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강의도 인기 있었고, 미국 교수 특유의 거침없는 표현으로 (“It’s bitching!” “Hey, sister!”) 학부생, 대학원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그렇게 말과 행동에 권위 있는 척하는 요소가 없었지만, 실력과 강의로 어느 교수보다 학생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었다.
젊고 진보적인 여성이었는데, 그를 단순히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게 오히려 그 사람의 진보성을 가두는 것으로 느껴질 만큼 저만큼 앞서 있던 사람이다. 남편이 있었지만 파트너라고 불렀고, 주변에는 그 교수와의 대화를 즐기는 LGBTQ 학생 그룹이 맴돌았다. 그런 그 교수가 가장 싫어하는 건 쭈뼛거리는 학생이었고, 특히 여학생이 몸을 사리는 걸 참지 못했다. 한 번은 그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하게 강의 시간에 학생이 질문할 때 여학생들만 하는 말버릇이 있다. ‘I know this is a stupid question, but…’ 하는 말로 질문을 시작하는 거다. 남학생들은 안 하는데 왜 여학생들만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고쳐주고, 학기가 끝날 때 여학생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질문하면 나는 (교육에)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가 끝나갈 무렵 진행자가 “연말이고 하니 후보마다 돌아가면서 같이 무대에 선 다른 후보들에게 1) 선물을 주거나 2) 용서(forgiveness)를 구하는 말을 해보면 어떨까요?” 하는 제안을 했다. 이게 사전에 전달되지 않은 돌발질문이었던 것 같다.
“앤드류 양 후보부터 시작해보죠”라는 바람에 앤드류 양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멍하니 서 있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그만큼 청중이 양을 좋아하고 친근하게 생각한다. 후보들 중에서 순발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 재치 있는 대답을 했다. 자기가 출마하면서 쓴 책을 한 권씩 주겠다고 해서 박수와 웃음 끌어냈다. 그 뒤로 많은 후보가 양을 따라서 “나도 내 책을 선물하겠다”고 대답하거나, 선물을 핑계로 정책 한 마디를 더하는 데 썼다.
그런데 흥미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토론회에 나온 7명 후보 중 남성 후보 5명은 선물을 선택했고, 여성 후보 두 명은 용서를 구하는 걸 선택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자기 순서가 되자 “저는 여기에 있는 다른 후보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제가 토론회에서 흥분하는데, 그럴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라면서 목이 살짝 메는 목소리로 말했다.
몇 후보를 건너뛴 후 다른 여성 후보인 에이미 클로부차 순서가 되자 그 역시 용서를 구하는 걸 택했고, 워런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오늘 그게 화제가 되었다. “왜 남성 후보들은 하나같이 (선물 같지도 않은) 선물을 준다고 하고 여성 후보들은 사과를 선택했느냐”는 것이다. 여성 후보들의 선택은 앞서 말한 여학생들의 자신 없는 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분명히 공통된 요소가 있는 것 같다.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마음 씀씀이다. 내 질문이 어리석은 질문이라 다른 학생들의 소중한 시간을 뺏는 건 아닐까, 내가 다른 후보들을 공격하고 다그치는 게 그들이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닌데 오해하지는 않을까, 같은 생각.
물론 모든 여성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이렇게 남을 배려하는 태도는 같은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도 결과적으로 여성들이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간다. 유해 남성성(Toxic masculinity)이라고 불리는 공격적인 남성들의 태도, 상대방이 이해할 거로 생각해 조심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을 던지는 태도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하나의 룰이 되어 있다.
실리콘밸리의 “tech bro”들이나, 처음 보는 사이에 다짜고짜 여성에게 지적질과 “외모 칭찬”을 해도 상대방은 고맙게 생각할 거라는 한국 꼰대 모두 배려나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워런과 클로부차가 사과한 것도 어쩌면 그들이 여성으로서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정치에 들어와 경쟁하면서 보니 모든 룰이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후보들은 마구 공격하고 언성을 높이면서도 별 느낌이 없는데, 여성 후보들은 그런 룰, 분위기가 자신의 정체성에 딱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사과하고 싶지 않았을까. 만약 그들이 룰을 쓰면 훨씬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어느 기자의 코멘트처럼, 그래서 더 많은 여성이 정치에 들어와야 하는 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