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는 비용이 든다. 특히 갈수록 청년 세대는 이 불안에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과목에서 A 학점을 받지 못하면 이후의 취업에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봐, 그 때문에 인생을 망칠까 봐, 필사적으로 시간을 쓴다. 그런데 가령 A 학점을 받기 위해 필요한 공부 시간이 10시간이라고 해보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당연히 딱 10시간 공부하는 것이다.
9시간을 공부해서 B를 받았다면, 무척 억울할 것이다. 반면, 30시간을 공부한다면, 20시간을 불안에 지불한 비용이 된다. 혹시라도 억울하지 않기 위해, 정확히 얼마를 투자해야 할지 확실하지 않으므로, 쓰게 되는 이런 비용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어떤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필요한 토익 점수가 850점이라고 하자. 그러나 청년들은 그 ‘점수’를 알 리가 없으므로, 가능한 한 안전하게 ‘확률’을 높이기 위해, 토익 점수를 끝도 없이 올린다. 850점이면 아마 충분했을 텐데도, 불안하여 950점을 만들어 놓는다. 그렇게 만드는 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하면, 역시 이 또한 불안에 지불한 비용이 된다.
그렇게 불안은 누군가의 시간과 돈을 좀먹고, 산업이 된다. 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은 이런 불안을 조장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불안이 커질수록 거대해지는 산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사회 전체의 불안을 가중하고자 하는데,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뉴스를 찾기 때문이다. 무언가 내가 놓치는 것이 없는지, 그래서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을지, 내가 몰라서는 안 되는 기회나 정보들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찾고자 한다. 학원 강사나 컨설팅 업체가 불안을 조장해야 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이런저런 자격증이 없으면, 평가 점수가 미달하면, 더 나은 기회를 놓칠 것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여야 사람들은 돈과 시간을 갖다 바치기 때문이다. 그 외 각종 콘텐츠도 ‘이 콘텐츠를 놓치면 당신에게는 엄청난 손해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애쓴다. 최신 트렌드, 투자 비법, 자기계발 같은 콘텐츠 산업은 그에 불안을 지불하는 이들 덕분에 규모가 점점 확대된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에 큰 비용을 지불할수록, 결국에 손해 보는 건 불안에 지배당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더 풍요롭게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을 모두 빼앗긴 셈이 된다. 아마 우리가 불안에 버린 시간 중 상당수는 더 나은 마음으로 세상을 거닐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무엇에 더 마음이 이끌리는지 섬세하게 알아볼 몇 없는 기회였을 것이다. 불안은 늘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에 대해 속삭이며, 그곳을 향해 절박하게 매달릴 것을 요청하지만, 사실 그만큼 시달리지 않아도 미래는 도착할 만한 곳일 것이다.
실제로 이런 불안은 아직 온전한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태도를 수립하기 전부터, 전방위적으로 아이들의 인식구조 자체를 지배하는 듯하다. 어릴 때부터, 지금 영어를 잘 하지 않으면, 수학 선행을 제대로 해놓지 못하면, 봉사활동을 이번 방학에 하지 않으면, 이번 시험을 잘 치지 못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기묘한 압박이 끝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신입생 때부터 학점 경쟁에 치열하게 몰두하고, 원하는 학점을 받지 못했을 때 얼마나 거대한 절망감을 느끼며 불안에 떠는지는 곁에서 보고들은 사람이면 알 것이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확실히 하나하나의 선택이나 평가, 결과가 인생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위협감 자체가 무척 심화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세태를 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쓸쓸해지는 기분을 달래기가 어렵다. 불안하고 시간이 없어서,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연인을 만날 마음의 여유도 없는 어떤 시절들, 삶을 흔들어놓는 영화나 문학 작품에 깊이 빠져드는 게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의 풍경, 삶을 신뢰하기보다는 삶 자체가 끝없는 위협으로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인생과의 관계 같은 것들이, 아무래도 한 명의 인간이 견디기엔 너무 가혹해 보이기만 한다.
사람은 그런 것들을 견디게끔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불안을 이겨내고, 삶에 대한 믿음이 불신을 눌러앉고,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에 손에 잡힐 듯한 시간을 사랑할 수 있도록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이 시대의 삶은 그런 태어남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