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왔던 나의~ 수줍은 마음 모두 내게 줄게~
이 익숙하고도 치명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기어코 삼순과 진헌 사이엔 일이 생긴다. 지난 2005년 여름, 나는 마치 삼순의 친동생이라도 된 양 그녀가 울면 울고 웃으면 웃으며 뜨거운 나날을 보냈다. 무려 50%의 시청률을 웃돌며,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연애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당시 스물한 살의 내 눈엔 오로지 김삼순과 삼식의 투닥거리는 연애사만 보일 뿐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설정도 난무했다. 공식 웹사이트 등장인물 설명란에는 그녀를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으며 젊지도 않은 엽기 발랄 노처녀 뚱녀’로 소개한다. 급기야 고작 서른 살인 삼순을 두고 결혼하지 ‘못한’ 여자로, 집에서는 ‘치워야(시집을 보내야)’ 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그녀가 ‘희진’으로의 개명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이름 때문에 꽤 놀림을 받아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른 살의 노처녀라니, 거기에 대놓고 외모 비하를 일삼다니, 2020년인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설정이다 싶은 걸 보면 세상이 달라지긴 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김삼순은 당당히 살아갔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시청자의 폭발적인 공감과 지지를 끌어낸 캐릭터로 회자되곤 한다. 마찬가지로 삼순의 삶의 태도는 나의 20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때문에 지금도 종종 드라마를 다시 보곤 한다. 그러다 어느덧 내 나이는 극 중 삼순의 나이인 서른을 훌쩍 넘기고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그들의 연애사 말고 다른 것들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드라마가 방영되던 2005년 당시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파티시에’라는 직업을 가진 그녀는 (아버지의 부고로 갑작스레 돌아오긴 했지만) 프랑스의 명문인 르 꼬르동 블루에서 수학한 제과 분야의 인재였다. 전공을 살려 굴지의 호텔에서 파티시에로 근무하던 중에 바람을 피운 전 남자친구를 응징하려고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에 결근했다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 후 그녀의 케이크를 즐겨 찾던 호텔 단골의 발길이 끊길 정도였다는 걸 보면 그녀가 훌륭한 파티시에였다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게다가 까칠하기로 정평이 난 진헌이 그녀의 망고무스의 맛에 반해 자신의 레스토랑의 파티시에로 채용하려고 안달이 났으니 실력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드라마는 주로 왈가닥인 모습을 바탕으로 에피소드를 풀지만 가끔 그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도 비춰준다.
새벽녘 홀로 출근한 삼순이 커다란 오븐을 켜고 본인의 레시피북을 들여다보는 진지한 모습이 예뻐서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치여 힘들어하는 막내 동료에게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으로 전한 진한 위로는 나도 언젠가 꼭 써먹어야겠다고 수첩 어딘가에 적어두기도 했다. 비로소 삼순의 연애에만 열광했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커리어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모든 건 그녀 나이 고작 서른에 일어난 일이다.
이 때문인지 스물한 살의 나는 서른이 되면 어떤 분야에서 어떤 형태로든 커다란 한 획쯤(?)은 긋고 있을 줄 알았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노트북을 켜고 일하는 데에 열중인, 수시로 임원과 독대하면서 큰 건을 성사하고 아래로는 여러 직원을 거느리며 프로젝트 하나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이 당연한 것인 줄만 알았다.
서른 중반에 들어선 현재의 나는 일과 중 점심시간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다. 그렇다고 또 아예 풋내기는 아니고 삼순의 서른 살 만큼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성장하긴 했다만, 곱씹어볼수록 그녀가 서른 살에 이룬 업적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다. 사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내가 삼순의 서른 살을 남달리 여기는 건 직업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다.
‘인생은 봉봉 오 쇼콜라가 가득 든 초콜릿 상자’라는 그녀는 종종 자신의 삶을 달콤하고 쌉싸름한 디저트에 비유하곤 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 손님 면전에 마르키즈 글라세(Marquise glacée)라는 아이스크림의 어원을 읊으며 점잖게(?) 잘못을 응징할 정도의 위트와 지식을 지니기도 했다.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상이지만 하얀 작업복으로 갈아입으면 그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한다. 디저트를 만드는 순간만큼은 그녀가 완전무결한 행복을 느끼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며, 이 순간을 통해 그간 겪은 시련이나 실연을 극복해왔음을 고백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파티시에라는 직업을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으며 열정이 넘쳐났다. 이는 곧 삶을 향한 그녀의 낙천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나도 한때는 삼순처럼 직업이 나의 가치관과 삶에 투영되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는데, 그런 경우가 드물다는 걸 깨닫게 된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리고 웬만한 실력이나 열정이 아닌 이상 직업이 삼순처럼 자신의 삶에 녹아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말이다.
홈베이킹을 시작하게 해준 삼순
내가 홈베이킹을 시작하게 된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실 이런 삼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삼순이 베이킹을 통해 아픔을 치유하는 것처럼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기왕이면 믿을만한 재료로, 내가 좋아하는 걸 잔뜩 넣은 빵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설픈 솜씨로 밀가루와 설탕, 버터 등을 한데 섞어 오븐에 구워내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놀라울 만큼 흥미를 느꼈다. 부풀지 않아서 고생깨나 했던 우리밀에 유정란과 풍미가 좋은 버터를 넣어서 나만의 빵을 만들 수 있어서 뿌듯했다.
간단한 스콘을 시작으로 급기야 케이크까지, 완벽하진 않지만 꽤 그럴싸한 결과물을 내었다. 우리밀로 만든 빵이라 퍽퍽한 감은 있지만 소화가 잘되어서 먹기에도 좋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버터와 노른자가 분리되지 않도록 실온에 녹인 버터를 사용하고 반드시 천천히 저어야 한다는 것쯤은 유튜브를 통해 배웠지만, 그 원리를 알고 싶은 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렇게 나는 제2의 삼순을 꿈꾸며 빵을 더 깊게 배워보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배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한 취미가 아닌 언젠가 업으로 삼아보겠다는 호기로운 각오로 제빵 전문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버터와 설탕이 든 단 빵을, 이후 3개월 동안은 오로지 밀가루와 물, 소금, 그리고 직접 만든 르뱅(천연효모종)만으로 만든 바게트와 깜파뉴를 구웠다. 이스트가 아닌 르뱅만 가지고 빵을 부풀리는 과정은 정말 어려웠다.
커다란 반죽통에 재료를 한데 넣어 믹싱하면 굵은 소금 덩어리가 녹아 반죽에 스며들고 어느새 반죽은 단단해진다. 반죽을 꺼내어 발효실에 넣고 한 시간 반을 기다리면 단단했던 것이 약간 부풀어 오르는데, 이때 ‘펀치’라는 과정을 통해 반죽 속 이산화탄소를 빼주고 위아래 방향을 바꿔 온도를 균일하게 해 준다. 다시 모양을 동글려서 2차 발효의 과정을 거치면 반죽은 한껏 부풀어 올라있다. 발효 시간이 길면 길수록 빵의 풍미는 더 좋아진다.
다음으로 반죽을 분할하고 원하는 모양으로 성형한다. 그러고 나서 바로 굽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발효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빵 하나를 제대로 굽기 위해서는 꼬박 하루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시간과 온도마저 빵의 중요한 재료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이스트를 넣으면 모든 과정이 간단해지지만 르뱅으로 만든 것보다는 풍미가 덜하고, 개량제를 넣은 빵의 경우엔 소화가 잘되지 않고 속이 부대끼기도 한다.
주로 르뱅이나 액종(주로 말린 과일로 만드는 천연발효종)을 직접 만들다 보니 빵이 아예 부풀어 오르지 않아서 바게트가 뱀이 되거나 깜파뉴가 돌덩이가 된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이때는 마음고생 좀 했다. 내가 만든 빵이 남들 것에 비해 덜 부풀면 그렇게 속이 상하는 것이다.
같은 볼륨의 바게트여도 속을 자르면 기공이 균일하고 또렷한 모양인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듬성듬성해서 중간에 떡이 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기공이 바게트를 쫄깃하게 하거나 폭신해지는 식감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전날 르뱅과 섞어둔 전 반죽의 피크 타임을 잡아내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었다. 빵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에 반죽을 쳐야 풍미도, 모양도, 식감과 향도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갓 구운 빵이 가장 맛있다고 하지만 사실 빵의 풍미를 더 진하게 느끼기 위해선 하루 정도 숙성 후에 맛을 보는 것이 좋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더니 빵도 저들만의 타이밍이 있는 것이다. 먹을 줄만 알았지 빵마다, 계절마다, 들어가는 재료마다 다 다른 이 최적의 타이밍을 찾기 위해 베이커들이 얼마나 많은 빵을 구워냈을지 상상이나 한 적이 있나 싶다.
사워도우 고유의 맛을 잡아내는 것도 어려웠다. 나의 르뱅은 유독 신맛이 강했는데, 빵을 갓 구웠을 때 맛을 보면 매우 시큼했지만 다행히 하루가 지나면 산미가 약해지고 맛이 더 좋아졌다. 밀가루의 종류, 원산지 등에 따라서도 빵의 성질과 맛이 달라져서 적절한 타이밍 외에도 재료의 특성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수업 전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빵의 모양을 잡는 성형도 늘 난관이었다.
공부는 하루 이틀이면 일정량을 흡수하기라도 하는데, 빵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술이 그런 것 같다. 늘 쉽게 사 먹던 빵이 그 가게 주인의 기술과 노하우가 깃든 일종의 집약체라는 것을 정말이지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빵을 배우고 나니 갈 길이 한참 멀었다는 생각에 잠시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디저트 분야에서만큼은 최고의 명성과 실력을 쌓은 서른 살의 삼순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을 치열한 과정이 눈앞에 펼쳐졌다.
헌진과 전 여자 친구의 재결합 소식을 듣고 홀로 돼지껍데기에 소주를 게걸스레 들이켜다가도, 실연으로 힘들어하면서 심장이 딱딱해지면 좋겠다고 펑펑 울면서도,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최고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한 삼순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서른다섯이 되고 나서야 새삼 파티시에로서 삼순의 직업관과 커리어가 보인 것이다. 그런데 왜 정작 드라마가 방영되던 십오 년 전 나는 이런 삼순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삼순이 파티시에로서 어떤 커리어를 쌓아갔을지 궁금해하던 차에 드라마는 끝이 나고 말았다. 드라마의 마지막은 그녀의 디저트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만든 빵처럼 고소하고 담백했다. ‘3년 뒤, 우리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뻔한 결말이 아니었다. 진헌의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간밤에 삼신 할매가 나타나 점지해주길 바라긴 하지만 그들의 꿈일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진헌과의 연애를 이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삼순은 파티시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케이크 가게를 차린 것이다.
얼마 전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문득 그녀가 삼식과, 혹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지, 아이를 낳을지 하는 것보다 그녀의 케이크 가게가 어떻게 되어가는지가 궁금해졌다. 아마도 때론 그도 사람이기에 파티시에라는 직업에 지치기도 하고 권태를 느끼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달콤한 기쁨을 전하지 않을까 싶다. 가게는 매일같이 그녀의 실력과 열정을 알아본 사람들로 꽉 차서 발 디딜 틈 없이 말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마치며
지난 6개월 동안 일요일마다 빵을 구웠습니다. 수료식을 앞두고 얼마 전 오랜만에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다가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순과 삼식이 알콩달콩 하는 장면보다 삼순이 디저트를 만드는 장면을 더 유심히 보게 됐습니다. 그녀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저도 빵을 구우면서 그녀처럼 행복을 느꼈거든요. 그리고 빵을 굽는 냄새보다 반죽이 발효하는 냄새, 한껏 부푼 반죽의 촉감이 너무너무너무 좋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를 마치고 어떻게 하면 배운 기술을 숙련시키고, 여기에 금강밀, 조경밀, 앉은뱅이밀 혹은 어느 농부의 어느 우리밀로 빵의 풍미를 최대치로 어떻게 끌어낼지 고민합니다. 그래서인지 새삼 최고의 디저트를 만들기 위한 삼순의 노력과 열정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요즘입니다.
겨울이지만 유독 춥지 않은 나날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달래, 냉이 등 봄나물의 대명사로 알려진 식자재가 예년보다 일찍 밥상에 올랐습니다. 교과서에서만 보고 느끼던 기후변화가 새삼 피부로 와 닿는 느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디 지구 반대편 호주의 산불도 속히 진압되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맛있는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원문: 오가닉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