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협력계 뿐 아니라 해외사업에서 필요한 역량은 대략 세 가지 축으로 나눌 수 있다. 지역, 기능, 분야가 그것이다. 개발마케팅연구소가 개발한 ‘3각역량분석틀’로 설명해 본다.
위 그림에 나오는 세 축은 서로 직각이다. 방 귀퉁이처럼 생겼다고 생각하시라. 각 방향은 지역, 기능, 분야의 전문성을 표시하고, 원점에서부터의 거리가 그 분야 역량의 크기다. 즉, 멀리 갈수록 역량이 큰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역량을 이 세 축에 맞춰 평가했을 때 좁은 이등변 삼각형, 넓은 이등변 삼각형, 또는 정삼각형 등 삼각형의 모양이 한 사람이 가진 역량의 특성이다. 비록 개념적이기 이를 데 없지만서도 삼각형의 면적은 출발점에 선 사람의 역량의 크기다. 이 모델은 현재 보유한 역량의 특성을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장래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키워나갈 것인가를 계획하는 데 유용하다(조직에 주는 함의는 차원이 좀 다르다).
위 그림에선 안쪽의 작은 삼각형이 현재 역량이고, 바깥에 있는 파란색 삼각형이 미래의 역량이다. 시간이 흘러 넓어진, 미래에 당신이 가질 역량을 뜻한다. 여기서는 분야 전문성을 중심으로 성장한 모습이다. 각 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지역 전문성
특정 국가나 지역에 관한 통찰력을 말한다. 어떤 국가, 지역에 상당 기간 체류하면서 일을 해본 경험에서 시작한다. 개발협력계에서는 압도적으로 봉사단 출신이 강하다. 지역 주민과 교감이 잘 되고, 사업을 둘러싼 맥락을 정확하게 읽는 장점이 있는 반면, 특정 분야나 개발협력의 전문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지역 전문성을 키우는 공부는 주로 언어에서 시작하며, 역사, 문화, 사람 등등에 관한 깊이 있는 지식과 경험을 포함한다. 대학에서 주로 어학이나 인문학 전공한 분들이 주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기능 전문성
원래 기획, 영업, 관리, 재무, 법률 등 어떤 조직에서나 필요한 공통 역량으로, 개발협력계에서는 사업의 기획, 수행, 평가를 개발협력 문법에 맞게 진행하는 역량쯤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제안에서부터 정산에 이르기까지 실무처리에 필요하다.
주로 원조기관이나 개발NGO 직원 출신이 많으며, 대학원에서 개발협력을 전공하고 업계에 진입하는 경우는 거의 다 기능에 중심을 두었다고 본다. 적용 범위가 넒은 대신 사업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지역이나 분야에는 취약하다. 대학 전공으로 말하자면 상대, 법대 출신들이 주로 해당하며, 공대에서는 경영학과 취급받은 산업공학과 정도가 포함된다.
분야 전문성
보통 ‘산업’이라 일컫는다. 개발협력계에서는 흔히 섹터(Sector) 전문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교육, 보건, 농촌개발, 산업·에너지 등으로 분류되는 분야의 역량이다. 이런 분류법 외에 범분야라 일컫는 인권, 젠더, 환경에도 전문가를 가리킬 때는 분야 전문성이라 본다.
자기 분야에 강점이 있는 대신 다른 분야나 지역 축, 기능 축에 관심이 없으면 활용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주로 대학 졸업할 때 자격증 받는 공대, 의대, 사범대 등 출신자가 많다.
이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축은 무엇일까? 바로 분야 전문성이다. 사회적으로 그런 암묵적 합의라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업을 봐도, 정부를 봐도 그렇다. 모두 주류 조직은 분야를 중심으로 나뉜다. 그것을 보완하는 경영지원실, 인사팀, 재무팀, 법무팀 등이 기능 조직이다.
우리 개발협력계에서도 전문가라고 하면 일단 분야 전문가를 뜻할 때가 많다. 분야 전문가가 가장 쓰임새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원조 기관에서 찾는 외부 전문가도 대부분 분야 전문가다. 그런데 이 분야 전문가라는 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유입되는 지역이나 기능 전문가와는 달리, 주로 대학 전공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일단 현업에 들어온 다음에는 따라잡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분야 전문성은 경영, 경제, 행정, 법 등 관리 위주 전공을 가진 개발현장 종사자, 특히 개발학 전공자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되고 만다.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하는 소리가 있다.
그렇다고 대학을 다시 갈 수도 없고…
농업을 배우고 싶었다
나는 서울 출생인데도 어려서부터 농업이 궁금했다. 고등학생 때 세상에서 굶주림이라는 단어를 없애는 걸 장래 희망이라고 써냈는데, 문-이과를 나누는 제도적 벽에 막혀 (농사 많이 짓는다는) 중남미 언어를 전공하는 것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 뒤 학교 공부는 군 생활 하면서 국제통상(석사), 직장생활 하면서 개발협력(박사) 전공을 하는 경로를 밟았다.
그렇다고 농업과 아예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5년 농업 관개수로 사업 수주, 그러니까 사업 개발은 더 이전부터 참여했고 그 뒤로도 축산, 수산, 농가공 등 여러 관련 사업의 기획, 수주, 수행, 평가에 참여해왔다.
가끔 나보다도 농업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농업 전문가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전문가는 개뿔… 그냥 귀동냥에 강하고, 모르는 걸 그때그때 찾아보고 공부하는 사업개발자로서의 습관 덕분에 버텨온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내가 아는 (척하는) 농업은 ‘비즈니스로서의 농업’뿐이다. 사업을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배운 게 비즈니스라 농업도 철저하게 비즈니스 기반으로만 이해하고 분석했다.
서당 개도 3년을 넘어 15–16년에 이르면 풍월이 아니라 칼럼도 읊을 때가 온다. 물론 이때도 민관협력(PPP)를 농업에 도입하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KOICA 10년 치 농업분야 사업을 모아서 종합평가를 하기도 했다. 이것도 ‘가치사슬(Value-chain) 분야’라는 전제가 따른다.
현업에서 늘 농업을 접하지만 여전히 농업의 기술적 측면에 궁금한 건 채울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잘 활용한 통일벼를 아프리카로 가져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입육종), 우리가 먹는 돼지는 순종이 아니라 2대에 걸친 의도적 잡종이라는데 그건 왜 그런지(3원교잡) 등은 기술적으로 깊이 있게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지만 농업은 아무 데서도 체계적으로 배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날 때마다 되뇌었다.
대학을 다시 갈 수도 없고…
2017년.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료분이 급하게 과제물을 제출한다는 얘기에 ‘이미 박사인 분이 무슨 과제물을 제출하세요?’하고 물어보니, 방통대 농학과 재학 중이라는 대답. 놀랐다. 식품영양학 전공인데 늘 식품의 원자재를 공급하는 농업이 궁금했다는 설명. 오…!
그래서 농대에 가봤다
곧바로 3학년에 편입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2018학번으로. 방통대 입학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글이 나와 있으므로 굳이 나까지 나서서 쓸 필요는 없겠다. 난 그저 개발협력 공부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체험한 결과를 쓸 뿐이다.
방통대 역시 졸업학점이 140학점이므로, 다른 전공 학사 학위를 바탕으로 3학년 편입을 하면 이수해야 할 학점은 70학점이다. 방통대 역사와 운영에 관한 1학점짜리 필수과목을 빼면 69학점. 3학점짜리 23과목이다. 전공과목으로만 그렇다. 우리가 교양을 넓히러 방통대를 가는 건 아니니까 전공과목만 듣는다. 농학과의 경우, 전공 개설과목이 총 33과목인데, 23과목을 들으면… 상당히 많다.
농축산에 관해 꽤 많은 과목을 두루두루 듣기 때문에, 농업 전반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된다. 학부 전공과목 좀 듣는다고 사업에 도움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원래 전공 수업을 지금처럼 일하면서 수강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관점이 다르면 같은 것도 깊이 보인다.
무엇보다 현업에서 접하는 전문용어가 전보다 순해진다. 귀에서 막혀 답답한 일이 줄어든다. 모든 용어를 다 잘 알아듣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분야에서 쓰이는 말인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식으로 쓰는 건지, 인접 분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더 알아보려면 무엇을 찾아봐야 하는지 등을 알 수 있으므로 작으나마 자신감이 생긴다.
그렇다. 학부 전공수업 좀 들었다고 전문성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리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아주 문외한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확실히 덜 쫄게(!) 된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게 되고, 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게 소기의 성과(Outcome)라고 할 수 있겠다.
배워야 할 것은 배워가면서 일하자
어떤 분야를 광범위하면서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할 때, 가장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 ‘범위’와 ‘수준’인데, 내용에 따라 일일이 선정하기는 무척 어렵다. 이 자체가 이미 꽤 전문성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필요한 ‘과정’을 선정하면 된다. 직장생활 하면서 회계 공부로 고민하던 2005년, 경영대학원에서 운영하는 1년짜리 미국 회계사 준비과정을 수료한 적이 있다. 어떤 과목을 어느 정도 공부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주어진 커리큘럼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분야 전문성이 없다고 고민하는 개발협력계 동료 여러분에게 방통대는 이런 점에서 권할 만하다. 농학처럼 다른 데서는 가르치지 않는 전공은 물론이고, 교육학이나 컴퓨터공학 등 개발협력 사업에 필요한 많은 전공이 개설되어 있다. 이미 컴퓨터공학과 등에 몇몇 후배를 ‘전도’해보고 하는 말이다.
특히 해외 출장이나 파견 등으로 출석이 어려운 분들에게는 더욱 좋다. 방통대 과정에도 출석 수업과 시험이 있지만,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과제물 대체가 가능하다. 원래 그런 분들을 위해 만든 학교가 아닌가. (심지어 교도소 안에서도 졸업이 가능하다!)
다만 방통대 졸업장을 어디다 쓰지… 하는 고민은 접어두시길 바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서 추천하는 방통대 과정은 학위를 따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현업에서 절감하는 전문성 부족을 기본부터 다지고자 하는 분들에게 제시하는 현실적 대안 가운데 하나다. 해본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다. 도움이 된다.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어쨌거나 방통대 졸업은 쉽지 않다. 학위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시작한 걸 마무리는 지어야 하는데 ‘시간제 학생(part-time student)’으로 잔뼈가 굵은 나로서도 쉽지는 않았다. 겨우겨우 때에 맞춰 4학기 만에 졸업했다. 2016년, 입학한 지 7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받던 날. 페이스북에 생애 마지막 졸업식이라며 사진을 올리자, 예전 직장 선배가 ‘인생 긴데 이게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 알쏭달쏭한 댓글을 남길 때만 해도 이럴 줄 몰랐다.
졸업할 때가 되니 바쁘다는 핑계로 부실하게 공부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친김에 석사과정에 도전했다. 이걸 왜 도전이라고 하냐면, 요새 엄청난 불황이라는 일반 대학원과 달리 방송통신대 대학원은 경쟁이 꽤 심하다. 별세계다. 반백에 접어든 학생을 귀엽게(?) 봐주시고 입학을 허락해 주신 교수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2022년 가을에는 대학원이 어떻게 분야 전문성 강화에 도움이 되는지와 무사한 졸업을 알리는 글을 쓰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