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갈 때면 남들의 캐리어를 유심히 보곤 한다. 공항에서 흔히 생기는 지루한 대기시간을 캐리어 컬렉션을 보면서 달래곤 한다. 공항을 런웨이 삼아 알록달록 예쁜 캐리어를 끌고 경쾌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걸음걸음마다 설렘이 뚝뚝 떨어진다.
도착해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 캐리어가 나오길 기다리면서도 각양각색의 캐리어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과연 그 안에는 어떤 물건들이 담겨 있을까? 상상해보는 건 마치 마트에서 남들이 끌고 가는 카트를 훔쳐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재미가 담겨 있다. 그러다 위대한 훈장이라도 단 것처럼 바코드 발권을 하고 짐을 보낼 때 붙여주는 스티커들이 가득 붙은 캐리어를 볼 때면 흠칫 놀라곤 한다.
저 캐리어의 주인은 지금까지 여행 운이 참 좋은 사람이었구나 싶다. 낯선 땅에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캐리어와 내가 떨어져 멘붕을 경험해본 사람은 안다. 저 덕지덕지 붙은 바코드들이 ‘나 여행 좀 다녀왔다’는 훈장에서 일순간 내 캐리어를 삼키는 블랙홀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출장으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갔을 때였다.
바오밥 나무 거리로 유명한 모론다바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수도인 안타나나리보, 일명 타나로 돌아갈 때였다. 육로로는 12시간이 넘는 거리라 일정이 빠듯한 우리는 좀 비싸더라도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공항으로 향하기 직전, 우리 팀은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과 마주했다.
일이 꼬여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고, 모두가 정신없이 상황을 수습하는 사이 우리의 캐리어는 본진과 함께 비행기가 먼저 싣고 타나로 떠나 버렸다. 공항의 대기 시간까지 알뜰하게 사용해 업무를 처리해야 했던 후발대 K-일개미들이 만든 참사였다. 우리 일을 하는 사이 현지 가이드가 먼저 와서 발권하고 짐을 부쳤다.
그런데 돌발 상황이 생기면서 결국 이렇게 일이 꼬일 대로 꼬여버린 것이다. 겨우 상황을 수습한 나를 기다리는 건 모론다바 공항의 굳게 닫힌 셔터 문이었다. 이제 막 퇴근을 하려는 공항 직원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한 우리에게 “오늘 비행기는 더 이상 없으니 내일 오전 비행기를 타는 방법밖에 없다”라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단전 끝에서부터 격한 감정과 진한 욕들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우리는 맨몸으로 모론다바에서 하룻밤을 더 머물러야 했다. 급하게 숙소는 구했지만 갈아입을 옷은커녕 안경도, 클렌징폼도 하나 없는 상태. 세안 용품, 화장품, 옷 등등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물품은 수중에 단 한 개도 없었다. 대신 노트와 필기구, 자료만 담긴 A4 용지 뭉치가 내 팩백에 가득했다.
절망에 빠진 나를 안타깝게 여긴 팀장님은 없는 돈을 털어 공항 앞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바오밥 나무가 그려진 면티 한 장을 사주셨다. 잠잘 때라도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꼬질한 옷 대신 입으라는 마음의 선물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한 줄기 희망 같은 바오밥 나무가 그려진 티셔츠를 안고 터덜터덜 숙소로 향했다.
도착한 숙소는 프랑스인 할아버지가 소유주라는 오래된 리조트였다. 주인의 연식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바닷가 근처라 침대에는 습기가 가득했고, 바닥에는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 속에 딸려 들어왔을 바닷모래들이 꺼끌꺼끌하게 남겨져 있었다.
열악한 전력 사정 때문에 수시로 정전이 됐고, 에어컨 대신 붙어 있는 실링 팬은 돌아갈 때마다 끼익 끼익 야생 동물의 울음소리가 났다. 현지 가이드가 간단한 세면용품이라도 구하려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해는 이미 졌고, 아프리카 시골 동네 구석에서 우리가 원하는 공산품을 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칫솔도, 샴푸도, 린스도 바디 샤워도 없으니 욕실에 있던 동전만 한 비누 하나로 겨우 땀으로 찌든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다.
19세기에나 썼을 법한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자물쇠를 제외하면 그 어떤 잠금장치도 없는 리조트의 방. 창문 밖에서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밤새 들려왔다. 귀곡산장 뺨치는 그 분위기에 홀로 침대에 누우니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상상들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공포와 짜증이 뒤섞인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새 잠옷이 되어준 바오밥 나무 티셔츠를 제외하면 땀에 찌든 어제 입었던 옷에 다시 몸을 구겨 넣고 조식을 먹는 레스토랑으로 나갔다.
제법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적지 않은 팀원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비쳤다. 예상치 못한 불시착 때문에 다들 잠을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인지 꺼칠한 게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긴말은 하지 않았지만 1분 1초라도 빨리 샴푸, 린스, 바디 샤워로 씻고 뽀송한 새 옷에 몸을 넣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이 우리의 찌든 몸과 마음 사이로 관통했다.
인생은 늘 돌발변수와의 싸움이다.
모잠비크 해협에서 불어오는 모래가 뒤섞인 스크램블드에그를 영혼 없이 씹으며 다짐했다. 언제 어떻게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낯선 땅에 갈 때 1박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상 물품은 항상 내 몸에 지니고 살자. 캐리어와 내가 생이별을 한다고 해도 사람의 몰골은 유지할 수 있는 생존 파우치를 만들었다.
그 안에는 샴푸, 린스, 바디 샤워, 클렌징폼을 합친 올인원 세안제, 일회용 렌즈, 속옷, 치약 & 칫솔을 꼭 챙겨 넣었다. 공산품 수급이 쉽지 않은 제3세계에 갈 때는 무조건 생존 파우치부터 제일 먼저 백팩에 챙겨 넣었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무엇보다 캐리어와 떨어질 일 자체를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불필요한 여지가 될 작은 꼬투리도 사전에 차단했다.
그중 제일 먼저 한 일이 캐리어에 있던 바코드 스티커를 떼는 일이다. 한때 나도 그게 ‘나 비행기 좀 타봤다’고 으스댈 수 있는 여행력의 증표가 되는 줄 알았다. 캐리어 분실 혹은 지연 사고를 최신식 공항 시설을 갖춘 곳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오지를 다닐 때는 더더욱 위험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캐리어 커버를 씌웠다. 흔하디흔한 실버 컬러의 하드 캐리어를 누가 자신의 것인 줄 알고 가져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그리고 짐을 부치기 전에는 꼭 캐리어 사진을 찍었다. 혹시 분실하더라도 빠르게 찾기 위해 마지막 증거 사진을 남겨 두는 것이다. 분명 귀찮고 복잡하지만, 캐리어와 생이별을 했을 때의 멘붕과 번거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방심하지 말자. 지금까지의 여행이 운이 좋았다고 앞으로의 여행이 운이 꼭 좋다는 법은 없다.
인생은 늘 돌발변수와의 싸움이다. 나는 아닐 거야 방심하는 순간, 돌발변수는 늘 내 삶에 무단 침입한다. 그래서 언제 어떤 변수가 닥칠지 모르니 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한다고 해도 변수는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세력을 과시하며 내 코앞에 다가온다. 어차피 벌어진 일 앞에 우왕좌왕하기보다 우아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현명하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