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나는 양준일이라는 인물을 과대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그 당시 그의 옷차림이나 퍼포먼스가 다분히 튀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당시의 한국이 ‘뒤떨어진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평가다. 마치 이미 랩 음악을 듣던 이들에게 서태지의 음악은 그냥 이것저것 짬뽕해서 들고나온 카피캣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그는 아직도 뽕짝 음악이 1위를 하던 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문화 대통령이 되었던 것처럼.
양준일 씨의 경우도 비슷한 선상에서 볼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1990년대의 미국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양준일 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옷차림, 머리 스타일, 춤추는 스타일.
예를 들면 그의 데뷔년도인 1991년에 개봉했던 ‘터미네이터 2’ 속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펄롱의 헤어스타일과 당시 양준일의 헤어스타일. 똑같지 않은가. 양준일의 옷차림과 당시 활동하던 이들(뭐 예를 들면 바닐라아이스라든가), 역시 큰 틀에서 비슷하지 않은가. 그가 유독 독특했다기보다는, 그는 어쩌면 평범했지만 그걸 바라보는 한국인들이 그렇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는 그저 미국에서 입던 옷을 한국에서 입었고, 미국에서 하던 행동을 한국에서도 했을 뿐이다.
한국어가 익숙지 않은 재미교포가 쓴 가사 역시 사실은 어색하고 어설픈 수준이다. 이미 밝혔듯이 그가 가사를 쓴 이유 역시 가사에 대한 고집보다는, ‘써줄 사람이 없어서’였고 그의 표현 방식이 대단히 시적이라거나 독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때는 괴상하던 코드를 지금은 재미있다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의 음악이 시대를 앞서갔다는 해석 역시 나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양준일 씨는 곡을 쓴 적이 없으니, 그 음악의 스타일이 무엇이건 그건 양준일 씨 본인의 것은 아닌 셈이다. 즉 지금의 양준일 붐은 천재를, 영웅을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와 그걸 팔아 먹고사는 ‘미디어’의 컬레버레이션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거품이라고 본다.
그는 대단한 천재적 음악가도, 시대를 앞서간 패셔니스타도 아닌, 어찌 보면 그 당시에 널리고 널렸던 ‘미국 10대 청소년’ 중 하나였지 않을까. 다만 그에게 쏟아지는 거품이 잔뜩 섞인 평가들에 대한 불만과는 별개로 양준일이라는 인물, 혹은 양준일이라는 아티스트에 나는 큰 호감을 갖게 되었다.
사실 슈가맨을 통해 그는 수십 년 사이에 쌓여왔을 (자기를 결국 인정해주지 않은) 대중에 대한 실망이나, (대중음악가로서 성공하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격지심 등을 무기 삼아 얼마든지 ‘왜 내가 성공하지 못했는가’에 한풀이를 할 수도 있었다. 사실은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던가? 혹은 앞서 슈가맨에 등장했던 이른바 ‘반짝 가수’가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지 않던가? 사실 나는 꽤 잘할 수 있었고 노력했지만, 기회가 불평등했고 너무 앞서갔고 어쩌고 하면서.
하지만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 최대한 말을 아끼는 대신에,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현재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에 얼마나 놀랍고 기쁜지, 또 감사하는지 표현하는 데 사용했고, 본인의 쉽지 않았던 인생살이를 마치 남 얘기하듯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마치 동정표는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뉴스룸에서의 태도도 일관적이었다. 그는 슈가맨에서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조금 하기는 했지만 슈가맨 때와 똑같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며, 마치 신나는 영화의 결말을 기대하듯 앞으로의 일들이 기대된다는 표현을 반복했다. 그렇게 볼 때 그는 누구보다 긍정적인 사고를 할 줄 알고, 현재의 자기 위치나 상황을 매우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 가수로 활동하던 이가, 수십 년이 지나 작은 도시의 식당에서 서버로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하다못해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별 볼 일 없는 인물들도 소싯적에 자기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떠벌리지 않던가.
슈가맨에서의 무대 역시 그가 오래전에 했던 음악들이, 또 그 당시의 괴랄하던(…!) 퍼포먼스들이, 결코 짜고 했거나 콘셉트화한 것들이 아니라 여전히 품고 있는 그만의 동작들이고 그만의 감성이었음을 증명했다. 얼굴은 늙었고 몸은 굼떠졌지만,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다.
20대 초반에 꿈을 안고 데뷔했고, 30대 초반에 낸 두 번째 앨범을 끝으로 그 꿈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던 한 인간이, 철저하게 잊혀 20년을 보낸 후에 50대가 되어서 다시 오래전 꾸던 꿈을 펼쳐 보일 기회를 잡게 되었다는 것, 과연 그런 엄청난 기회를 잡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어쩌면 이미 한 가정의 아버지·어머니가 되어서, 자신이 속한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살아가느라 바쁘고 지쳐서 스무 살에 꾸던 그 큰 꿈들을 내려놓고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면 양준일 씨를 대리만족의 아이콘으로 여기면서 바라보고 응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양준일 씨는 인생에 다시 없을 기회를 붙잡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쩌면 그때 미처 보여주지 못한 자기의 모든 것을 풀어내며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또 어쩌면 99.99999%의 경우가 그렇듯 대중의 기대치가 0이 되는 어느 시점까지 미친 듯이 소비되어 버려질 수도 있다.
후자의 가능성이 백배 크다는 것도, 대중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냉정한지도 어느 누구보다 잘 알 양준일 씨일 것이다. 어쩌면 돌아오지 말고 대단하지는 않아도 큰 모험 없이 소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누군가는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돌아왔고,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줄 기회를 부여받았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아 예상보다 빠르게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양준일 씨를, 돌아오기로 한 그의 결정을 지지한다. 우선 그는 다시 넘어진다고 해도 어떻게든 일어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언제나 서서히 사라져버리는 것보다는 한순간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It’s alway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
원문: Haklim Lee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