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잘 쉬고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물어보고 싶다. 최근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나 죄책감 없이 편하게 쉬어본 적이 있냐고. 아니,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나에게 묻는다면, 그런 적 없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도 그렇다. 요전 날 가족과 다녀온 여행에서도 나는 회사 이메일을 열었고, SNS를 수시로 들여다봤으며,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은 뒤로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한 고민을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버무리곤 했으니까.
잘 쉬지 못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면 나는 칼 구스타프 융의 ‘집단 무의식’을 떠올린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외부로부터 무수한 공격과 침략을 받았으나 그것을 이겨냈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내며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민족. 그렇기에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뭐든지 빨리빨리 해내야 하는 기질은 우리 정서 깊숙하게 인 박여 있다.
여행을 가더라도 어느 한곳에 유유하게 있기보단, 유명한 어느 곳은 반드시 찍고 와야 한다는 목표 의식에 갇힌 모습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니 우리는 잘 쉴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제껏 쉰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그래서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신경 끄기의 기술』이란 책도 나왔다. 역시나. ‘기술’이란 말이 한국인에게 통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간파한 것이다. ‘기술’은 간단명료한, 그러니까 빠르게 습득할 방법이다. 서점가에 휴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있다는 것, 게다가 빨리 그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어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 모습을 보면 말 그대로 웃프다.
대치동에서 종일 학원에 다니는 부유한 집안 학생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일반 직장인 월급 이상의 돈을 들여 학원에 다니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어떤 대학을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대답. 부모가 그 인터뷰를 봤을지 모르겠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본질은 없고, ‘어떻게’ 하면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만 몰두한 결과다.
우리가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왜’ 보다는 ‘어떻게’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왜’는 방향이자 본질이며, 추구해야 하는 지향점이다. ‘어떻게’는 본질을 향해가는 수단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가 마치 종착역인 것처럼 산다. 수단과 본질이 전도되면 삶은 고달프다. 그러니 ‘어떻게 쉴까’라는 생각의 구덩이에서 나와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닉센’의 미학
‘Niks’는 네덜란드 말로, 영어로는 ‘Nothing’이란 뜻이다. 여기에 동사 접미어를 붙인 말이 ‘닉센(Niksen)’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목적이나 목표를 두지 않고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한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의 ‘멍 때리기’와도 같을지 모르겠다. 미국 타임지는 이 닉센에 주목하고 여러 기사를 써냈다. 이민자의 개척정신, 자본주의 색채가 짙은 미국 사람들도 얼마나 분주하게 살아왔을까.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주재원으로 있던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국 회사 소속이라 그곳에서도 정신적·육체적으로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건 점심 먹고 걷던 길에서 만난 풀을 뜯는 양과 갓길에 피어난 꽃들, 저 멀리 유유하게 아기를 태우고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한 대, 물결에 따라 흘러가는 운하 위의 보트들. 과연 ‘닉센’은 일상 그 자체로 거기에 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상을 유유하게 살자고 다짐하지만 그건 쉬운 게 아니다. 기질이 그렇지 않고, 환경도 다르다. 똑같이 따르려 하다간 또 ‘왜’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기 십상일 것이다. 다만, 본질을 생각해보면 ‘닉센’의 미학을 떠올려 조급하지 않게, 목표의식 없이 쉬다 보면 진정한 쉼에 조금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아주 잠깐 쉬더라도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나 죄책감 없이 쉬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늘어지게 잤다면 하지 못한 걸 후회하는 게 아니라, 그 달콤한 느낌에 충실해 보는 것. 통근 버스에서 휴대폰으로 회사 이메일을 열기보단 창밖에 지나가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 여행지에서 군데군데 여럿을 찍기보단 어느 한곳에 머물러 깊은숨을 들이마셔 보는 것 등.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의 회귀다. 숨 가쁘게 달려온 어느 날, 정작 나 자신은 저 멀리 뒤에 놓고 왔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닉센’은 그렇게 오늘 잠시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자신을 챙기라는 묵직한 메시지가 아닐까.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 『직장내공』
-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