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대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전남대학교 국사교육학과 76학번이었다. 향용 그렇듯이 집안에 데모꾼이 있으면 그 집안 상당히 피곤(?)해진다. 그녀의 오빠들이 그랬고 박기순은 일찌감치 오빠의 지기들이었던 윤한봉이니 김남주니 하는 광주 지역의 운동권 괴수(?)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될성부른 떡잎(?)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8년 6월 학내 시위에 연루되어 무기정학을 당한다. 학교로부터 거부당한 박기순은 또 하나의 학교에 마음을 쏟게 된다. 그것은 야학이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야학을 하다가 광주로 내려와 있던 이들에게서 야학 제안을 받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데는 야학만 한 것이 없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한 번 마음 먹으면 똑소리가 났던 그녀는 자신의 학교 인맥들을 야학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들불야학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이름 가운데 윤상원이 있었다. 후일의 광주항쟁 시민군 대변인. “고등학생은 나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어린 동생들을 내몰고는 총을 들고 도청을 지켰던 청년.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 연인의 죽음
강학(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해서 야학교사를 이리 불렀다)으로서 학강(배우면서 가르친다고 해서 야학 학생을 이리 불렀다)들과 어우러지는 한편, 박기순은 위장취업자가 되어 노동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긴장과 과로의 연속. 하지만 그녀에게는 피붙이만큼이나 소중한 친구들과 동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민족의 새아침이 밝아오는가. 땀과 눈물 삼켜가면서 뛰어가자. 친구, 사랑하는 친구, 들불이 되자.
- 〈들불야학의 노래〉 중
1978년의 크리스마스. 통금이 엄연하던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젊은 청춘이 밤을 하얗게 밝힐 몇 안 되는 날이었고 다음 날도 그녀는 야학에 쓸 땔감을 찾기 위해 강학, 학강들과 함께 거리를 누비다가 겨우 오빠 집을 찾아 몸을 누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고 만 것이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죽음. 동료들은 넋을 잃고 슬퍼했다. 광주의 또순이 박기순의 이름은 이미 광주를 넘어서 있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황석영이 조사를 읽었고 김민기가 노래를 불렀다. 김민기가 택한 노래는 ‘상록수’였다. 아마 2절에서 사람들은 울었을 것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녀가 죽은 지 11개월 뒤 영원할 것 같던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 왔지만 그 봄은 봄이 아니었다. 꽃샘추위의 10배 쯤 되는 동장군이 워커발에 대검 꽂고 그 봄을 덮쳤다. 광주는 그 흉악한 동장군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광주항쟁이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앞서 말한 박기순의 동료, 박기순이 야학으로 끌어들였고 박기순이 죽었을 때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 […]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고 울먹였던 윤상원은 그 항쟁의 한복판에서 장렬하게 산화해 갔다.
영혼결혼식: ‘임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
그리고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역. 박기순과 윤상원의 친지들이 모였다. 그들은 조촐한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자 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한 여자와, 그녀의 죽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결국 그녀의 뜻에 따라 살다가 죽었다 할 한 남자의 영혼결혼식이 열린 것이다.
신부 박기순, 신랑 윤상원. 친지들은 두 불운했지만 빛났던 청춘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날 광주에 있던 황석영의 집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을 소재로 한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를 녹음하고 있었다.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의 둔탁한 레코드 버튼을 연신 누르며 그들은 몇몇 노래를 불렀다. 〈에루아 에루얼싸〉도 있었고 이미 불리던 곡들도 있었지만,
전혀 새로운 노래 하나가 테이프에 실리고 있었다.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몇몇 구절을 따온 가사를 만들고, 1979년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팀으로 출전해 은상을 탔고, 1981년의 험악한 시기에 간 크게도 광주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5.18을 추모하는 노래 〈검은 리본〉을 불렀던 김종률이 작곡한 행진곡이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
노래굿 상에서 이 노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였다고 한다. 청춘의 사랑도 접고 명예 따위 구하지 않고 이름은 가명으로 바꿔 가면서 세상의 그늘을 걷던 사람들, 이 그늘을 없애리라 맹세했던 한 여자와 한 남자. 한다 하는 유지들은 꽁무니를 빼고 시민들도 가슴을 치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그 날, 도청을 지키고 죽어간 사람과 그에게 크나큰 감동과 슬픔을 안겨 주었던 사람.
그래서 원래 가사는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였다. 하지만 가사는 사람들의 입속에서 “앞서서 나가니”로 바뀐다. 그렇게 가사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허문 것이다.
그날 녹음이 끝난 뒤 녹음한 테이프를 가슴에 하나씩 품고, 혹여라도 경찰의 눈에 띄더라도 같이 잡히지 않고 한 명이라도 도망갈 수 있게 저만치 떨어져 걸었던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그 뒤 숨죽여 노래를 따라 부르던 사람들을 통해서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많은 청춘이 윤상원으로, 박기순으로 빙의됐고 그들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펼쳐진 1980년대의 불의 바다의 불방울들이 됐다.
〈아침이슬〉은 해금되던 날 노태우도 김민기를 찾아와 함께 불렀고, 퇴임연설을 마친 가카께서도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시위대를 따라 부르실 수 있는 노래였지만 이 노래만큼은 그들의 영역이 될 수 없고 되지도 않았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노래는 박기순과 윤상원, 진실로 열심히 살고 뜨겁게 죽었던 이들의 영혼이 서린 노래이고 아울러 그 뒤를 따르고자 했던 수천수만 사람의 열정과 한숨이 마디마다 음표마다 밴 노래니까.
1982년 2월 20일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