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병” 말기 환자 – 다른 말로는 ‘호구’.
야, 이 호구야.
10년 넘게 진한 우정 자랑하는 손이 한숨 쉬며 얘기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레퍼토리처럼 반복되는 그의 넋두리도 이어졌다. “학교 다닐 때는 쌈닭인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 그냥 호구야 호구.” 그의 말에 애정 어린 놀림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컥하는 마음에 되받아친다.
다 맞춰주면서 하는 거지, 어떻게 나 혼자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
10년 동안 내게 말싸움을 한 번도 지지 않은 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공격을 회피해간다.
너는 을병에 걸린 게 아닐까? 거절도 못 하고, 맞춰주기만 하다가… 그러다가 결국 펑 터지는 을병.
그리고 뒤이어 나조차 기억 못 하는 일화들을 읽어 내려갔다. 클라이언트가 본인도 안 읽은 책 읽어보라 했지만,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그 책을 달달달 읽었던 일화. 미팅 중에 거의 혼내듯이 닦달하는 데도 아무 말 못 하고 그러면 그다음 시안은 어떻게 준비해야지 하고 고민했던 일화.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뀌는데도 아무 말 하지 못했던 일화까지.
타들어 가는 내 속마음을 모르는 누군가가 들으면, 빠르게 타협점을 찾아 누구와도 충돌 없이 지낸 어느 소심한 사원의 무용담이었다. 하지만 내 속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그의 눈에 나는 내 주장 한번 못 펼친 ‘호구 중의 호구’였다. 괜히 분했다. 안 그래도 말도 안 되는 클라이언트 요구에 짜증 나 죽겠는데, 얘까지 나보고 호구라고 그러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런데도 분한 것은 구구절절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을병의 증상은 명확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수긍하기, 그 자리에서는 웃기, 일단 시키는 대로 하기.” 하지만 부작용 역시 명확했다. 충돌 없는 사무실에서 타들어 가는 것은 내 마음뿐이었고, 가득 찬 유리잔 마냥 내가 ‘참고 넘기는’ 범위는 금방이라도 그 선을 넘어 쏟아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학교 다닐 때는 내 주장 꽤 완곡히 펼치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끽해야 사 년도 안 되는 짧은 사회생활 끝에 남은 것은 온갖 클라이언트들의 요구를 들어주다 걸려버린 “을병”이었다. 그런데 웬걸. 회사에서는 다 같이 “을”이니, 그냥 이렇게 버텨보자 했던 것들이, 밖에 나오니 완전 호구 중의 호구였다. 뭔가 확실히 다른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1. 말 잘 듣는 사람이 1등인 줄 알았더니 내 얘기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 1등이더라.
사람은 반복 학습의 동물이랬다. 애석하게도 몇 차례 나의 주장들이 무기력하게 꺾이는 모습을 보고는, 어느 순간부터 내 생각들을 안으로 삼키기만 했다. 첨예하게 의견 대립을 한 작업들의 끝이 감정 소모 말고는 크게 남는 것이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여기에 ‘좋게좋게’라는 나의 수더분한 자세가 나의 을병을 더 키웠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굳이 얘기하지 않았고 묵묵히 상대방의 요구 안에서 내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 빛을 바랜 경험도 더러 있었다. 그런 여러 원인들이 겹쳐, 나에게 일 잘하는 사람이란 ‘요구 사항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하고. 상대방의 요구를 잘 파악해서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꽤 깊숙이 자리 잡혀 있었다.
물론 이 생각 너머에는 비록 끙끙대고, 괴로워도 다양한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잘 맞춰오던 나 스스로를 향한 자부심도 담겨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나의 이런 생각을 흔드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담당자에게 두 가지 시안을 들고 갔다. 한 가지 시안은 내가 하고 싶었고, 실현하는 데 문제가 없었던 안이었다. 또 다른 안은, 담당자가 계속하고 싶어 했던 안이었고, 실현하는 데 많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실현 가능성 때문에라도 첫 번째 안을 밀고 싶었으나, 담당자를 강하게 설득하지 못했다.
당연히 두 번째 안을 실현하는 것의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돌아왔다. 꾸역꾸역 작업을 하다가 뒤늦게 두 번째 안의 퀄리티가 걱정된다는 얘기를 했다. 무슨 답변을 기대하고 얘기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도 “영지 님 말이 맞았네요, 1안으로 가시죠.” 이런 말을 기대했나 보다. 하지만 담당자의 반응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아니, 왜 그걸 이제 얘기해주나요?
담당자의 답변이 나에게 충격이었던 만큼, 그도 적잖이 놀라 있었다. 내가 퀄리티의 우려를 초반에 표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처음부터 강하게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에 문제를 삼았다.
분명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고, 안 되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고자 꾸역꾸역 끌고 갔는데, 졸지에 초반의 충돌을 피하고자 어려운 길로 들어선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에게 나의 우려 사항을 말을 했건 안 했건 중요하지 않았고, 모든 일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 역시 무의미해 보였다.
내가 내 의견을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았고, 그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말 잘 듣는 사람이 1등인 순간은, 일의 결과가 좋았을 때 얘기다. 하지만 일의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수긍하기만 한’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이다. 여기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웃으며 다 받아주다가 혼자 터져버린다면… 정말 최악이다.
내 주장을 단호하고 강하게 얘기하는 것. 그리고 그 단호함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까지가 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는 내 ‘을병’을 타파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였다.
#2. 단호한 주장에는 확신이 필요하고, 확신이 없다면 최소한 전략이라도 필요하다.
고등학교 친구 이양과 종종 같이 작업을 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그녀의 단호한 태도를 한 번씩은 마주하게 된다.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그녀는 명확하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든가 “내 생각은 오히려 이래.”라는 표현을 덧붙이며 그녀의 주장을 하곤 했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녀만의 명확한 원칙이 있었다.
이는 나에게만 보이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와 띠동갑뻘인 담당자에게도 존댓말을 할 뿐, 똑같은 표현으로 자기 생각을 관철했다. 당연히 거기에는 그녀만의 일관된 생각이 있었다.
나는 애초에,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시안은 들고 가지 않았을 거야.
앞서 언급한 담당자와의 논쟁에 관한 내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떼 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의 태도가 아리송하다고 했다.
두 개의 안 중에, 어차피 하나가 맘에 안 드는데도 가져간 것은 ‘그래도 클라이언트 말을 들으려고 노력했습니다’를 보여주려고 한 거야, 아니면 너의 제안에 확신이 없었던 거야?
그녀의 예리한 지적은 어디 하나 틀린 곳이 하나 없었다. 담당자가 원하는 시안을 넣었던 것은 ‘그래도 당신의 의견을 듣고 노력했습니다’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에이전시에서 배웠던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었던 1안을 강하게 푸시하지 못했던 것은 나 스스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할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그 주장을 할 때만큼은, 그녀 스스로 자기 생각에 확신이 있었다. 그녀의 눈빛과 행동, 말투 모든 부분에서 자기 생각에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러기에 누구도 그녀가 그렇게 주장할 때면 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 제안에 확신을 가지지?
그녀의 요지는 이랬다.
글쎄. 일단 첫 번째로는 자신감의 문제인 것 같고. 그게 바로 안된다면, 너 스스로 납득 갈만한 이유와 근거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미팅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나 스스로 확신이 바로 서지 않는다면, 내가 세뇌에 걸릴 만큼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그것도 안 된다면, 최소한의 저당은 잡히지 않을 나름의 전략을 세우고 가야 한다는 것.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내 주장을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고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이 ‘귀찮음’을 피해 이렇게 수동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끌려가면서도 불평불만 하는 나의 모습이 병든 낙타와 겹쳐 보이는 상상도 해보았다. 문득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나 스스로 나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고, 확신을 가지고, 때로는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을 가져가는 것. 이것이 너무나 번거롭게 느껴져도 나의 ‘을병’을 타파하기 위해서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니, 내 을병도 조금씩 낫는 것 같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3. 을이 아닌, 나라는 자세로
단호하게 내 생각을 얘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내 주변에 이미 그렇게 하던 여러 사람의 다양한 태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다 조마조마할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인지 주장을 하는 것인지 강하게 이야기를 하는 분부터, 웃으면서 조곤조곤할 말 다 하시는 분까지. 저마다 다른 태도로 분명하게 자기 입장을 얘기했다. 이에 과하게 용기를 얻어, 담당자에게 강하게 나의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 생각을 바꿀 의사가 없다.
그런데 웬걸, 담당자는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나의 태도에 실망했다고 전했다. 내가 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이유는, 이미 다른 분이 그 담당자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얘기하고 담당자가 수긍한 것을 본 직후였기 때문이다.
한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거의 억울해 죽기 직전이었던 나의 마음을 토로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해도 되고,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울컥하기도 했다. 내가 만만해 보이냐는 말도 했다. 그러자 선배는 되려 웃으며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단호한 화법이 있는데. 내 생각에 영지가 한 말들은 영지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말들 같아.
아니, 단호하게 얘기하면 했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태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뒤이어 이어진 선배의 말들은 어느 정도 수긍 가는 부분이 있었다.
네가 처음부터 차갑게 말하고 단호한 어조로 쭉 얘기해 왔다면 그 담당자도 그렇게 당황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애초에 너라는 사람이 살갑게 웃으며 얘기하다가 갑자기 정색하고 얘기하니, 담당자 입장에서는 자기랑 싸우자는 건가 싶은 거지.
단호하게 얘기한다는 것은, 정색하고 싸우라는 말이 아니야. 너에게 맞는 태도와 화법으로 상대방을 분명하게 설득하라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무의식적으로 ‘굽히지 않는다=배려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담당자를 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담당자에게 사과의 말과 함께 내가 그렇게 표했던 이유과 작업에 관한 나의 생각을 천천히 또박또박 전했다. 그러자 그도 어느 정도 수긍하며 이야기는 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몇 번 더 겪은 후에야, 그때 선배가 얘기한 ‘나만의 단호한 화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감정을 섞어 얘기하기보다는 차분하게 내 생각 들을 여러 근거를 들어서 설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고, 그 근거에는 경험 많은 분들의 조언이 있었다고 얘기하면 더욱더 효과적이었다.
어떤 제안을 바로 거절하는 것보다는 ‘음…’ 하며 조금 뜸을 들이고 거절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지만, 때로는 주장이 나오자마자 나의 생각을 얘기해 반박하는 것이 나을 때가 있었다. 이렇게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나만의 자세”를 키워나갔다.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나의 주장을 바르게 하는’ 나만의 자세 말이다.
그저께 나에게 ‘을병’이라는 단어를 선사해준 손 군을 만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나였기에 그의 농담 어린 걱정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갑작스레 클라이언트에게서 전화를 받아야 했고, 급한 업무 요청이 주된 내용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단호하지만 예의 바르게 일을 거절했고, 담당자도 별 무리 없이 동의하며 전화를 마쳤다. 그리고 전화의 끝은 ‘주말 잘 보내세요’라는 밝은 인사까지 덧붙여졌다. 손은 나의 변한 태도에 사뭇 놀라 했다. 여기에 놓치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거봐, 나 달라질 거랬지? 이제 더 이상, 을병 영지는 없다고.
그는 꽤 좋아하며, 많이 컸다고 칭찬해주었다.
물론 아직도 모든 부분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여전히 하지 못한 말이 많아 끙끙 앓는다. 그러나 적어도 예전만큼 모든 것을 삭히지 않고, 불만이 있는 부분은 바로바로 얘기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주장을 말하는 방법과 능숙도는 시간이 쌓일수록 더 올라간다.
천성이 우유부단하고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내게 어떤 의견을 강하게 얘기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내가 수고해야 할 부분들은 덜어지고 돌아오는 몫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을 많은 ‘을병’ 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어서 빨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말이다. 을이 아닌, 본인들만의 자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