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이 한창이던 1932년. 미국 후버 대통령은 나팔수들이 트럼펫으로 식사시간을 알려주고 흰 장갑을 낀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 7코스 정찬을 매일 들었다. 후버는 자신이 제왕의 풍모를 과시해 주는 것이 미국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줄 것이라는 신념하에서 이렇게 열심히 밥을 먹었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백악관으로 향하다
그해 여름, 후버가 요란하게 밥먹던 백악관 바깥의 워싱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떼 2만 5천명이 몰려 들었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걸어오거나, 히치하이킹이나 기차 훔쳐타기로 워싱턴으로 몰려왔다. 굶어죽기 직전의 마지막 희망 때문이었다.
미국은 1924년 1차 대전 참전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참전 보너스의 지급시기는 1945년으로 미뤄진 상태였다. 대공황으로 당장 굶어죽게 생긴 참전용사들은 이 보너스(연금)의 지급시기를 당겨 달라는 청원을 하려고 워싱턴에 몰려 온 것이다. 그들은 워싱턴 도시 일각에 거대한 텐트촌을 만들어 야영지를 만들고 의회에 자신의 급박한 처지를 호소하고자 했다.
이들은 보너스 원정대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차 세계대전은 1천만명의 전사자와 2천만명의 간접사망자들의 시체로 뒤덮힌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라 불렸다. 뒤늦게 뛰어든 미국만 해도 전사자만 13만명에 이르렀다. 1차대전 참전용사들도 미국의 전쟁영웅이었다. 독일군과 싸워 이긴 전쟁영웅들도 굶주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참전용사에게 폭력을 행사한 공화당, 음식을 제공한 민주당
워싱턴에 몰려든 2만 5천명의 보너스 원정대에 대한 후버 대통령의 답변은 기병대 공격이었다. 당시 사령관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었고, 부관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으며, 야전사령관은 조지패튼 소령이었다. 2차대전 영웅들은 전장에서 무공을 쌓기 전에 먼저 미국내 선배 군인들에게 총을 쏘는 것부터 시작했다.
패튼의 기병대가 먼저 보너스 원정대의 중심을 향해 돌격했고, 이후 최루탄 공격을 퍼부어 보너스 원정대를 강가로 내몰았다. 호전적인 군인인 맥아더는 자신이 받은 명령을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군중을 해산하는 것을 넘어 아예 보너스 원정대의 야영촌을 싸그리 탱크로 밀어 버렸다.(이후로도 맥아더는 정말 수도없이 명령불복종을 저질렀고, 결국 한국전쟁 한복판인 1951년에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었다.)
미국내 예비역과 현역의 전투는 현역의 일방적인 대승으로 끝났고,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와중에는 최루탄 공격으로 2명의 아기가 질식사한 사례도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있었던 1932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역사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당시 루스벨트는 48개 주 가운데 46개주에서 승리했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 보너스 원정대는 다시 워싱턴으로 몰려 들었다. 루스벨트의 아내 엘리너는 거리에서 식탁을 차리고 그들에게 커피를 타주면서 그들의 사연을 들어 주었다.
보너스 원정대의 한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후버는 군대를 보냈고, 루스벨트는 아내를 보냈다.”
청와대로 향한 세월호의 유가족
세월호의 유가족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슬픔을 가슴에 품은 분들이다. 그분들은 대통령을 만나고자 했지만, 청와대의 대변인은 ‘순수’한 유가족인지를 따져 물었고, 전경들은 방패벽을 둘러쳤고,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14시간을 방치하게 만들었다.
유가족을 대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야말로 국민의 존엄과 국가의 품격을 결정한다. 청와대의 냉대는 우리 국민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였고, 대한민국의 품격을 개쌍놈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슬픔 위에 분노를 얹게 하지 말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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