애써서 심심하려고 멀리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일부러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고요를 만끽하기 위해 돈과 시간을 썼다. 물리적으로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구분하지 않으면 내 삶은 늘 뭔가에 아등바등거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늘 쫓기듯 살아온 사람의 뇌는 정적을 정체로 오인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낸다. 내 안의 불안감과 조바심에 들끓다가 결국 몸을 움직여 산책이라도 하거나 커피라도 마시고 온다. 완벽한 심심함을 느낀 적은 성인이 된 후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심심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겹겹이 쌓인 내 안의 불안을 거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심심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심하다는 건 아무 걱정과 고민이 없다는 것. 그 상태가 되는 게 궁극적인 내 삶의 지향점이다.
심심함이 극에 달했던 조카만 했을 때 나는 어땠나 돌이켜 봤다. 앞서 말했듯 내가 해야 하는 건 놀거나 공부하거나 딱 두 가지뿐. 먼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생기지 않은 일은 고민하지도 않았다. 슬프거나 괴로운 기억은 힘껏 울고 밥 먹을 먹거나 하룻밤 자고 나면 잊혔다. 뭐든 오래 끌어안고 끙끙거리지 않았다. 눈이 퉁퉁 붓도록 많이 울고, 작은 눈이 사라질 만큼 많이 웃었다. 감정에 충실했고 생각은 단순했다.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어쩌면 내가 지나온 길이나 내 손 닿는 거리에 분명 해답은 있다. 걱정과 고민 따위 시간에 흘려보내고 스스로에게 심심할 틈을 주자.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