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들이 KBS 본관 앞에 모여 사장과 보도국장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지난 목요일 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올 것이 왔다”였다. 비단 김시곤 보도국장의 발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고 직후부터 지상파 방송사들이 보여준 보도행태와 간헐적으로 튀어 나온 관계자들의 발언은 이미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당일 유가족의 항의 방문은 그런 분노의 응결이자 필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음을 잊어버린 언론
사고 직후의 ‘전원 구조’라는 결정적 오보부터, 대책본부의 부정확한 실종자/사망자수의 확인 없는 전달, “뒤엉킨 시신들”이라는 무책임한 보도까지, 세월호 참사의 현장 보도는 철저히 관찰자의 시선으로 채워졌다.
세월호 보도의 문제는 ‘정치적 공정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종자가 300명이 넘는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그 긴박함의 현장에서 언론은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했는가의 문제였다. 사고 발생 직후, 승객들의 가족을 비롯한 모든 시청자들의 관심은 사고 현장의 생생한 그림이나 구조된 이들의 인터뷰가 아니었다.
300명이 넘는 승객들이 아직도 배 안에 있는데, 왜 구조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는지, 남아 있는 승객들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해경을 비롯한 정부의 구조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등의 ‘대책’과 ‘문제점’에 대한 보도였다.
그럼에도 어떤 언론과 기자들도 가족과 시청자들의 다급한 목소리보다 늘 그랬듯 취재원의 확보와 속보의 타전에만 집중했다. 한마디로 어떤 기자도 “왜 이렇게 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가족과 시청자들의 의문 뿐 아니라, 자신들이 현장에서 느낀 숱한 의문조차 묻어 버렸다. 물음을 잊은 기자들은 하루 종일 방송되는 ‘뉴스특보’라는 방송 시간대를 메울 재난의 아이템만을 찾기 바빴다. 구조 현장은 스포츠 경기처럼 “중계”되었고, TV 화면은 어디를 돌리던 “재난의 스펙터클”로 채워졌다.
언론, 그들만의 세상
KBS 김시곤 전보도국장이 “교통사고 사망자수”를 떠올린 것은 이런 시스템에서 놀랄 일이 아니었다. 갈피를 못 잡는 구조 활동에 대한 승객 가족들과 시청자들의 답답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중요하지 않았다. 긴박한 위기의 순간에 속보를 타전해야 한다는 의무감, 침몰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추측, 현장에 가지도 않은 ‘전문가’와의 인터뷰 등 일반적인 사건사고 보도의 관행이 그대로 이어졌다.
가족과 시청자는 잊혀졌고,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만의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시곤 전국장의 발언처럼 사망자와 실종자들은 소중한 하나하나의 개인들이 아니라 비교되고 분석되어야 할 숫자에 불과했다. 현장과, 아니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사회와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이러한 “격리”는 세월호 보도에서 비로소 그 심연을 드러냈다.
기자들도 누군가의 부모이며, 자식이라는 평범한 사실이, 언론이라는 또 다른 세계 속 ‘언론인’이라는 오만한 관찰자의 지위 속에서 잊혀져 버렸다. 오로지 기자란 채근하는 데스크의 지시를 수행하고, 쏟아지는 미확인의 정보들을 전달하기 바쁜 “보고자”이자, 어떤 물음도 던지지 않는 “구경꾼”일 뿐이었다.
안산 분향소의 유가족들이 KBS 본관으로 향했을 때 마주한 것은 바로 이런 전혀 다른 세상, 언론만이 살고 있는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숫자에 불과한 유가족들이 면담 요청에서 최초 통보한 인원수와 맞지 않는다며 거부당했고, 거기에 출입증 작성까지 요구받은 일은 그들의 세상에서 라면 당연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공공성
KBS에 대한 분노는 비단 KBS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그들만의 세상과 우리들의 세상을 분리시키고, 우리의 세상을 지켜보며 충고해 왔던 모든 언론들에 대한 분노가 우리의 수신료로 운영된다는 KBS로 향했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언제부터인가 언론은 그들의 세상에서 우리 세상의 위기를 지켜보고 진단만을 내려왔다. 1997년 외환위기로 불어 닥친 폐업과 실업의 행진 속에서, 구제역으로 전 국토가 가축들의 무덤이 되어갈 때에도, 광우병 뿐 아니라 의료 민영화와 4대강, 입시 교육 강화 등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할 때에도 그랬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공공성”이란 국가 재정을 털어 시혜처럼 베푸는 복지 제도나 공공 인프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우리”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를 마주하여 이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바로 공공성의 장이며, 소위 언론의 공적 책무이다.
“여러분의 소중한 수신료로 운영”된다는 KBS는 바로 이런 공공성의 의무에서 가장 일선에 선 방송이다. 이런 공적 책무는 보수/진보라는 어설픈 이분법의 정치적 편향을 요구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KBS는 지난 시기 우리의 위기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 시민 공동체의 위기와 닥쳐올 공포를 마주하고도 이들은 구경꾼이자 보고자였을 뿐, 위기의 이유와 대처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니 적어도 공동체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토로할 최소한의 장조차 만들지 못했다.
“당신들의 위기가 정말 우리의 위기인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KBS 떠나 청와대로 향한 것은 다시 한 번 그들만이 세상이 어디까지인지의 경계를 보여주였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우리는 유가족들과 함께 그들의 세상 또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KBS는 유가족과 사장의 만남 의사를 유가족이 아닌 청와대에 전달했고, 청와대는 보도국장의 해임을 포함한 “최대한의 노력”을 부탁했다. 사퇴를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김시곤 전보도국장이 말한 “독립성”의 침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만의 세상에 누군가가 간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KBS와 정권 또한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들의 위기는 사는 세상이 다르기에 우리의 위기가 아니다. 정권 유지에 대한 불안, 자신들의 자리를 보전하려는 절박함, 수신료 문제와 광고 수익 감소라는 위기가 그것이다. 이런 위기에서 그들 또한 탈출구를 찾고 있다. 내각의 전면 개편, 대국민 사과, KBS의 독립성 보장 등등의 숱한 대안들이 제출될 것이다.
그러나 애초의 위기가 우리의 위기와 달랐기에, 그들의 탈출구 또한 그들만의 탈출구일 뿐이다. 침몰해 가는 배에서 생사의 위기가 아닌 책임과 회사의 위기가 더 중요했고, 그래서 그들만이 아는 통로로 탈출했던 선원들처럼 말이다.
KBS를 비롯한 이른바 “공영방송”이 위기에 처했단다. 그러나 그 위기는 방송사의 위기인가, 아니면 우리의 위기인가? 고통을 토로할 곳도, 어떤 탈출구도 찾지 못해 청와대 앞 아스팔트에서 자식의 영정을 들고 하염없이 앉아 있던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았는가? 이것이 “우리들의 위기”라면, 당신들의 위기는 우리의 위기와 얼마나 잇닿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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