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린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준 관계자분 덕인지, 아니면 알고리즘 선생님 덕분인지 종종 브런치나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 걸리곤 한다. 그럴 때면 조회 수는 폭발하고, 알림창의 초록색 점은 지워도 지워도 계속 쌓인다. 예상 밖의 뜨거운 반응은 내 글이 허공을 향한 혼자만의 독백이 아닌 누군가의 가슴에 닿았다는 즐거움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렇게 살갗에, 가슴에 닿은 반응은 조금 더 좋은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때로는 격한 공감의 댓글이, 또 때로는 따끔한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날 선 반응보다는 대체로 부드럽고 따뜻한 응원이 대부분이다. 당연히 나와 의견이 다를 수도 있고, 정중한 조언과 제안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하지만 종종 이 사람은 내 글을 제대로 읽긴 한 건가? 싶은 댓글을 확인할 때면 울컥하고 화가 차오르는 때도 있다. 어딘가 화풀이하고 싶었는지 다짜고짜 쌍욕을 하기도 하고,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복붙하기도 했다. 글 전체를 보는 게 아니라 한 부분에 꽂혀 인신공격은 물론 모지리 찌질이 취급을 하기도 했다.
난 대단한 학식이나 위신이 있는 전문가가 아니다. 돈을 받고 쓴 글도 아니다. 그저 일상에서 겪은 소소한 일들에 대한 감상을 글로 적어 해소하는 즐거움에 취한, 일개 ‘보통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꿀 영향력이 있는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이 개인적인 글들로 유명 인사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긴 생각을 글로 풀어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는 자비로운 부처와는 거리가 멀다. ‘화’라는 감정에 그 누구보다 충실한 인간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쌍욕에는 쌍욕으로 응수하고 싶어 대댓글 창을 띄운다. 그리고 NN년 동안 정글 같은 사회생활을 하며 터득한 걸쭉한 욕을 한 사발 써넣고 엔터를 누르기 직전! 겨우 이성을 붙잡는다. 그리고 백스페이스키를 눌러 깨끗이 지운다.
매번 거기까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이자 화풀이. 백스페이스키를 악플러의 뒤통수라 생각하고 분노를 가득 담아 쾅쾅 누르며 마음을 다잡는다. 처음처럼 비워진 대댓글 창은 내 마음처럼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다. 다만 ‘화’가 많은 주인을 잘못 만난 노트북이 이번에도 오롯이 액받이가 되었다.
사실 악플러는 온라인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오프라인의 악플러들은 일터에도 있고, 지하철이나 공원 같은 공공장소에도 있다. 때로는 가족이라는, 친구라는, 선배라는, 후배라는 이름표를 단 악플러도 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선한 얼굴로 ‘다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라고 일장 연설을 시작하지만, 결국은 악플이 되어 가슴에 비수로 박힌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악플러들의 목적은 단 하나다.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배설하는 것! 마치 남의 집 앞에 감정의 쓰레기를 불법 투척하고 가는 양심 불량 시민이다. 얼떨결에 건네받은 악취를 내뿜는 쓰레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 당황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그 쓰레기를 안고 어떻게 할지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가슴에 묻어도 거름도 안 될 폐기물은 흔적도 남지 않게 스킵하는 게 답이라는 걸.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에 짱돌을 던진 정성스러운 악플을 단 누군가를 생각한다. 세상에는 많은 선생님이 존재한다. 선생님이라고 다 옳고 완벽한 가르침을 주는 건 아니다. 선생님 말씀 중 필요한 건 당연히 가슴속에, 머릿속에 적어 둔다. 하지만 내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은 말씀은 적당히 스킵한다. 이게 바로 개복치인 내가 뜨거운 악플의 계절을 보내고도 여전히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다. 여전히 숨 쉬는 이유다.
시련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악플은 나를 더 굳건하게 만들었다. 나의 글에, 나의 인생에 또 언제 어떤 악플이 달릴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악플러의 정성이 무색하게 그 어떤 악플이 달리건, 그 악플은 내게 전혀 내상을 입히지 못한다. 난 신고 버튼을 누른 후 마음속에서 스킵할 거고, 악플러의 외침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허공에 부서질 뿐이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