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지나면 친척들 간에 주고받은 술들이 남곤 한다. 소주와 맥주는 게 눈 감추듯 사라지는 데 반해, 와인이나 다른 증류주들은 장롱 위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 어쩌다(라고 쓰고 술이 부족해라고 읽는다) 와인을 따게 될 경우에는 이름과 수확 연도를 따지게 된다. 마치 집안 족보를 달달 외우는 어른처럼 말이다. 이… 이게 말이야 불란서 카베르네 쇼비뇽파 이천십육대손…
이게 다 와인 저장소 ‘셀러(Wine Cellar)’때문이다. 만들고 바로 마셨을 와인을 잘 보관하면 더 맛있어진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부족해 더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만들어버리니. 마치 김치냉장고가 생긴 뒤에 우리 집 김치가 빈티지별로 쌓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아니다).
더 맛있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농사만큼이나 숙성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뭔가 평범하게 생긴 셀러는 심심하잖아. 오늘 마시즘은 이색적인 공간에서 숙성된 와인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런 곳에 누가 와인을 보관할 생각을 하는 거야.
와인계의 언더더씨, 심해와인
2010년, 유럽 발트해에서 잠수부들은 난파선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모든 해적… 아니 잠수부의 꿈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뜯기지 않은 샴페인 163병을 발견한 것이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70년이 넘은 샴페인이었다. 게다가 보통은 맛이 변질될 텐데 심해에서 모나지 않게 숙성된 것도 메리트였다.
난파선 샴페인들이 수천만 원으로 경매에 팔려나가자, 많은 다이버는 와인을 찾아 바닷속을 뒤졌다. 심해에는 와인 맛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적었다. 빛이 닿지 않고, 온도가 서늘하며, 소음과 진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크로아티아의 한 와이너리는 와인을 수심 20M 해저에서 보관하는 심해 와인을 개발하였다.
미스테리움(Mysterium)이라고 불리는 이 녀석은 심해에서 700일 정도 숙성되어 나오게 되는데, 병을 덮은 도자기(암포라)에 조개나 해산물들이 붙어있어 빈티지한 멋을 살렸다(약 280유로라는 게 함정). 뭔가 보물섬을 찾은 느낌이라 마시기도 전에 취할 것 같다.
우주의 기운을 담아서 우주 와인
심해에 이어서 이번에는 우주다. 지난해 룩셈부르크의 스타트업 ‘스페이스 카르고(Space Cargo Unlimited)’는 지구에서 400Km 떨어진 국제우주정거장(ISS)에 프랑스 보르도 와인 12병을 보냈다. 반절은 지구에 남겨두었고. 1년 뒤에 그 맛을 비교해보기로 했다.
이 녀석들은 17.7도의 일정한 온도로 1년 동안 숙성이 될 예정이다. 햇빛을 전혀 받지 않도록 스테인리스에 넣었다. 중력이 거의 없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숙성된 와인은 어떻게 변할까? 2017년에도 스카치위스키를 국제우주정거장에 보내 숙성을 시킨 일이 있다. 약 2년을 숙성시켰는데 5년 숙성한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손상 없이 나이를 빨리 먹일 수 있다면 이거 완전 이득인데?
물론 약간의 외부요인 변화에도 맛이 변하는 와인이 우주에 갔다 와서 맛있어지리란 생각은, 마시즘이 헬스를 다닌다고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는 것만큼이나 희박한 일이다. 하지만 우주에서 익어서 돌아온 와인이라니 맛만 모자라지 않는다면 엄청난 주목을 받을 수 있겠지? 역시 사람도 와인도 유학이 최고였… 죄송합니다.
빛 한 점도 허락하지 않은 어두운 스파클링 와인
와인 애호가들은 와인의 맛과 향의 비밀을 과학에서 찾는 일도 많다. 특히 빛에 노출되었을 때 와인 속 아미노산의 향이 변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일까? 포도 수확부터 와인 양조, 숙성까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환경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 있다. 슬로베니아의 ‘언터치드 바이 라이트(Untouched by Light)’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 와인을 제작하는 데에는 ‘야간 투시경’이 활용된다. 깜깜한 밤에 포도를 수확하고 166년 된 동굴 셀러에서 와인을 만든 뒤에 최대 3년간 숙성 작업을 한다. 또한 동굴을 나가기 전에는 진공 밀봉 팩에 넣어 빛과 공기 접촉을 차단한다. 언뜻 놀라운 ‘컨셉러’로 보일 수 있지만 오랫동안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어 오던 이들의 시도라고 하니, 첫 판매를 하는 2020년의 반응이 기대가 된다.
화약 대신 와인을, 전쟁 벙커 와인
홍콩은 떠오르는 ‘와인의 집결지’라고 한다. 그 장을 열어준 와인셀러는 다름 아닌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벙커에 있었다. 홍콩섬에 위치한 이 벙커는 1941년 일본군과 대치했을 때 사용된 곳이었는데 암석 샘플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다가, 2004년 와인셀러로 변신을 했다.
겉으로만 보면 흉흉할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내부는 넓고 서늘하고, 무엇보다 고급스럽다. ‘크라운 와인 셀러(Crown Wine Cellars)’를 만든 그레고리 뎁(Gregory De‘Eb)은 이곳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모은 와인 셀러와 서재와 레스토랑 등 럭셔리한 실내를 갖췄다.
크라운 와인 셀러는 회원제로 이뤄진다. 800여 명의 회원들이 이곳에서 와인을 시음하고 즐긴다고. 와인셀러계의 롤스로이스란 별명은 역시 아무나 주는 게 아니구나.
땅속에 묻은 김장독 와인, 크베브리
와인의 조상님. 와인의 종주국 조지아(Georgia, 코카콜라 만들어진 곳 아님)는 독특한 방식으로 와인을 숙성한다. 바로 김장독… 아니 크베브리(Qvevri)라고 불리는 커다란 옹기 안에 포도를 으깨어 넣고 발효시키는 것이다. 몇백 리터부터 톤 단위로 큰 것들까지, 거대한 옹기는 땅에 묻혀서 6개월 동안 숙성이 된다고 한다.
크베브리로 와인을 숙성을 하는 방식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고 한다. 2017년에는 8,000년 전의 크베브리가 발굴되었다는데, 뭐랄까. 요즘 와인이 김치냉장고에서 나온 것이라면, 크베브리는 땅속 김장독에서 익은 묵은지라고 할까?
맛있는 와인을 향한 갈증이 인간을 도전하게 한다
만드는 방법부터 마시는 방법까지, 교과서처럼 완성형으로 남아있을 것 같은 와인 하지만 더 좋은 와인에 대한 인간의 갈증은 여러 가지 도전을 불러일으켰다. 와인을 맛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만들어진 곳과 특징 등을 읊는 행위는 이런 와인 생산자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
단순히 와인을 어렵다고 느끼기보다는, 와인에 잠깐 관심을 가짐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오늘 제 와인은 신세계도, 구세계도, 우주도, 심해도 아닌 편의점입니다만. 그래도 맛있지.
원문: 마시즘
참고 문헌
- 「난파선에서 발견된 ’17세기 와인’ 크리스티 경매에 올려져」, 유성호, 소믈리에 타임즈, 2019.5.30
- 「지중해에서 항아리 6000여 점 실린 로마 시대 난파선 발견」, 김은별, 아시아경제, 2019.12.17
- 「약 200년 된 샴페인 2병에 8,500만 원 낙찰」, 박선미, 아시아경제, 2011.6.4
- 「200년 묵은 샴페인 경매 1억 6,000만 원 최고가 예상」, 김덕식, 매일경제, 2011.4.21
- 「해저 20미터에서 숙성된 와인」, KBS, 2019.6.21
- 「크로아티아의 ‘바닷속’ 와인 저장소」, 글로벌 인사이드, MBC, 2017.9.29
- 「우주에서 숙성한 ‘天上의 와인’은 어떤 맛일까」, 김성윤, 조선일보, 2020.1.9
- 「우주에서 숙성한 와인은 어떤 맛일까?」, 이성규, YTN Science, 2019.11.17
- 「A French space startup is launching wine into orbit」, Tim Fernholz, QZ, 2019.11.2
- 「Debuting in 2020: The world’s first sparkling wine made in complete darkness」, Rachel Arthur, Beverage Daily, 2019.8.19
- 「빛이 닿지 않은 스파클링 와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확 및 생산 그리고 숙성까지」, 유성호, 소믈리에 타임즈, 2019.7.25
- 「고대 조지아의 전통 크베브리 와인 양조법」,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팀
- 「8000년 된 항아리서 와인 발견…최초 제조연대 1000년 ↑」, 김일중, 이데일리, 2017.11.14
- 「8톤짜리 대형 와인 숙성통, 빠져서 익사할 만하네」, 변영숙 최은경, 오마이뉴스, 2019.6.30
- 「포도밭 없는 홍콩에 세계 와인은 다 있네」, 김성규, 동아일보, 2011.11.25
- 「In high-rise Hong Kong, fine wines lurk in British war bunker」, Jacques Clement, Business Insider, 2016.5.29
- 「홍콩 와인업계 리더들과의 만남」, 안미영, 와인21, 2017.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