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에서 2019년 영화관 발권 데이터를 통해 집계한 연간 대한민국 영화 총 관객 수는 2억 2,667만 9,126명이다. 국민 1인당 1년에 약 4.5편의 영화를 보는 셈이다.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등 OTT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즐기는 숨은 영화 인구까지 감안하면 관객 수는 더 늘어난다.
한국 영화의 세계적 위상 역시 남다르다. 미국영화협회(MPAA)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 영화 시장 규모는 세계 5위다. 세계 영화시장 전체 규모 411억 달러 중 16억 달러를 기록했다. 영화 강국 인도와 프랑스, 독일 등에 앞섰다.
하지만 ‘영화의 민족’으로 통하는 대한민국임에도 영화관람을 둘러싼 커다란 장벽이 존재한다. 바로 시각·청각장애인의 영화관람 문제에서다. 이들은 시청각물인 영화를 마음 편히 즐기기 어렵다.
장애인의 영화관람권을 보장하기 위해 한 대학 창업동아리가 나섰다. 청각장애인이 온전하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소셜미션으로 하는 ‘오롯,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하 오롯)의 최인혜 대표(21)가 주인공이다.
“메뉴에 짜장면과 짬뽕은 없는데 짬짜면만 파는 격”
오롯은 10명 내외로 구성된 가톨릭대학교 창업동아리이다. 2017년 5월 인액터스 프로젝트로 출범했다. 인액터스 프로젝트는 사회적 문제를 기업가정신으로 해결하는 프로젝트로, 오롯은 ‘영화를 읽는 사람들’이라는 팀명처럼 영화를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배리어프리 자막’ 제공을 통해서다.
배리어프리(Barrier free)란 장애인이나 고령자도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없애는 일을 일컫는다. 배리어프리 영화는 시각장애인용 음성화면해설과 청각장애인용 한글 자막이 삽입된 영화를 뜻한다. 배리어프리 자막은 청각장애인을 위해 제작된다. 화자의 대사부터 음악이나 효과음, 더 나아가 생활소음까지 모두 구현한 자막을 말한다.
오롯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자막에 주목했다. 특히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영화 서비스’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졌다. 최인혜 대표는 “청각장애인도 청력 손실 정도에 따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시각장애인용 음성화면해설이 영화관람을 방해한다”며 “이를 분리하는 솔루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오롯의 활동배경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짜장면과 짬뽕을 따로 팔지도 않고, 짬짜면만 파는 격”이라는 비유를 곁들였다. 장애인별로 각기 다른 솔루션이 필요한데, 장애인이라는 항목 하에 하나로 묶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보건복지부 장애인현황 조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등록장애인 258만 5,876명 중 청각장애인은 34만 2582명이다. 전체 등록장애인 대비 약 13.2%에 달한다. 10명 중 1명을 위한 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실정이다.
비장애인에게는 당연하지만, 장애인은 누리지 못하는 영화
최 대표는 청각장애인 작가가 그린 웹툰 ‘나는 귀머거리다’를 보며 문제의식을 느꼈다. 청각장애인들이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한국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려고 영화 장면과 대본을 모조리 외워서 봤다는 에피소드에서 그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의 오롯 활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오롯은 지금까지 약 50편의 배리어프리 자막을 만들었다. 자막 제작은 3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영화 사운드를 듣고 문자로 구현하는 작업인 ‘타이핑’, 화면에 맞춰 자막 표출 시점을 조정하는 ‘싱크 조정’, 그리고 마지막 ‘검수’ 순이다. 오롯의 경우 배리어프리 자막 완성까지 영화 한 편당 평균 30시간이 소요된다고 전했다.
가장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영화 장르는 단연 액션영화다. 격투 신이나 전투 신은 특성상 격렬한 움직임을 통해 다채로운 사운드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하나하나 다 문자로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러닝 타임 5분당 자막 제작에 1시간가량 소요되지만, ‘5분 혈투’의 경우는 수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최 대표는 “대체로 드라마 장르 영화보다 액션 장르 영화가 자막 작업에 1.5–2배 정도 더 많은 시간이 투입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저작권 문제 때문에 상영까지 이르지 못한 영화가 많다고 한다. 최 대표는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영화사·배급사 측에 연락을 드려도 봤지만 답변이 오지 않거나, 영화 내용 유출 가능성 때문에 허락해 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곤 했다”며 아쉬운 감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웃으며 “앞으로도 계속 끊임없이 영화사 측에 연락을 드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VOD·OTT 시장 진출도 노린다. 영화사 입장에선 비용 문제로 배리어프리 영화를 상영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는 데다 관객 수에 예민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VOD는 비용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시간 및 공간 제약이 덜하다는 데서 착안했다.
오롯은 자막이 입혀진 ‘배리어프리 버전’이 VOD 출시되는 방식과 기존 영상에 배리어프리 자막이 옵션으로 제공되는 방식까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검토 중이다. 무엇보다 VOD 서비스 배리어프리 자막 제공이 청각장애인에게 더 친화적이라는 것이 최 대표의 판단이다.
오롯은 직접 제작한 배리어프리 자막 온라인 무료 배포를 준비 중이다. 최 대표는 “자막은 영화에 당연히 포함돼야 하는 서비스이기에 무료로 배포할 생각”이라며 “배포된 자막은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플랫폼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최 대표는 인터뷰 중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관 태부족 문제도 거론했다. ‘한국농아인협회 가치봄’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3대 멀티플렉스의 배리어프리 영화 연간 상영 횟수는 각각 CGV 약 500회, 롯데시네마 100여 회, 메가박스 90여 회에 그쳤다. 그는 “그나마도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은 상영 횟수가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청각장애인에게 영화관람 장벽은 여전히 높다. 최 대표는 무엇보다 배리어프리 서비스에 대한 낮은 인지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토로했다. “오롯이 뭐 하는 곳이냐고 물으면, 배리어프리 영화부터 베리어프리 자막까지 하나하나 다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며 “배리어프리 자막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최 대표는 배리어프리 자막이 청각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자막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난청인·노인 등 청력이 저하된 사람이나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어린이도 배리어프리 자막이 삽입된 영화를 보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배리어프리 자막은 잠재력 있는 시장”이라고 했다.
실제로 비장애인도 헤어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릴 때, 아이를 재우고 나서, 대중교통 이용 시 등 일상에서 배리어프리 자막을 사용하면 유용한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소리를 새기다, 마음에 번지다.
오롯은 배리어프리를 알리는 활동의 일환으로 지난해 11월 1일 ‘오롯한 상영회 – 소리를 새기다, 마음에 번지다’를 열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오롯한 상영회’는 차별 없는 이해를 위해 수어 해설 서비스와 문자 통역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구로구 수어통역센터와 에이유디사회적협동조합, 그리고, 한국농아대학생협회가 함께 해 의미를 더했다.
최 대표는 “오롯한 상영회를 통해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널리 알렸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진행하게 될 상영회 역시 누구도 불편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꾸릴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오롯한 상영회에서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와 〈나는 보리〉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특히 ‘나는 보리’는 청각장애인 부모와 남동생을 둔 보리가 주인공인데, 내용 특성상 영화가 많은 대사 없이 전반적으로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자연스러운 고요함 속에서 많은 관객의 감동을 끌어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에는 BIAF 2019(제21회 부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폐막작 배리어프리 자막을 지원하기도 했다. 배리어프리 자막이 포함된 상영은 애니메이션 영화제 역사상 최초였다. 상영 당일,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구성된 자막평가단 10명을 초청해 자막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영화제에서 배리어프리 자막은 자막이 스크린에 삽입되는 방식 대신에 개인기기로 송출하는 형태(폐쇄형 자막)로 지원됐다. 최 대표는 영화제 참여 소감을 묻는 말에 “비장애인을 위한 영화는 장애인들이 참고 봐야 하는데, 장애인을 위한 영화는 비장애인이 참아줄 수 없다면 그건 좀 씁쓸하다”며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배리어프리 자막이 삽입된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함께 보는 일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현재 학내 창업동아리 형태인 오롯은 사회적 기업 창업을 계획 중이다. 프로젝트 형태에서 벗어나 더욱 많은 이들에게 배리어프리 자막을 알리고, 더 나은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최 대표는 당찬 포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오롯’이라는 명칭은 “모자람 없이 온전하다”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오롯이 함께하겠습니다.
글: 진재성 이로운넷 인턴 기자
원문: 이로운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