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d at Sports의 「In The Late Afternoon of Modernism: An Interview with Graham Harman」을 번역한 글입니다.
2016년 『비유물론: 객체와 사회 이론(Immaterialism: Objects and Social Theory)』에서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인 그레이엄 하먼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를 주요 사례로 삼고 객체지향 존재론(Object Oriented Ontology)을 신유물론(New Materialism) 및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과 구별한다. 이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들 미묘한 차이의 일부와 그것들이 예술과 관련되는 방식, 인류세(행위자 연결망 이론hropocene), 그리고 하먼에 의한 객체지향 사회 이론의 부각을 논의한다.
캐롤라인 피카드(Caroline Picard, 이하 CP): 『비유물론』에서 당신은 객체지향 존재론이 행위자 연결망 이론 및 신유물론과 다른 측면을 부각합니다. 그 차이에 관해 조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 이하 GH): 제게 훨씬 더 친숙한 행위자 연결망 이론으로 시작합시다. 저는 1990년대 말 드폴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던 학생으로서 여기 시카고에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저작을 처음 만났습니다. 라투르와 관련해 제가 즉각적으로 좋아한 점은 그의 어조가 하이데거의 어조보다 훨씬 더 낙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라투르는 훨씬 더 유쾌했습니다. 또한 라투르는 특정한 객체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한 자원을 더 많이 제공합니다. 하이데거의 경우 모든 객체를 기술의 양상과 현전의 비참한 예화로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라투르는 사실상 각각이 독자적으로 다른 개별 기술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행위자-네트워크 접근법과 관련해 저를 괴롭히는 점은 그 접근법이 사물을 그것의 행위로만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규정은 너무나 제한적입니다. 궁극적으로 행위 바깥에 있는 사물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물이 다수의 다른 행위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P: 그 논점이 『비유물론』의 주요 사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어떻게 관련됩니까?
GH: 제가 그 사례를 선택한 이유는 라이프니츠가 앙투완 아르노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유사객체로 놀렸기 때문입니다. 그 기업에 대해서 라이프니츠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의 통합된 실체로 여기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배들의 무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사물로 여겨질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모나드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지금까지 생존한 어떤 알려진 인간보다도 더 오래 거의 200년 동안 지속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 기업이 정기적으로 자신의 선박을 교체했더라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신의 내부 요소들에 압력을 가할 뿐 아니라 외부 환경에도 압력을 가한 실재적 객체입니다. 그 기업은, 선박이나 사람, 또는 그것의 운영 전략이 대체되었을 때에도, 그 기간 내내 거의 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CP: 하지만 당신은 그 기업이 단일한 것임에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까?
GH: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끊임없는 생성의 흐름 속에 있다는, 일반적으로 첨단처럼 보이는 모형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이 모형은 모든 국면이 동등해지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평탄하게 할 뿐인데, 이 상황은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과 들어맞지 않습니다. 『비유물론』에서 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생에 중대했던 대여섯 가지의 특정한 국면을 판별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의 주요한 원천은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의 연속세포 내 공생설(Serial Endosymbiosis Theory, SET)인데, 마굴리스는 이제 막 인문학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제 자신의 분야와 이웃하는 분야들에서 작업하면서 우리 모두에 대한 마굴리스의 중요성을 파악한 두 저자로 런던 골드스미스대학교의 루시아나 파리시와 캐나다 퀸즈대학교의 미라 허드가 떠오릅니다. 마굴리스를 읽은 적이 없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생자 행성(Symbiotic Planet)』이 좋은 출발점입니다.
대학원생이자 조교수였던 1960년대 마굴리스는 생명 형태들은 주로 점진적인 적자생존 과정을 통해서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 생명 형태와의 간헐적인 공생을 통해 진화한다는 중요한 관념을 품었습니다. 인간 세포와 그 수많은 소기관을 생각해 봅시다. 마굴리스의 이론은 이들 소기관이 원래 인간 세포에 속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핵이나 내막이 없는 원핵세포가 존재했습니다. 마굴리스에 따르면, 이들 유기체는 어쩌면 세포 내부의 영양분을 먹고 사는 세포 기생체들에 감염되었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기생체들은 대기 중 산소 농도가 급격히 상승했을 때 우리 세포들이 생존하는 데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마굴리스는 우리가 인간 세포의 핵 속 DNA를 분석하는 데 적절한 시험을 어쨌든 행할 수 있다면 세포 DNA가 모든 소기관에 대해서 코드화되어 있지 않음을 알 것이고, 그래서 소기관의 세포외 기원을 증명할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1980년대에 그런 시험이 가능해졌고 마굴리스가 옳았음이 밝혀졌습니다. 마굴리스가 제안했던 것은 웃음거리 이론에서 표준 교과서 생물학으로 전환되었습니다.
CP: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까?
GH: 네, 있습니다. 대략 같은 시기에 마굴리스는 이렇게 묻습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실험실에서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마굴리스는 그런 사례가 한 가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초파리를 어떤 탱크에 집어넣습니다. 연구자들은 그 탱크를 양분한 다음에, 한쪽은 천천히 가열하고 나머지 다른 한쪽은 천천히 냉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세대가 지난 후에 그 두 초파리 집단은 더는 교배할 수 없었고, 그래서 사실상 다른 종이 되었습니다. 연구자들은 그 초파리들을 해부한 후에 따뜻한 초파리에 바이러스가 있음을 알아내었습니다. 이 사태의 정통적인 반응은 ‘빌어먹을, 이 실험은 바이러스로 오염되었어요. 이건 쓸모없네요.’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굴리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요점은 바이러스 덕분에 초파리가 열기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CP: 당신은 어떤 계기로 그런 접근법을 역사에 적용하기를 원하게 되었습니까?
GH: 저는 우선 인간의 이력에 관해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레비 브라이언트와 제가 흥미로운 논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브라이언트는 제가 객체는 완전히 형성된 본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기에 이 생각에는 한 사물은 결코 변화할 수 없고 오직 사물들의 조합만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수반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게는 후속 부분들로 더는 구성되어 있지 않은 궁극적인 객체는 존재하지 않기에 만물은 애초에 하나의 조합체라는 점을 참작하면 제 생각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저는 브라이언트의 이의를 진지하게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우리는 어쨌든 개체로서 내부적으로는 그다지 변화하지 않는다는 후속 소견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침실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한 다음에 갑자기 우리 삶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은 무언가 다른 객체, 이를테면 사람, 기관, 직업, 도시, 선호하는 저자와의 공생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것들이 우리 삶을 불가역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는 이런 삶의 변화가 무한정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대개 평생 대여섯 번 일어날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 책을 저술하기 직전에, 역사에서 나타나는 실제 변화는 점진적이거나 내부적인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공생적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관념을 역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제게 떠올랐습니다. 큰 변화를 초래하는 놀라운 국면이 존재하고, 장기적으로 안정된 기간에 존재하는 평범한 국면이 존재합니다. 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역사에서 공생들을 찾았습니다. 그 기업이 다른 객체들과 융합해 새로운 객체들을 창출함으로써 진화한다는 관념을 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초래된 변화가 불가역적인 이유는 전체 객체가 자신의 부분들에 역행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인데, 심지어 그 객체가 불가역적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역사적 객체가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결국 끝났지만, 상황은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도 두 개인을 포함하는 하나의 더 큰 객체죠. 결혼한 사람들이 헤어질 때 대부분 각 개인이 다시는 서로 대화를 절대 하지 않기로 했더라도 그들에게 역행적 효과를 남겼을 것입니다. 항상 재혼할 수 있지만, 절대 첫 번째 결혼을 다시 할 수는 없습니다.
CP: 그것은 제게 사물들이 어떤 특정한 적소 안에서 호혜적으로 발달한다는 공진화 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계속해서 특화해 결국에는 향신료와 육두구만을 교역합니다. 마치 부리가 점점 더 길게 진화하는 벌새처럼 말입니다.
GH: 맞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불리한 점이고 종이 갑자기 사라지는 이유입니다. 그 종은 지속하지 않는 상황에 과도하게 결부되었습니다. 18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일어난 일은 육두구와 정향, 그리고 다른 향신료가 시장에서 덜 바람직해진 사태입니다. 1700년대에 대두하던 것은 차와 커피, 초콜릿이었고 영국인들이 이들 재화, 특히 차를 공급하는 데 더 나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운명은 육두구와 정향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호혜성이 없는 사례들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특정적으로 카이로와 공생 관계를 맺었습니다. 저는 삶의 올바른 순간에 카이로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16년 동안 일했고, 13년 동안 거주했으며, 카이로에 도착하기 이전의 저와 같은 사람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동시에 카이로는 저와 공생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카이로는 역사가 오래되었고, 제가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슬람의 도래 또는 로마인들의 도래 등이 그 도시에 대한 공생체였던 그런 방식의 공생체가 아닙니다.
CP: 여기서 당신은 비유를 동원하지요.
GH: 비유가 직설적 비교를 제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호혜적 비교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 사물이 직설적 의미에서 비슷하다고 한다면, 이를테면 펜은 연필과 같다거나 시카고는 토론토와 같다고 한다면 그 두 항 사이에는 호혜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런 경우 특성의 호혜적 교환이 존재합니다. 비유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두 항 중 하나는 객체 위치에 있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성질 위치에 있습니다. 그것은 비대칭적 결합입니다. 한 객체가 나머지 다른 한 객체에서 성질을 벗겨내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책에서 공생은 직설적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유적 관계고, 바로 그 점에 공생의 힘이 놓여 있다고 말하려 노력했습니다.
CP: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당신의 주요 사례로 사용함으로써 당신의 논의에서 정치적 측면이 드러납니다. 그 기업의 역사에는 대단히 많은 폭력과 착취가 내재합니다.
GH: 그 기업의 역설 중 하나는, 네덜란드인들이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적인 국민이었지만 그 기업으로 매우 효율적인 괴물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에 네덜란드는 신생 독립국이었고, 네덜란드의 땅에서 수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른 이전의 스페인 지배자들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실존적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는 그 기업에 대한 얀 피에테르손 코엔의 전망이 약속한 거대한 독점 이윤이 필요했습니다. 그 전망에는 다른 유럽 강국을 폭력으로 따돌리는 일뿐 아니라 아시아인 사이의 교역을 지배하는 일도 반드시 수반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쿠카와 막부의 일본과 청나라 중국을 침입하지 못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네덜란드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네덜란드인들에게 굴욕을 안겨 주었는데, 그 기업의 대표자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적게 양보하곤 하는 일황 면전에서 고개를 숙이게 했습니다. 또한 지역 유력자들로부터 간헐적인 위협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자바에서 있었고 나중에는 더 심각하게도 말라카에서 있었습니다. 말라카는 결국 네덜란드 해군이 와서 이른바 자율적인 기업을 구조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방대하고 강력한 독점 기업은 참담할 정도로 많은 폭력과 연루되었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네덜란드를 나쁜 행동을 저지른 국가로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덧붙이겠습니다. 신시내티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제 책을 높이 평가했지만 제가 그 시기 네덜란드의 절대적인 최악의 측면에 집중했다고 느낀 한 네덜란드인 독자에게서 꽤 감정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그 독자는 데 위트(de Witt) 형제 같은 네덜란드 자유주의의 몇몇 반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잊은 것은 제 사례 연구는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다는 점, 그 기업은 대체로 네덜란드 자체에 자율적이어서 통신이 느린 시대에 세계의 반대쪽에서 빠른 의사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시 네덜란드가 부국임에도 젊고 취약한 국가였고 정말로 스페인 침공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포르투갈인과 영국인도 동인도에서 훌륭한 행동의 모범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네덜란드인의 잔혹 행위에 집중한 이유는 단지 네덜란드인이 그 지역을 지배한 시기에 상대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한 가지 측면, 즉 종교적 편협함에서는 포르투갈인이 훨씬 더 나빴습니다. 역설적으로 이슬람을 파괴하려는 포르투갈인의 일관된 노력이 종교를 전파하기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윤을 확보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네덜란드인을 발흥한 한 가지 요소였습니다.
CP: 한 지점에서 당신은 “인류세 문명은 일회용 플라스틱 물건들과 그것들의 궁극적인 태평양 쓰레기장을 쉽게 제거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런 물건들에 너무나 많은 일자리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고고학자 이안 호더의 말을 인용합니다. 제게 그 말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현대 기업 사이의 유사점을 나타냈습니다.
GH: 그 말은 호더의 말을 직접 인용한 것이라기보다는 바꿔 말한 것이지만, 그것은 확실히 그의 관념입니다. 그는 그 관념을 “얽힘”으로 부르고, 그가 이 흥미로운 주제에 관해 한 권의 온전한 책을 저술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선택한 사례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명입니다. 그 조명은 많은 쓰레기를 생성하고 많은 전기를 사용하기에 지구온난화 긴급 상황에서 정부는 우선 그것을 금지하기로 할 결정도 있음직합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대단히 많은 일자리가 번성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명 산업에 의존하기에 그것을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우리 둘 다 아이폰을 갖고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아이폰을 제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광산에서 금속을 채굴하고, 중국 공장에서 아이폰을 연마하면서 끔찍한 폐 질환에 걸렸을까요? 호더는 아이폰이 소형 냉장고만큼 많은 전기를 사용한다고 합니다만 저는 그 점을 독자적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결함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옛 동유럽 공산주의처럼 환경이 나빠지지 않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은 채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오늘날 금채광 기업이 세계의 가장 사악한 기업일 것입니다. 맹견을 사용해 지역 시민들을 공격하는 채광 기업들의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 기업들의 채굴 조건은 지독하고 끔찍합니다. 광산 온도는 화씨 120, 130도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이들 광산 중 하나에 방문한 적이 있는 제 친구이자 기자인 그램 우드에 따르면, 광부들이 허리를 구부려야 하는 이유는 터널이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유독한 화학물질들이 있고, 금을 채굴하는 사람들은 매우 작은 임금을 받습니다. 사실상, 몇몇 목격자는 앵글로골드 아샨티를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기업”으로 지칭했습니다.
CP: 그렇지만 그 틀 안에서는 그 체계가 스스로 전파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거대한 채굴 경제 안에서 인간의 힘을 식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GH: 제 생각에, 몇몇 사례에서 남아 있는 인간의 행위주체성은 거의 없음이 참이고, 그래서 기업들 자체가 독자적인 비인간 이해관계를 갖춘 행위자가 됩니다. 때때로 저는 당혹스럽게도 객체지향 존재론이 시티즌스 유나이트 소송 사건에서 기업은 인격체라는 미합중국 대법원의 판결에 동의함에 틀림없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비판은 제 관점에 대한 꽤 어리석은 오해입니다. 제 관점은 기업과 개인이 모두 객체라는 것이지,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객체지향 존재론에 따르면 뽀빠이와 일각수, 네모난 원은 객체지만, 명백히 우리는 이것들이 인권을 보유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존재론적 물음과 정치적 물음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모기에 투표권을 주지 않으며, 동물권 활동가들이 모기는 퇴치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자이나교는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말입니다). 또한 시티즌스 유나이티드 판결이 기업에 부여한 그런 의미의 정치적 권리를 기업에 주지 말아야 하는 점은 명백합니다.
CP: 공생으로 되돌아가면, 저는 인류 자체가 어떻게 지구적 객체일지 궁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우리 종의 복잡성을 하나의 단위체로 축소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하나의 진화하는 지구적 체계에 결합된다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그 궤적의 어디에 놓여 있을 것입니까?
GH: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최초의 근대 기업이었습니다. 그 기업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독점권을 가져야 했습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세 권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저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economie et capitalisme)』에서 이것과 관련해 이야기하고, 나중에 마누엘 데란다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는 사실상 반시장, 국제적 독점, 카르텔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럽인이 오기 전에, 포르투갈인은 그 지역에서 자유무역을 억누를 수 없었거나 억누르기를 꺼렸으니 더 구체적으로 네덜란드인이 오기 전에 동인도에서 무역이 어떠했는지 살펴보면 항구들은 투르크인, 아랍인, 중국인, 에디오피아인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인도 지역은 무역의 견지에서 다문화적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항구는 궁극적으로 네덜란드인이 독점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그들의 특정한 혁신이었습니다. 문제의 향신료는 당시에 매우 희귀했는데, 지구의 특정하고 한정된 지점들에서만 산출될 뿐이었습니다. 당시에 육두구와 메이스, 정향은 소수의 동아시아 섬, 즉 술라웨시와 뉴기니 사이의 중앙에 놓여 있는, 이른바 “향신료 제도”에서만 산출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인은 사실상 어떤 섬의 나무를 벌채함으로써 독점 가격을 높이 유지하기 위해 그 나무를 자신들이 통제하는 섬에서만 자랄 수 있도록 보장한 것입니다. 그 조치는 작동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교훈입니다. 반시장은 작동합니다.
CP: 책 말미에서 당신은 객체지향 사회 이론을 전개하자고 제안합니다.
GH: 제가 소중히 여기지만 명백한 문제점이 있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과 다른 것을 탐색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예를 들면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사물의 단순히 안정한 현존에 불과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행위를 과도하게 강조합니다. 반사실적인 것들을 잘 다루지 못하고, 그래서 여전히 일어날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것을 서술하는 데 가장 유용합니다. 더욱이 중요한 행위와 중요하지 않은 행위를 구분하는 데 적절한 도구를 제공하지 않는 반면에, 마굴리스의 공생 관념은 제공합니다. 또한 어쩌면 행위자 연결망 이론는 관계의 가역성에 관해 약간 지나치게 경솔할 것인데, 그 이유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의 경우에 모든 것이 다양한 행위자의 취약하고 대칭적인 조립체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좌파가 라투르를 비판할 때 적실한 한 지점인데, 일부 관계들은 사실상 꽤 비대칭적이고 반전시키기 어렵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와 더불어 이른바 신유물론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객체지향 존재론를 신유물론과 무리 짓지만 저는 신유물론 진영과 관련해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신유물론은 객체에 아무 관심도 없고, 적어도 제 판본의 객체지향 존재론은 폐기되길 원하는 개념 중 하나인 ‘물질’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점입니다.
유물론은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제 관점에서는 둘 다 나쁩니다. 그 중 하나는 오래된 고전 유물론으로, 사물을 그것의 조각들로 환원합니다. 나머지 다른 하나는 객체를 그것이 표현되는 사회적 실천이나 언어나 사건으로 위로 환원합니다. 저는 이런 두 전략을 각각 ‘아래로 환원하기’와 ‘위로 환원하기’로 부르는데,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제가 이중 환원하기로 지칭한 합동 공격으로 결합됩니다. 이 두 가지 유물론은 모두 전혀 객체지향 이론이 아닙니다. 위 또는 아래로의 효과를 위해 객체를 제거함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CP: 당신이 언급하는 것의 일부는 객체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물이 정확히 무엇인지와 관련해 일종의 어색함이나 불안감이 출현합니다. 사물은 일단의 원자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원자가 최소 단위체일 것인가? 아니면 사물이 효과들의 순 조립체라면, 우리는 왜 우리가 한 규모를 다른 규모보다 우선시하는지 여전히 설명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일상적인 머그잔과의 만남이 매우 독특해집니다.
GH: 우리는 너무 빨리 알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 무언가가 무엇인지 물을 때에는 두 가지 가능한 종류의 답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니면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제가 방금 언급한 ‘아래로 환원하기’와 ‘위로 환원하기’에 해당하고, 인간이 갖는 두 가지 지식 형식입니다.
그러나 저는 『비유물론』과 어딘가 다른 곳에서 철학과 예술은 지식 형식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지식은 사물을 그것에 귀속시킬 수 있는 참된 특성들로 바꿔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바로 과학이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과학은 근대 문명에서 인지 활동의 황금율이었습니다. 지난 400년 동안 과학은 궁극적인 권위였습니다. 과학은 우리 모두가 궁극적인 안심을 위해 가는 장소로서 교회를 대체했습니다. 위대합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몇몇 위대한 예술가도 있었고, 저는 그들의 인지적 영향을 폄하하면서 그들을 한낱 장식가이자 분위기 조작자로 여기는 어떤 경향에도 저항할 것입니다. 피카소를 아인슈타인이나 뉴턴보다 더 낮게 평가해야 합니까? 너무 멀리 나간 듯 보이겠지만, 피카소를 무언가 다른 일을 행한다고 여겨야 합니다. 저는 피카소의 그림을 바라봄으로써 말이나 곡예사에 관해 무언가를 알 것처럼(기묘하게도 이것이 알랭 바디우의 관점인 것처럼 보이지만), 피카소가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입니다. 예술 작품은 바꿔 말해질 수 없습니다. 예술 비평가는 옆에 들어와서 사물을 간접적으로 다루는 식으로 작업해야 합니다. 때때로 허세로 미끄러질 수 있고 그것은 철학자와 비평가, 예술가의 직업적 위험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 허세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CP: 저는 제가 느끼는 불안, 적어도 기후변화 또는 주요한 지구적 기업 투자와 관련된 불안의 일부가 풍경이 자신의 전통적인 배경 위치에서 전면으로 나서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GH: 아니면 우리가 여전히 너무 강하게 통제할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몇몇 에세이에서 저는 “인류세”라는 용어를 철학의 전문용어로 사용했는데, 그 용어는 인간이 필수 성분을 이루는 모든 객체를 가리킵니다. 예술과 체스, 야구 같은 것들은 애초부터 인류세적인 것임이 명백합니다. 하지만 현재 기후가 최초로 인류세적인 것이 되는 이유는 인간이 기후의 한 성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태가 언제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1945년이었을까? 산업혁명이었을까? 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까?농경이 등장한 때일까? 어떤 시점에 인간은 행성적 기후의 중요한 성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재 우리는 그것의 일부입니다. 현재 우리는 그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그리고 그것만으로 불안을 유발합니다.
CP: 서양 사상이 여태까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한 이론적 구조, 즉 철학, 수학, 과학 등은 그런 변화를 수용할 처지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GH: 확실히 여태까지 우리가 가진 그런 종류들의 철학과 과학은 그 변화를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기후과학과 지구과학이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식별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우 오랫동안 의존한 정밀한 근대적 과학들과 매우 다른 종류의 과학입니다. 한 가지 특히 불행한 사례를 들면, 1945년의 나카사키 원폭은 임계 질량을 창출하기 위해 플로토늄 고리의 모든 부분이 정확히 동일한 순간에 중앙에 이르도록 그 고리의 완전한 내파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정밀한 무기 과학입니다.
그러나 기후과학의 양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후과학은 100% 확실한 증거가 있는 종류의 과학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그런 과학에는 이전 종류들의 과학보다 정치가 더 많이 개입합니다. 라투르는 그런 주제 전부를 인식한 최초의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라투르는 이미 생태론에 관한 책을 한 권 저술했고 틀림없이 더 많이 저술할 것입니다. 저는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책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장 중요한 철학서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여전히 제가 그렇게 말하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지만, 라투르는 이 책으로 근대주의의 심장에 말뚝을 박는데, 그래서 저는 철학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여깁니다. 라투르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대로, 근대주의는 주체와 객체를 서로 정화하려는 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패러다임 내에서는 단지 두 종류의 사물들, 즉 1) 사람들과 2) 여타의 것이 존재할 뿐입니다. 자연은 계산할 수 있는 자동적 행위의 차가운 영역이 되고 문화는 그 배후에 실재 원리가 전혀 없는 임의적인 가치들의 투영물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어느 주어진 순간에 자신들에게 걸맞은 것에 따라서 자연 아니면 문화를 선택합니다. 보수주의자는, 전쟁은 자연적이고 씻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국내 총기 폭력은 폭력 영화와 비디오 게임과 부적절한 정신 건강 요법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자유주의자는 여성의 현재 지위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수정할 수 있지만, 동성애는 일부 사람들에서 태생적으로 발견되는 자연적 사실이기에 치료함으로써 변화될 수 있거나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디에 속하든 간에, 자연과 문화는 당신의 두 가지 기본 무기인데, 이럴 때는 자연에 의존하고 저럴 때는 문화에 의존해 자신의 주장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모두 좋은 무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자연과 문화가 수조 개의 다른 영역 가운데 두 가지 별개의 영역일 뿐이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라투르는 대부분의 객체가 혼성물이라고 말하려고 할 것인데, 대부분의 혼성물은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있기에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오존 구멍은 자연적인 것이자 구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지구온난화는 훨씬 더 좋은 사례입니다. 하지만 혼성물이라는 이 개념은 여전히 위험한데, 사람들은 모든 객체가 자연과 문화의 혼성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요점은 자연도 문화도 좋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근대주의의 종언이 그 탄생만큼 명백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현재에서 4–5세기가 지난 후에는 라투르를 근대주의의 중심을 정말로 건드린 사람으로 여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연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또는 세계와 사유)라는 두 영역이 서로 정화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인공적인 분류입니다. 대단히 많은 철학자가 이 점을 인식하는 데 힘들었던 이유는 다른 분과학문이 그것을 극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철학자들은 여전히 근대주의적 프로젝트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고, 그래서 아직 황혼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주의의 늦은 오후에 있습니다.
CP: 형식론은 라투르의 설명에 관여되어 있습니까?
GH: 형식론은 매우 다양한 것을 뜻할 수 있지만, 어쩌면 그것을 규정할 가장 적실한 방법은 칸트적 견지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에서 형식론을 사용해 물질적 세계에 대한 어떤 준거와도 자율적인 윤리적 원리를 가리키면서 오로지 정언 명령을 가리킵니다. 칸트의 미학과 존재론에서도 유사한 원리들이 작동합니다. 이것은 2016년 10월에 런던 리피터 북스에서 출판한 제 책 『단테의 부러진 망치(D행위자 연결망 이론e’s Broken Hammer)』에서 다룹니다.
막스 셀러는 윤리학에 있어서 칸트의 형식론에 반대함으로써 우리에게 유횽한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형식론은 (라투르가 근대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을 펼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아와 세계는 서로 정화되어야 하는 존재론적으로 각기 다른 두 가지 영역이라고 가정하는 반면에, 사실상 셀러는 윤리적 단위체는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와 결합된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 실제 결과는, 셀러가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개인적 소명에 대한 더 큰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위대한 비올라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와 소망을 품고 있다면, 칸트가 서술한 것처럼 한낱 “가설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은 이 경로를 좇아야 하는 윤리적 명령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윤리적 단위체는 단지 의무감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사실상 사람+비올라입니다.
아름다운 것과 숭고한 게 모두 사실상 세계가 아니라 우리와 관련된 칸트의 예술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상황은 20세기 형식론에서 뒤집히는데 이를테면 클리멘트 그린버그, 마이클 프라이드, 클린스 브룩스 등의 형식론자들은 예술이 우리가 아니라 예술 객체와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 관점은 칸트의 관점을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지만 여전히 하나의 형식론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아와 세계는 서로 정화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여전히 포함하고 있고, 게다가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취향의 객관성을 여전히 탐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다시 그 책에서 저는, 미학적 단위체는 사람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라 사람과 객체가 결합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가지 결과는, 어떤 개인의 소명이 배관공이나 화가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니체가 그랬듯이) 쇼펜하우어에게 집중적으로 대응하거나, (세잔이 그랬듯이) 니콜라스 푸생에게 집중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역사에서 누군가가 비교적 사소한 인물에게서 특별히 고무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이 상황은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 항상 존재하는 사례는 T.S. 엘리어트가 당대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 시인의 반열에 결고 속하지 않은 쥘 라포고의 시에 대단히 열중한 사태입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청년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타난 존재의 많은 의미에 관한 프란츠 브렌타노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은 후에 독자적으로 존재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브렌타노는 사소한 인물이 아니라 간과된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지만,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그 자신의 가장 위대한 저작 중 하나가 아님이 명백합니다. 브렌타노의 박사학위 논문에 세계를 변화시킬 잠재력을 배태하는 요소가 있음을 알아채는 데는 하이데거의 특별한 감성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이 그 논문을 읽었지만, 하이데거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 논문이 철학의 미래에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질문의 핵심 인물인 라투르를 아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쩌면 근대주의의 자연/문화 분류법에 대한 라투르의 공격이 왜 칸트의 형식론과 그 변양태들을 벗어날 자원도 제공하는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CP: 그래서 이제 인류세에 적응하려면 지식 생산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할지에 관한 제 물음으로 되돌아갑니다.
GH: 라투르는 자신의 경력 초기에 셜리 스트럼과 함께 개코원숭이에 관해 연구하고 「사회적 연계를 다시 규정하기: 개코원숭이에서 사람까지(Redefining the social link: from baboons to humans)」라는 논문을 공동으로 저술합니다. 라투르가 스트럼과 함께 연구함으로써 배운 것은 개코원숭이가 인간보다 더 사회적이라는 점입니다(그런데 저는 피어 샤우텐 덕분에 라투르에게 개코원숭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개코원숭이는 오늘은 누가 누구의 털을 손질하는지 같은 것을 항상 서로 관찰합니다. 한 개코원숭이가 풍성한 식량원을 찾아냈는데 그 개코원숭이는 여타 개코원숭이가 헤매는 것을 봅니다. 이제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개코원숭이는 너무 사회적이어서 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코원숭이들은 매일 변화하는 자신들의 사회의 위계 질서를 지속적으로 면밀히 살피면서 그 질서 속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다시 협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당히 냉소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을 빈틈 없고 입신출세주의적이며 조작적인 존재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개코원숭이와 비교하면 결코 참이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매일 비교적 안정적인 세계에 깨어납니다. 우리는 출생 증명서, 운전 면허증, 직업, 이름, 결혼반지, 은행계좌, 직책, 가족사가 있습니다. 모두 세계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지위를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그 지위는 직업이나 결혼 문제 또는 재정적 파산 같은 삶의 위기 국면에서만 변화합니다.
CP: 그래서 객체들이 우리의 세계-지위를 안정화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GH: 그렇습니다. 생명 없는 객체들이 우리를 안정화합니다. 제 아내와 저는 아파트가 한 채 있는데, 누군가가 침입하면 우리는 경찰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 경찰은 그 사람이 범죄 혐의가 있다고 체포할 것입니다. 제 집은 아무도 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제가 이사하기로 정하거나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쫓겨날 때까지 그 집은 여전히 제 집입니다. 누군가가 제가 누구인지 의심한다면 저는 출생 증명서로 자신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필요할 때 인출할 수 있는 돈을 은행에 넣어둠을 압니다. 다른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 돈을 인출할 수 없고, 지구적 금융 붕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돈은 언제나 입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코원숭이는 사치품이 전혀 없습니다.
생명 없는 객체가 인간 사회를 안정화하는 매개물이고, 이것이 라투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통찰 중 하나입니다. 올바르게도 라투르는, 대체로 타인들에 관해 말하는 마키아벨리나 홉스에게는 생명 없는 존재자와 관련된 언급이 별로 없다고 불평합니다. 마키아벨리는 요새와 총에 관해서 약간 언급하지만, 대체로 압도적인 인간들을 뛰어넘는 데 관심 있습니다. 정말로 라투르는 생명 없는 객체를 정치의 일부로 삼은 사람입니다.
CP: 당신은 다양한 유형의 객체들에 대한 사례들을 제시할 때 항상 목록을 만듭니다. 저는 당신이 그것과 관련해 충고할 것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GH: 그런 목록을 만들어내는 방법 말입니까? 라투르 목록으로 불립니다. 그런 목록은 수세기 동안 있었지만 이안 보고스트가 이 용어를 만들어낸 이유는 라투르가 이런 목록을 특별히 잘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라투르의 가장 뛰어난 목록이 제시된 순간은 『판도라의 희망(Pandora’s Hope)』의 316쪽에 나옵니다. 그 목록에서 그는 황금산, 플로지스톤, 일각수, 프랑스의 대머리 왕, 키메라, 자연 발생, 블랙홀, 매트 위의 고양이, 검은 백조, 흰 까마귀, 햄릿, 뽀빠이, 그리고 람세르 2세를 환기합니다. 또 하나의 뛰어난 목록은 리처드 로즈(Richard Rhodes)가 『원자폭탄 만들기(Making of the Atomic Bomb)』에서 히로시마 원폭으로 파괴된 온갖 유형의 객체들을 나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가 『금속에 관하여』에서 제시한 목록이 있는데, 그는 금속이 너무나 많은 무기를 제조하는 데 사용된다는 주장을 불식시키기 위해 금속이 없다면 사람들이 죽을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나열합니다. “총이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사람이 살해한다”는 논증의 초기 판본입니다. 물론 프랜시스 베이컨이 『신기관』에서 제시한 인상적인 목록도 있습니다. “산의 구멍에서 분출하는 불”과 신선한 동물 똥, “모든 화염”을 비롯한 “열의 본성에 부합되는 사례들”을 나열합니다. 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해 비판적인 몇몇 독자는 이 기법이 싫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 기법은, 우리가 한 특정한 유형, 일반적으로 인간 마음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존재자들의 다수성을 길들이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맞서서 그 다수성을 환기하는 데 사용되는 탁월한 수사법입니다.
훌륭한 라투르 목록을 만들어내는 실용적 방법에 대해 말하자면, 제 자신의 요령은 이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 마음은 세 개가 나열된 목록에 이끌립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그런 자연적 관례에서 벗어나도록 한 번에 적어도 네 개를 나열하려고 합니다. 보고스트는 두운체의 목록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제가 그런 목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제 목록과 관련해 무작위성의 느낌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낱말이 같은 문자로 시작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저는 제 목록이 매우 다양한 존재자를 포함하기를 바라고, 그래서 그런 이유로 인해 언제나 저는 적어도 몇몇의 인간, 비인간, 자연적인 것, 인공적인 것, 산 사람, 죽은 사람, 허구적 객체, 그리고 어쩌면 불가능하거나 자기모순적인 것을 포함하고자 시도합니다. 그 다음에 당신은 그 목록이 너무 길어져서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당연히 저는 그런 목록에 짜증나는 척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진지한 독자들에 관해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많은데, 불성실은 근대주의의 가장 풍부한 생산품 중 하나입니다. 더욱이 스티븐 샤비로는 제가 흔히 제 목록에 타르를 포함시킨다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CP: 타르?
GH: 그렇습니다. 타르. T-A-R. 어느 날 저는 샤비로의 강연을 경청했고, 그는 대충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먼이 타르에 그토록 매혹당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의 일부는 단순히 제가 그 낱말의 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이고, 항상 “스타(STAR)”와 운이 맞는다고 기억합니다. 대부분의 습관과 강박이 그렇듯 여기에는 어쩌면 정신분석학적 공명이 있을 것입니다. “옐로우 스타”는 아이 시절에 제가 처음 발음한 복합 어구라고 들었습니다. 아이 시절 제 침실은 차고 지붕 옆에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지붕에 타르를 칠했고, 당연히 제 부모님은 타르가 여전히 뜨거운 동안에 제가 그 위를 걷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그곳을 맨발로 걸었고, 그때 타르는 냉각되었지만 걸어서 돌아다니기에는 여전히 약간 부드럽고 푹신푹신했습니다. 그것이 왜 매우 유쾌한 기억인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그런 이유로 타르가 제 목록에 빈번히 나타날 것입니다.
원문: 사물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