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연애가 있다. 소개받고, 썸을 타고, 사귀고 나서 당분간은 매우 좋은 관계. 그러나 사귀기 초반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다툼이 이어지는 그런 관계가 있다. 왜 우리는 사귀기 전에 그 혹은 그녀의 실체를 알 수 없었던 것일까? 그들은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자신을 포장했던 것일까?
물론 우리 모두는 다소간 멋지고 예쁜 모습을 꾸며내고 상대에게 구애한다. 그러나 오늘 다루려고 하는 그들의 실체는 그들이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숨긴 모습이 아니다. 관계를 시작하고 나서, 상대방이 그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 잡을 때 나타나는 모습일 뿐이다. 숨긴 게 아니라 그 모습이 드러날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내면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녀 혹은 그의 모습이 다음과 같았는가? 혹은 당신이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이런 모습을 보여왔는가?
- 지나치게 많은 기준. 상대방에겐 딱히 없는 기준이 그 사람에게는 너무 많으며, 그걸 다 지켜주길 바란다.
- 완벽주의 성향. 뭔가를 미친 듯이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쉬엄쉬엄하라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 중립적인 말에서 어떻게든 부정적 요인을 찾아내서 상처 입는다. 그렇게 해석할 여지는 1%도 안 되지만, 굳이 그렇게 해석한다.
-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무조건 상대방이 모든 걸 잘못했다고 주장한다.
- 지는 것은 절대 안 되며, 논리가 통하지 않으면 ‘너도 똑같이 잘못했잖아’라는 결론이 난다.
- 강박적 행동이 보인다. 보통 ‘그 정도까지 하나?’ 하는 것을 1개 이상 한다.
- 자기의 친구나 전 애인과 비교해 상대를 비교하고 지적한다.
- 과거의 연애가 보통 짧게 끝났다는 경험이 있다.
- 주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많은 상처와 스트레스를 겪는다.
- 이혼, 바람, 지나치게 엄격한 어머니 혹은 아버지, 방임하는 부모님 등 가족 내 문제가 있다.
- 상처 되는 말을 다 쏟아내지만, 그 말을 똑같이 돌려줄 때는 더 큰 일이 일어날 게 뻔하다. 그래서 보통 맞춰주는 쪽이 똑같이 하고 싶어도 참는다.
- 일단 상처받은 후 상대가 인지하지 못할 때 갑자기 사과하라고 한다. 미리 어떻게 해달라고 말해달라 부탁해도 듣지 않는다.
- 보통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솔직하지 못하다.
- 선물을 주는 등 이벤트는 멋진 시나리오가 중요하지, 상대방을 위함이 첫 번째가 아니다. 그 시나리오가 잘못되면 되레 상대방에게 비난을 가한다.
- 긴장과 불안 두려움이 기본 감정이다. 울기도 잘 운다.
- 그저 특정 행동에 신경 써달라는 말에도, 자기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 컨트롤이 되지 않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상대가 예상 시나리오 안에서 활동하길 바라며, 반대로 그런 대우를 받는 건 엄청 싫어한다.
- 원하는 게 있어도 말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알아서 해주길 바란다. 그것 역시 자기가 세운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읽고 원하는 걸 딱 해준다’는 완벽한 시나리오에 해당한다.
- 상대방의 잘해주기 위한 노력은 자기가 세운 기준에 노력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 약물, 술, 음식, 설탕, 담배, 카페인 등 물질중독.
만약 이 리스트에 해당하는 모습을 상대방이 보였다면, 이 글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상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연애할 때 혹은 평소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다음의 내용이 당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면아이와 성인자아의 유대 관계가 나쁜 그들
『내면아이의 상처 치유하기』를 쓴 마거릿 폴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두 가지 자아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감정을 우선하고, 직감적인 본능을 담당하는 ‘내면 아이’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인 생각과 판단, 분석하고 실행과 관련된 ‘성인 자아’다. 복잡한 개념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내 안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역할과 성인처럼 행동하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내면적으로 건강한 상태는 이 내면아이와 성인자아가 건강한 유대관계로 이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내면아이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내비치고, 성인자아는 그것을 잘 듣고 존중하기 위해 실행한다. 나는 이것을 다른 말로 ‘자존감이 높은 상태’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상태’라고 칭한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예시를 살펴보자.
- 내면아이: 아 일이 너무 지루하다. 일하기 너무 싫다. 놀고 싶다. (감정과 욕구)
- 성인자아: 지루한 건 사실이지, 일하기 싫으면 한 시간만 열심히 하고 놀까? or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해, 여기까지 하고 내일 해도 돼 (판단, 분석, 실행)
위의 예시는 내면의 유대관계가 좋은 경우를 예시로 든 것이다. 내면 아이는 솔직하게 감정과 욕구를 밝히고, 성인자아는 이해하고 친근하게 실행할 방법을 묻는다. 반면, 내면의 유대관계가 좋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내면의 대화가 일어난다.
- 내면아이: 아 일이 너무 지루하다. 일하기 너무 싫다. 놀고 싶다.
- 성인자아: 네가 뭘 했다고 지루해해? 네가 못하니까 재미없는 거야, 오늘 어떻게든 끝내!
이는 보통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내면의 유대관계가 좋지 않으면, 성인자아가 내면아이의 감정과 욕구를 무시하고 나쁘게 평가하고 비난하며 압박을 가한다. 이 둘의 관계는 마치 인간관계처럼 오래도록 사이가 좋지 않으면 서로를 신뢰하지 않고 나쁘게 대한다.
그러면 내면아이는 더더욱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성인자아는 계속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내면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뭔가를 해내도 그다지 즐겁지 않은 상태가 이어진다. 내면 아이가 말해봤자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 욕구를 안 갖는 게 더 이득일 테니까.
위 리스트에서 보이는 모습을 가진 사람은 ‘내면의 유대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을 읽다가 또 ‘부정적인 평가 시스템’이 발동해서 ‘그래서 내가 부족하고 못나다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당신의 평가지 내 평가가 아니다. 우리의 자존감이 높았다 낮아졌다 하듯이, 유대관계도 나빴다가 좋아질 수 있다. 핵심은 문제를 인식하고 나아지고 싶느냐이다.
그들은 왜 사귀고 나서 바뀌는가?
우리가 태어나고 유아기일 때엔 본능과 감정에 해당하는 내면아이만이 존재한다. 아직 성인자아가 형성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성인자아가 없는 대신 이 성인자아에 해당하는 역할은 보통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미숙한 아이 었던 나에게 평가하고 분석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부모님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대다수는 부모님을 성인자아의 모델로 잡는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고,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공격해왔다면, 개인의 성인자아 역시 그 역할을 비슷하게 수행한다.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면아이는 칭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지만, 성인자아는 부모님이 그랬듯이 자기를 비난하고 평가하고 노력하라고 압박을 가한다. 내면아이는 계속 소외받고, 매번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성인자아를 신뢰하지 못하기에 자기 자신을 믿지 않으며, 그래서 전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지 못한다.
그러다 그들은 성인이 되고 불안정한 상태로 연애를 시작한다. 내면의 유대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은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성인자아를 신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 성인자아의 역할을 상대에게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인자아가 해줬으면 하는 그 역할을 상대방이 해주길 바란다.
이 역할의 전달은 연애 초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연애 극초반까지는 이 성인자아의 역할을 자신 안에서 수행하다가, 상대방을 믿고 마음을 놓는 순간 성인자아의 역할을 상대에게 투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실체를 초반에는 알 수 없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기존의 성인자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애인이 맡아도 상대를 성인자아처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기존의 자신이 자기에게 무관심했거나,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해 왔기 때문에, (성인자아 역할을 맡은) 상대방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어버린다.
여기에 더해 자기가 바라왔던 이상적인 성인자아의 역할을 애인에게 하라고 맘대로 정해 놓고,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내면아이가 상처를 입고 슬퍼한다. 즉 믿고 의지하고 싶으면서도 자기 자신처럼 신뢰하지 못한다.
위에서 다룬 사례 중 하나인 상대방의 중립적인 말에서 굳이 상처를 끄집어내는 것은 실은 자기가 평소 자신에게 하는 말 때문이다. 본래 자기 안에서 성인자아가 내면아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에, 성인자아 역할을 맡은 연인 역시 부정적인 평가를 할 거로 생각한다. 흔히 피해의식이라고도 한다. 마치 원수가 날 공격할 태세를 갖출 걸 예상하듯이, 그들은 자신이 공격받을 거라는 생각을 너무도 쉽게 가져버린다.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그 리스트에 있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과 만난다면
헛된 희망을 갖지 마라. 아주 작은 확률로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고 변화를 시작한다면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변화는 자기가 문제의식을 가질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신이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노력해도 상대의 변화 의지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임상심리 전문가, 정신과 의사가 와도 안 된다.
내면의 유대관계가 좋지 않은 그들은 당신으로부터 (주지도 않은) 상처를 입고, 자기방어를 더 견고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신은 피해자, 당신은 가해자가 될 것이다. 당신을 돌아봐라.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건 아닌가? 당신은 충분히 존중받고,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라면 결론은 명확하다.
2) 그 리스트에 있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 당신 많이 힘들었잖아. 연애 잘하고 싶잖아. 자기 자신도, 상대방도 온전히 사랑하고 싶잖아. 상처받고 싶지 않은 거 안다. 그러나 자기 보호 전략이 당신을 더 외롭게 만든다는 걸 알기를 바란다.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고치면 된다는 거지, 당신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다. 뭐만 이야기하면 자기를 공격하는 걸로 받아들이는 패턴을 바꿔라.
이제 자기를 그만 공격하고, 그만 보호하고, 상처를 돌보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자. 내면의 유대관계를 회복하자. 성인자아의 역할을 되찾고, 내면아이의 욕구와 감정을 소중하게 다루기 위해 행동하자. 자기 보호를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소중하게 여길 에너지도 그만큼 많다는 거다. 그걸 깨닫길 바란다. 당신을 구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자신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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