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so의 「It is time to try out an “ecological Leninism” – Interview with Andreas Malm」을 번역한 글입니다.
RP(Revolution Permanente): 『화석 자본(Fossil Capital)』에서 당신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비역사적인 ‘인류원인’설인 ‘인류세’ 이론에 반대하는 다수의 논증을 제시합니다. 환경학 분야에 있어서 이 접근법의 헤게모니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이하 AM): 새로운 지질 시대에 대한 논의는 자연과학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지문이 도처에 있고 그 인과적 영향이 자연적 메커니즘의 영향을 능가하는 정도로 인간이 지구 시스템의 기본 작용을 변경해 버렸다는 발견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통찰에서 과학자들은 이 시기는 ‘인간의 시대’, 즉 인류세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 자체는 이상하지도 않고 반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류세라는 관념이 사회과학과 정치적 논쟁에 스며들어서 “이 모든 혼란 상태의 원인은 인간 일반이다”라고 번역될 때 발생합니다.
이런 서사는 잘못된 것인데, 사실상 지금까지 거듭해서 예증되었듯이, 일부 사람이 혼란 상태를 유발했습니다(예를 들면 100개 기업이 이산화탄소 배출량 70%의 배출원입니다). 또한 그 서사는 행동에 대한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인간종이 범인이라면, 우리가 그 상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지배계급과 부수적인 사회적 관계가 문제라면, 우리는 그 뿌리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생물지구화학적 순환에 관한 전문가나 기상학자가 이 점을 이해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환경학에서 비정치적인 인류세 서사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황은 자연과학 바깥에서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과 전략적 전망을 통합하지 못한 점에서 기인합니다.
RP: 맑스주의는 생태 위기에 대한 당신의 대안적 접근법의 기둥입니다. 『피리오드(Periode)』에 발표한 독서 가이드에서 당신은 “유물론적 현현”을 경험했으며 “생태 위기에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고 설명합니다. 당신의 일상과 맑스주의자로서 당신이 생태학 연구를 개시하도록 이끈 것에 관해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느 정도까지 생태 위기는 맑스주의의 갱신을 수반합니까?
AM: 저의 기후 행동은 1995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COP1에서 시작되었습니다. COP1은 끝없는 일련의 유엔 기후협상에서 바로 그 최초의 회의에 해당합니다(저의 다음 저작에서 이 점을 얼마간 상세히 서술합니다). 하지만 그 후에 저는 스웨덴의 원외 극좌파에서 활동가로서 10년을 보냈습니다. 그 기간에 저는 기후 및 환경 정치를 경멸했습니다. 저는 이런 쟁점을 계급투쟁에서 벗어난 사치스럽고 히피적이며 프티 부르주아적인 일탈 행위이자, 중동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다른 인민(그 당시에 제가 주로 몰입한 문제입니다)과 무관한 것이면서 착취당하는 세계 대중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제가 더는 잘못될 수 없었음이 명백합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좌파 자체의 일상적 태도인데, 요컨대 노동계급 정치, 노동조합, 사회적 불평등, 반인종주의, 페미니즘, 또는 무엇이든 다른 무언가를 신봉하면서 계속해서 지겹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기후와 생태는 아무튼 덜 중요하고 동일시하기 더 어렵습니다. 오히려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지적한 대로 기후 위기는 실존적 긴급함으로 이 모든 고전적 전선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세계 전역에는 여전히 일상적 태도를 고수하면서 기후와 생태를 기껏해야 주석으로 두는 일부 좌파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일반적으로 매우 무력한 점에 기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역사가 그들을 혹독하게 심판할 것입니다.
저 자신의 경우에, 2005년에 제 주변 사람들 덕분에 저는 기후 각성을 철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이슬람 공포증, 극우파, 팔레스타인, 이란 등 몇몇 다른 쟁점에 관해 작업했지만, 생태 이외의 것에 관해 생각하기와 생태를 통해서 여타의 것을 굴절시키기를 회피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는 생태가 정말로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RP: 작년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젊은이들의 대규모 맹공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우리는 이 운동이 파국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는 ‘붕괴론적’ 이론들에 가까운 깊은 비관주의와 실제적인 반자본주의적 급진화 없는 넓은 정치화로 특징지어진다고 여깁니다. 당신은 젊은이들의 이들 운동을 어떻게 지각하고 그들이 어떤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M: 저는 거리에 나선 젊은 대중이 파국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그런 사태를 막아서 자신의 여생을 불타는 폐허 주변을 걸으면서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필사적입니다. 현재 세계 전역에서 대중이 기후 분노를 토로하는 사태는 이 쟁점과 관련해 여태까지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희망적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탈정치화 과정들로 인해 이들 동원 사태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정교함과 전략적 명료성의 수준이 낮다고 깨달을 수 있음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충격은 있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은 이미 화석 자본을 겨냥해 요구를 제기하고 석유와 가스, 석탄 기업들이 행성에서 퇴출당해야 함을 아는데, 그래서 급진화의 잠재력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학교에서 나와서 자신들의 미래를 아무리 탄원하더라도 아침에 깨어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화석연료를 끝내기 위해 여전히 아무 일도 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1–2년 안에 이들 젊은이는 모두 무엇을 행하겠습니까? 이 세대에는 다이너마이트가 있을 것입니다.
RP: 1983년에 칠레의 혁명가 루이스 비탈레(Luis Vitale)는, 맑스주의의 두 가지 주요한 난제 중 하나는 “생태 위기에 인류의 생존이 걸려 있기에 그것에 대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맑스주의는 일종의 ‘포괄적’ 아나키즘을 위한 급진생태론적 사회운동에서 매우 주변부적인 것에 머무릅니다. 생태적 맑스주의 이론들의 상대적 역동성, 특히 앵글로색슨 국가들에서의 역동성과 이들 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정치적 개입의 부진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AM: 생태적 맑스주의는 강단의 내부에 머묾으로써 스스로 불구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실제 운동에 관심을 두고서 접근해야 합니다. 아나키즘적 관념들은 방지되어야 하는데, 이들 관념은 우리를 어디에도 데려가지 못합니다. 저는 생태적 레닌주의 또는 룩셈부르크주의 또는 블랑키주의 같은 관념들로 실험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태정치에 있어서 맑스주의의 약점은 현재 국면에서 맑스주의가 갖는 거의 보편적인 약점(즉, 해양의 산성화와 여타의 것과 더불어 인류 위기의 한 증상)과 떼어놓을 수 없음이 당연합니다.
RP: 「온난화 세계에서의 혁명(Revolution in a warming world)」이라는 글에서 당신은, 임박한 파국을 막기 위한 혁명의 긴급성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레닌을 동원한 후에, “화석연료를 내려놓기 위한 온갖 종류의 사회운동을 끌어들이는 모든 동맹에서” 기후 운동이 중핵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당신이 기후 운동에 부여하는 이런 헤게모니적 역할을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기후 운동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생태적으로 재조직하려면 노동계급에 의한 산업적 생산수단의 재전유(맑스주의적 환경정치를 위한 자연스러운 축인 것처럼 보입니다)가 중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당신은 그 역할을 어떻게 부각하시겠습니까?
AM: 이 점에 관해서는 제 동지 매트 후버(Matt Huber)가 저보다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의 작업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원문: 사물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