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힙합 시장은 꽤 많은 양의 돈이 자유롭게 흐르며 순환하는 비즈니스의 장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랩 스킬, 참신한 주제 의식, 트렌드에 부합하며 맛깔난 사운드 등을 개별적으로 치열하게 추구하고 그것들을 균형적으로 조합해 똑똑하게 선보일 줄 아는 사람은 힙합의 근원지 미국에서나 (애플식 표현으로) 힙합의 3.5차 출시국 한국에서나 괜찮은 대우를 받죠. 그들은 겨우 ‘힙합이나 하는 놈’에서 무려 ‘돈 잘 버는 아티스트’가 된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래퍼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절대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는 법이니까요. 관련해 올해 8월 4일, 래퍼 ‘버벌진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다음과 같은 포스팅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구관이 명관이라지만 ‘힙합’과 ‘랩 게임’을 오로지 기술적 측면에서만 평가한다면 요즘 세대 래퍼들의 ‘랩 스킬’과 ‘스타일링’은 구세대 래퍼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세련되고, 유연하며, 진보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쇼미더머니’ 프로그램의 1세대 래퍼 심사위원을 향해 숱하게 던져지곤 하던 ‘누가 누구를 평가하느냐?’ ‘입장 바꿔서 진행하면 꿀잼일 것이다.’ 등과 같은 비아냥거림은 ‘힙합’의 정신적 원류나 힙합을 진지하게 논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가치 평가의 기준에 대한 이해를 배제하고 오로지 ‘스킬’과 ‘스타일’에 집중해 ‘힙합 음악’을 즐겨온 다수의 (무한도전 박명수식 표현으로) X세대 리스너에게 이치에 맞는 빈정거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니, 이해합니다.
또 앞말이 길었네요. 하지만 글을 풀어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떠들어보았습니다. 오늘은 아티스트 한 명에 집중해볼 셈입니다. 추천곡은 해당 아티스트의 여러 곡을 담아볼 예정이고요.
오늘의 추천 아티스트는 미국 갱스터 래퍼의 전통적 클리셰를 차근히 밟아나가는 것은 물론 새로운 시대의 힙합 카테고리를 슬기롭게 개척하기도 한 영국 출신의 미국 래퍼 ’21 새비지(21 Savage)’입니다. 윗세대나 아랫세대나 그를 함부로 깎아내리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인생사는 지나치게 개성적이고 또 흔들림 없이 굳건하기 때문이죠.
Feel like 2Pac, Thug Life, ni**a, f*ck you
투팍이 된 기분이라고, 터그 라이프 말이야, 넌 꺼져 인마!Used to make my mama cry, but now I make her proud
울 엄마를 울리곤 했지만, 이젠 자랑스러운 아들이야.
- 21 새비지, ‘터그 라이프(Thug Life)’
신화(Myth) 또는 신화학(Mythology)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거나 관련 도서를 들여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화학의 구루, ‘조지프 캠벨’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그의 이름보다도 더 잘 알려진 이론인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화 속 영웅의 이야기는 특정한 절차에 맞춰 흘러간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영웅의 여정’의 골자입니다. 출발(떠남), 멘토와의 만남, 시련, 귀환 등으로 이어지는 영웅의 여정,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카스는 자신이 조지프 캠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만약 힙합 씬에도 ‘래퍼의 여정(Rapper’s Journey)’ 같은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단계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엉뚱한 상상이긴 한데, 대충 특정의 절차, 어떤 그림이 그려지더군요. 그리고 그 쓸데없는 생각의 끝에 오늘의 추천 아티스트 21 새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삶의 여정이 ‘래퍼’의 인생 그래프의 이상적인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인생사 너무 많은 걸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바닥으로 내려앉았을 때의 시간을 전부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어요. 왜냐하면 그런 시간은 언제나 저를 성장하게 했고,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해주었거든요.
21 새비지는 영국 런던 태생인데, 부모님이 이혼한 후 7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서 미국 애틀랜타로 넘어갑니다. 미국에서의 학창 시절은 그야말로 ‘Raw하고 Rough하며 Tough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7학년 때는 총기 소지 혐의로 지역의 학교들로부터 영구 제명을 당했고, 이후 소년원에도 한 번 들어갔다 나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지역 갱단에 입단합니다. 일종의 양아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 되겠죠.
갱단에서는 주로 대마를 파는 드러그 딜러(Drug Dealer) 업무를 중심으로 물건을 훔치는 날강도짓과 자동차를 훔치는 절도범 역할까지도 충실히 해냅니다. 그러다가 19살 때, 그의 동료가 총격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21살이 되던 해인 2013년의 생일에 21 새비지 본인은 상대 갱단으로부터 여섯 발의 총상을 입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그 자리에서 사망합니다.
해당 사건의 충격은 21 새비지가 힙합 커리어를 좇는 시발점이 되죠. 그리고 사망한 친구의 삼촌이 재정적 도움을 주어 스튜디오를 빌릴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인 래퍼 인생이 시작됩니다.
부모님의 이혼, 떠남, 학창 시절의 총기 소지, 지역구 학교로부터의 영구 제명 및 자퇴, 소년원 입원 및 퇴원, 지역 갱단 가입, 마약 판매, 강도, 절도, 동료 및 친구와의 사별, 총격으로 인한 중상, 회개와 결심, 멘토와의 만남, 래퍼로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21 새비지의 인생 그래프는 거칠고 투박했던 거리에서의 지난했던 삶을 끊어내고 힙합 세상에 몸을 던져 꿈처럼 환상적인 내일을 그려나가는 자수성가 갱스터 래퍼로서의 역설적이기에 더욱 ‘모범적인’ 코스를 대변하는 듯합니다.
‘언젠가 나도 래퍼가 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힙합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들이 랩 하며 이야기했던 것들이 내가 하던 짓(갱스터 짓)과 같아서 그저 연관시킬 수 있었을 뿐이에요. 내 친구 하나가 죽었을 때, 어떤 곡들은 나의 아픔을 치유해줬어요. 영감을 위해 노래를 들은 게 아니라 길거리 감성 그 자체로 음악을 들은 거라고요.
- 21 새비지, 잡지 『Interview』 인터뷰 중
개인적으로 21 새비지의 음악을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첫째, 그의 단조롭지만 군더더기 없는 래핑은 때로 심심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로 질리지 않고 앨범을 여러 번 찾아 듣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둘째, 무탈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보호받으며 자란 나 같이 나약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거칠고 험한 세상을 몸소 체험하고 졸업한 인간을 막연히 경외하게 됩니다.
셋째, 그가 살아온 인생과 그가 올라타 작품을 만드는 노래의 비트가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잘 어울립니다. 소위 톤 앤드 매너라고 하죠. 그의 영리한 비트 초이스는 곧 그가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을 단 몇 분 안에 구겨 넣었다가 리스너의 귓속에 펼쳐 보여주는 마법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Metro Boomin 당신은 도대check). 넷째, 음악 구성의 묘를 아는 래퍼로 그가 노래의 마디마다 집어넣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그니처 훅과 라인은 질리지 않고 그의 노래에 집중하고 즐겁게 리액션하도록 돕습니다(Straight Up! 21! Oh God!).
오늘의 글을 열며 돈이 모이는 비즈니스로의 힙합을 이야기했습니다. 또 아무리 구관이 명관이라지만 기술적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는 과거의 래퍼들보다 요즘 래퍼들이 한층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팩트라고도 말했습니다.
21 새비지는 랩 스킬이 화려하지 않습니다. 뭐라 말하는지 모르게 웅얼거리듯이 랩을 한다는 의미에서 멈블(Mumble) 래퍼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죠(본인은 싫답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는 도리어 선배 래퍼들보다 더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랩을 구사하기도 하죠. 이게 랩이야 말이야?
21 새비지는 래퍼가 되고 싶은 일념 하나로 선배 래퍼들의 음악을 찾아 들으며 영감을 찾고, 랩 스킬을 연마하며 힙합 비즈니스에 뛰어들기 위해 애쓴 캐릭터가 아닙니다. 다만 그는 스트리트 갱스터의 삶을 살아가며 음악으로부터 현실적인 위로를 받았을 뿐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랩 가사를 동일선 위에 올려놓고 공감하려는 실존적 수단으로 힙합 음악을 감상하고 선배 래퍼들과 교감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어떤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힙합보다는 알앤비를 더 자주 들으며 성장했다는 걸 쿨하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종국에는 랩 게임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래퍼가 되기 위해 랩 스킬을 날카롭게 연마하거나 먹힐만한 스타일을 찾아 헤집고 다니고 안달하며 시작한 연습생 식 가수가 아닌 것이죠. 21 새비지는 자신의 인생사가 곧 힙합이자 랩이라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흉내가 아니라 진짜배기 갱스터 래퍼로 말입니다.
돈이 모이는 곳은 늘 그 돈을 받아먹기 위한 다채로운 전략 전술을 선보이는 자칭 타칭 선수들로 득시글합니다. 어디 빈틈 하나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이 다양한 종류의 콘셉트가 자글자글 들끓습니다. 힙합 비즈니스의 세계도 마찬가지이겠죠. 래퍼는 결국 ‘자기 이야기’로 승부를 봐야 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건 곧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풍부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풍부하게 보여준다는 건 갱스터 래퍼든 책벌레 래퍼든 금수저 래퍼든 GS25 아르바이트 래퍼든 맘스터치 사장님 래퍼든 9급 공무원 준비생 래퍼든 중견기업 생산관리 주임 래퍼든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던지고 무언가를 흉내 내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쯤 되면 조금 부족한 ‘랩 스킬’, 조금 촌스러운 ‘패션’쯤이야 누구라도 감안해줄 수 있습니다. 다만 진부한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시대가 바뀌었거든요.
매력적인 인간이 귀한 시대입니다. 역설적으로 모두가 비슷하게 살아가려고 악을 쓰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죠. 남도 충분히 들려줄 수 있고 보여줄 수 있고 제공할 수 있는 얘기를 나까지도 들려주고 보여주고 제공하고자 울며불며 애를 쓰고 노력하는 시대, ‘2019년도’를 설명하는 수많은 소제목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저부터 정신 차리겠습니다.
그려, 다 알겠어. 구구절절 말도 많네. 이제 추천곡이나 몇 개 던져줘 봐.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 선생님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꾸벅.
원문: 스눕피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