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을 하얗게 불태운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동안의 수고로움을 격려하는 쫑파티 자리였다. 며칠째 제대로 누워 잠을 자지 못해 쫑파티고 나발이고 집에 들어가서 못 잤던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게 될지 모를 이들에게 끝인사를 전하기 위해 꺼져가는 영혼의 불꽃을 겨우겨우 잡고 버티는 중이었다.
새벽 4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술기운이 가득한 선배의 한 마디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피로에 취했는지, 술에 취했는지 아니 어쩌면 짜증에 취했을지 모를 선배의 한 마디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겨우 그거 하나 하면서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냐?
본인 능력만 된다면 2–3개의 일을 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프리랜서 세계에서 만난 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1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잊지 않고 나를 불러주는 늘 고마운 선배다. 내밀한 개인적 성향이 찰떡처럼 잘 맞는다기보다 일 관련 부분에서 큰 트러블이 없었기에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일을 할 수 있었다.
선배가 큰 그림을 그리면 나는 성실하게 실행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선배가 불이라면 나는 물이었고, 선배가 돌진하는 불도저라면 나는 세밀한 빗자루였다. 성격도 성향도 다르지만 서로가 가지지 않은 부분을 채워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배는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일로 만난 사이이기 때문에 선배는 당연히 나를 일로 평가할 수 있는 존재였다.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일상인 선배의 눈에는 겨우 프로젝트 하나만 하면서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한심해 보였을지 모를 일이다. 술이 들어가긴 했지만 주사를 부릴 만큼 취하진 않았고, 그간 마음에 담아뒀던 마음의 소리가 나올 타이밍에 더 가까웠다. 얼큰하게 술이 오른 사람들의 수다 소리에 뒤섞여 흘러가 버린 말… 하지만 선배의 그 한마디는 비몽사몽 상태인 나를 정신이 번뜩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의 땀과 노력을 쉽게 평가 절하했던 건 아닐까? 사람마다 그릇이 다르고 목표도 다른데 나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인 양 오만하게 평가했던 건 아닐까? 편협한 경험에 기댄 내 잣대에 주변 사람들을 욱여넣으려 애쓰고 살았던 걸까? 이런저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취객들의 소음이 가득한 술집 한가운데에서 망망대해의 섬처럼 둥둥 떠서 꽤 오래 생각했다.
2020년이 밝고 나는 한 살 더 먹었다.
어른이 되면 넓은 시야와 혜안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건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생기는 건 아닌가 보다. 여전히 나는 모자라고, 그 부족함을 매일매일 무언가로 채워가는 중이다. 웃음 좋은 붕어빵 장수 아저씨의 덤에서 마음의 여유를. 쓰레기 봉지를 찢던 길고양이의 눈빛에서 여유 없는 삶의 고단함을. 연남동 골목의 카페에서 맛본 스콘에서 작은 행복의 가치를. 흰 눈 속에서 피어난 빨간 꽃을 노래한 어느 가수의 신곡 가사에서 삶의 역설과 성장의 가치를. 깨닫고 배운다.
며칠 전,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만나 연말에 바빠서 미뤄둔 송년회를 겸한 신년회를 가졌다. 때가 때이고 한 살을 더 먹은 만큼, 먼 훗날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얘기할 기회가 왔다. 출산을 앞둔 누군가는 자신 삶의 우선순위가 아이가 아닌 늘 당당한 자신이 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다사다난한 연애를 이제 막 끝낸 누군가는 나 아닌 누군가에 내 삶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내면의 힘이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또 늘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누군가는 로또 1등에 당첨되어 건물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당당히 말했다.
귀엽고 현명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
세기가 기억할 위인이 될 생각도 없고, 역사에 기록될 업적을 남길 능력도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살면 귀엽고 현명한 할머니가 되는 게 그리 불가능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오만과 편견은 한강 물에 내던져 버리고 생각과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살다 보면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이 쌓이지 않을까? 그런 시간이 쌓이면 뭐 대단한 지혜를 갖추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적어도 상대방의 열심과 노력을 “겨우 그거 하나 하면서 힘들다고?”라는 말로 함부로 폄하하는 사람은 되지 않을 자신은 확실히 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젊음은 이미 내 손을 떠난 지 오래고, 내 인생과 내 인상이 어떤 결실을 보게 될지 서서히 윤곽을 잡아야 할 시기가 왔다. 목표는 정해졌다. 귀엽고 현명한 할머니라는 내 인생 마지막 캐릭터라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그리고 힘차게 걸어야겠다.
원문: 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