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우정에 관해 여러모로 수정된 개념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우정은 힘들 때 만나 소주 한잔 기울이고, 서로를 진정으로 위로해주고,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마지막으로 돈도 빌려볼 수 있고,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할 수 있는 그런 제2의 가족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우정에 따라 ‘보증’을 서주었다가 파산한 집도 참 많았고, 우정을 좇느라 가정을 소홀히 하거나 지나치게 믿었다가 배신당해서 증오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제껏 느낀 것은 이런 우정이 도대체 나랑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단 스스로 마음이나 상황이 어려울 때도 친구를 찾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 친구를 찾고 싶을 때는 내가 무언가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서로 의지하며 함께 해나가면 좋은 것이 있을 때처럼 다소 의욕적인 상태일 때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대개 혼자 있거나 가족이나 연인을 찾았던 듯하다. 나에게는 일종의 ‘안쪽’ 영역이 있어서 이쪽은 내가 나를 완전히 내려놓고 안심할 수 있는 둥지 같은 곳이었는데, 그런 둥지에 친구가 있는 건 꽤 불편한 일로 느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태도는 아마도 ‘진짜 우정’을 모른다든지 제대로 된 우정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할 법하다. 진짜 친구라면 당연히 서로의 가장 깊은 ‘안쪽’에 있어야 하는 존재이고,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털어놓고, 가장 힘들 때 의존할 수 있어야 하고, 물심양면으로 서로를 위할 수 있어야 하는데도, 그런 관계를 회피하는 자기방어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안쪽’에는 서로의 운명을 걸고 함께하는 운명공동체로서의 구성원 정도가 되지 않는 한, 들어서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느낀다. 그 영역은 무척이나 깊고 복합적이고 다면적이며 괴물과 천사가 공존하는 곳이고, 더 안쪽은 철저히 혼자서 감내해야만 하는 부분도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나에게 우정이란 서로가 잘 지낼 때만 만나서 깔깔대고, 서로가 어려울 때는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관계는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의 문제에 관해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함께 고민하고, 때로는 크고 작은 도움은 줄 수 있을지언정, 운명을 함께하지는 않는 관계라고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각자 개별화된 운명 속에서, 각자의 내면을 붙들고, 각자의 삶과 맞서 있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 상대와 정도 이상으로 뒤섞이지 않는 거리감이야말로 우정의 핵심 언저리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정의 천재’라고 불렸던 한나 아렌트 또한 우정의 핵심에 ‘거리’를 놓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에는 타인들인 ‘몰’과의 관계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간격을 지켜라.”라는 말이 강박적으로 나온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간격이 있어야 한다. 우정은 그 간격을 허물고 뒤섞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향한 존중으로, 나 자신을 위한 믿음으로, 상대와 간격을 지키는 것이다.
우정에는 아마 다양한 측면이 있을 것이고, 각자의 삶의 맥락에 따라 다른 우정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삶에 어울리는 우정을 여전히 찾아가는 중이고, 그로써 내가 믿는 우정의 개념을 만들어간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