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의 답정너
아재는 결국 다 같은 아재. 다음 세대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 나이가 든다는 건 그렇게 혼자 외롭게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지금 것 봐온 어르신들이 그런 모습이고, 직장과 개인적 관계 속에서 닮고 싶은 어른은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이든 캐나다이든, 아프리카 아님 유럽 어느 작은 동네이든 상관없이 아재들은 다 그렇고 그런 아재들이다, 하고 어느새 결론 내렸다. 그러다 어제 멀리 사시는 친척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질문하고 나는 대답을 하는 게 우리 대화의 방식이었다.
뭐 하고 사냐. 동생은 뭐 하냐. 일은 하냐. 막내는 뭐 하냐. 무슨 전공을 공부하냐.
본인이 생각하기에 괜찮은 소식에는 “음.. 그렇구나.” 본인이 동의할 수 없는 결정에는 “왜? 왜 이렇게 하지 않고?” 결국 자신이 만들어놓은 잣대에 우리 가족이 얼마나 잘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사 당하는 기분. 모두가 다 잘 먹고 잘 살길 바라는 그의 깊은 마음만 받기로 했다. 본인도 옛적엔 불같이 뜨겁고 바람처럼 빠른 젊은 피였을 것이다. 어쩌다가 아재가 되었을까.
시선의 무게
한국은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진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다르든 상관하지 않는 (혹은 상관없는) 나라로 보인다. 진짜 내가 원하는 삶, 연애,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남들에게 나는 이렇게 살고 있고, 이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나라.
세상 어디에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한국은 내가 나고 자란 나라이고, 지금도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라라서 그런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특별히 내 눈에 더 많이 띄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도 그 시선의 무거움에 가끔 눌리기도 하고.
어른들의 질문은 항상 같다. 어쩌다 나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서 그들의 질문 비슷한 걸 던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섬뜩하다. 몇 살이고 뭐 하는 사람인지. 꿈 따위, 뜻 따위 관심 없다는 듯이. 인생이 재미없게 단조로워진다. 관심이 좁아지고, 열정이 미지근해진다.
시집 장가 잘 가서, 내조 외조하면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내미 낳고 알콩달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을 대신한다. 연봉 많이 주는 좋은 회사에서 과장 팀장 부장 이름 달고 술집 가서 술값 계산하고 넓은 아파트 거실에서 집들이하는 것이 ‘뜻’을 대신한다. 아니, 어쩌면 아주 처음부터 꿈이나 뜻 같은 건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왜일까. 왜 누구는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 떠나고, 다른 이는 가슴이 잠잠한가. 가슴이 뛰면 그것이 열정일 리는 없으니 병원 가서 심장 검사나 받아봐야겠다, 생각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계기는 대체 무엇일까.
이 세상의 천장
천장이 낮은 카페와 천장이 높은 카페의 차이처럼, 사람을 억누르는 무언가가 있다. 나라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배경으로부터 야기된 억눌림. 공기가 나빠서, 미세먼지가 많아서, 날씨가 극해서만이 아니다. 이곳의 천장은 낮아도 너무 낮다.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가진 것 있는 사람이 되기에 거쳐야 하는 문의 높이, 배운 것 없는 사람이 배운 것 많은 사람이 되기까지 지나쳐야 하는 터널의 높이. 가슴 펴고 등 펴고 걸을 수가 없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런 건 애당초 없었던 것만 같다. 그렇게 눌려서 말 한번 잘못했다가 몰매를 맞기 일쑤인 동네에서 무슨 자아, 자기 계발, 인생, 뜻 따위가 통했겠는가. 쌀밥 먹고살기도 힘들어서 보리를 섞어 억지로 식사를 하고,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니까 그저 구석에 처박혀 일개미처럼 일만 하고, 학비는 한 사람 치만 마련할 수 있으니까 남동생에게 대학마저 양보해야 하는 이들의 삶. 그런 삶을 배당받은 사람이 어찌 쉽게 진실과 가치를 찾아, 머물러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아재가 만드는 성적표
다른 행복은 어차피 없으니 돈이라도 벌면서 먹을 거나 자유롭게 먹고살자, 가 인생의 목표가 되고 삶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내 핏줄이라는 젊은 조카, 직장생활은 안 때려치우고 잘하고 있는지, 예술 한다는 둘째는 입에 풀칠은 하고 있는지, 어린 막둥이는 실수 없이 대학이나 들어갔는지가 궁금하셨겠지. 그 마음이 이해는 간다.
나와의 통화 이후에 그는 나와 우리 가족의 성적표를 임의로 만들었겠지. 무엇이 적혀있을지 사실 나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나 말고 누군가가 나의 인생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 그럴 시간이 있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의 일상은 바쁘게 흘러간다. 또한 각 개인의 자유는 어떤 모양이든 자유이므로 누군가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성적표를 만드는 일 따위, 나만 안 하면 되려니, 한다.
다음 세대의 천장
그저 내가 만들어갈 삶,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 나의 영향권에 있을 다음 세대들이 열고 들어갈 문과, 걷고 달릴 통로의 높이는 높게 만들어주고 싶다. 두 팔을 활짝 펴고 기지개를 켜도, 최대한의 힘으로 힘껏 점프해도 머리가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천장. 그 속에서 꿈과 뜻을 지켜낼 수 있도록, 넓은 관심을 더욱 넓혀가고, 뜨거운 열정이 더욱 활활 타오르도록.
매일 아침, 별 감흥 없이 바라보던 눈이 쌓인 휘슬러의 등선을 떠올리면서, 어떤 것도 가능할 거라는 믿음을 주시는 드높은 하늘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도 손끝이 닿을 리 없는 높은 천장의 공간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 감사한 마음 덕분에, 새해 인사차 안부를 물었던 나에게 다양한 질문으로 관심을 표해주신 그 친척분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그분도 2020년, 좀 더 행복한 아재로 중년의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란다.
원문: Yoona Kim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