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신겐이 죽은 이후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이렇다할 적이 없었다. 또 하나의 위협이었던 우에스기 겐신도 몇 년 뒤 죽었다. 서쪽의 거대 다이묘였던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군에게도 밀리는 처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노부나가 전성기에 오다 가문의 석고는 600만 석이 넘었다. 나중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에 의해 조사된 전국 석고가 1800만 석 정도 였으니, 전국의 1/3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노부나가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혼노지에서 당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오다 노부나가는 왜 그렇게 강했을까? 오닌의 난 이후 100년 가까이 지속된 난세가 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종식될 수 있었을까?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음 5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출생지의 축복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는 석고가 50만 석이 넘는다. 1만 석 = 250명으로 계산하면 오와리만으로도 13,000명의 병력 동원이 가능하다. 미노를 점령하면서 석고는 120만 석 가까이 되는데 이때는 3만 명의 병력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이미 이 시점에서 다케다 신겐과 비슷한 규모의 군세를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오다 노부히데)를 잘 만나 좋은 영지를 물려받은 것이 노부나가의 근본적인 힘이다.
2. 병농분리
전국시대 병사는 그 지역의 농민이었다. 농민이 전쟁에 나서는 이유는 자신의 마을과 터전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래서 목적 의식이 강했고 이는 전투력으로 이어졌고 함부로 전투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 마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무라이는 자신의 땅을 지키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야하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동원되는 구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사였다.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방안은 없었다. 그래서 모든 다이묘들이 봄~가을 사이에는 전쟁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병농분리라는 획기적인 방법을 들고 나왔다. 바로 고향을 잃고 떠도는 낭인 무리들을 돈을 주고 병사로 채용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가신 집단들은 이런 발상을 비웃었다. 그런 낭인 집단들이 무슨 충성심이 있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오다의 병사들은 전투가 조금만 불리하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오와리의 병사는 전국 최약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농사와 전쟁을 분리함에 따라 생기는 생산의 효율성,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체제, 낭인 집단의 고용에 따른 수적 우위 등이 결국 힘을 발휘할 것이란 계산이었다.
병농분리의 이점을 활용한 노부나가의 전술은 지구전이었다. 적보다 두세배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서 적의 성을 포위하는 것, 그러다가 적의 반격에 피해를 보면 약간 물러섰다가 이내 다시 공격하는 것, 이렇게 물러섰다 공격하기를 일년 내내 반복하는 것이 노부나가의 전략이었다.
서로 피해가 축적될 때 내상이 더 큰 쪽은 농사를 병행해야 하는 적이었다. 가신 집단을 컨트롤하는데도 병농분리가 주효했다. 실제 농민을 이끌어 병력을 동원하는 가신들에게 다이묘들이 휘둘리기 십상인데 오다 노부나가는 이런 영향을 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3. 철포 도입
전국시대 전쟁에서 사망자의 80% 활에 의한 것으로 조사된다. 결국 병력의 소모를 유발하는 것은 원거리 무기였다. 그런데 장궁병은 육성하기가 매우 힘든 병과였으며 제대로 된 장궁병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그런데 철포는 장궁보다 숙련도가 덜 필요한 무기였고 힘과 체력이 없어도 적을 살상할 수 있었다. 특히 오다 가문의 낭인 집단에게는 최적화된 무기였다.
총포의 유일한 단점은 비용이었고 말보다도 몇 배는 비쌌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상업을 진흥시켜 축적한 자금력이 있었다. 진작에 히데요시를 시켜 금/은 광산을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급조된 병사들을 돈의 힘을 빌어 강군으로 만드는 방법, 그것이 철포였다.
4. 관소 철폐, 특권 상인 폐지
관소란 통행료를 받는 관문이다. 지방의 유력자들이 자신의 영지를 지나가는 곳마다 관소를 만들어 통행료를 걷는 악습이 팽배했다. 심한 곳은 몇 백미터 마다 관소가 하나씩 있는 경우도 있었다. 특권 상인을 위한 특혜도 문제였다. 이들은 상품의 제조/판매에 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이외에는 세금이 부과되었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시전상인같은 집단들이 지역마다 있었던 것이다.
지방의 유지들과 특권 상인들은 다이묘에게 세금을 바치는 주요 세력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이들을 보호해주었으나, 노부나가는 오히려 이들의 특권을 모조리 없애버리며 이들을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적이라고 보았다. 관소를 없애고, 일반 상인들에 대한 시장세를 면제해주었다. 아예 특권 상인이란 제도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노부나가 영지의 유지들과 대상인들은 노부나가에 대적하는 다른 다이묘들과 결탁했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사카이를 비롯한 대상인 집단들과 반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노부나가에게 큰 위협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다스리는 지역은 상품이 모였고, 물가도 안정되었다. 상업이 융성하게 되자 도시가 발달하고, 인구가 집중되었다.
덕분에 세금 기반이 넓어져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군대 규모도 확대될 수 있었다. 관소철폐와 특권 상인제도의 폐지는 단기적으로는 손해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노부나가에게 큰 이득이었다.
5.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노부나가 휘하의 4대 천왕 중 3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케치 미쓰히데, 다키가와 가즈마스)은 출신이 불분명하다. 오다가의 가신이 아니었고, 명망가의 후손도 아니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들을 중용하였고, 결국 대영주로 만들어 주었다. 농민의 신분에서 천하제일인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인재 등용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인재풀을 넓혀주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도적이었던 하치스카 마사카스, 상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카 등은 사무라이가 아님에도 히데요시가 발탁하여 오다 휘하에 들어와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원문 : 마왕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