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주말인 백수도 주말을 기다린다
쉽게 일반화하긴 조금 곤란하지만, 나의 직접 경험과 주변의 이야기를 함께 균형적으로 종합해보면 정말이지 ‘백수’도 ‘주말’을 기다린다. 백수도 토요일과 일요일이 되면 마음이 편해지고 조금은 지친 마음을 내려놓는 재충전의 시간으로 그 이틀을 활용한다.
무언가를 경험해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오만이다. 그래서 나는 기껏해야 백수 생활 한두 달 해본 걸 가지고 백수들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하는 듯 ‘나도 네 마음 잘 아니 기죽지 말고 힘내라’라는 식으로 응원의 말씀을 던지는 사람들이나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찾아온다’는 식으로 하나 마나 한 위로의 말씀을 건네는 사람들로부터 큰 진정성을 느끼지 못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청춘 콘서트랍시고 취업난에 시달리는 절박한 청년들을 강당에 잔뜩 모아 놓고 ‘인생 멘토’를 참칭하는 각계각층의 선배님들이 무대 위에 올라 팔짱을 끼고 실실 대며 던지는 영양가 없는 조언 폭탄은 그저 ‘실례’의 말씀일 뿐이라고 본다. 청춘 멘토라는 사람이 매일이 ‘주말’인 백수가 뭘 또 따로 ‘주말’을 챙기느냐는 편협하고 뻔한 생각을 혹 가지고 있다면, 그는 그 포디엄에 올라 멋진 척 입을 놀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는 30년 인생을 살며 이래저래 백수 생활을 도합 약 2년 정도 했다. 내리 깡-백수 신분을 유지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 인생의 부분 부분, 그 화려했던 백수 타임들을 잘 떼어내 한 줄로 죽 이어 붙이면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군 생활에 버금갈 정도로 꽤 긴 시간을 백수로서 어찌 보면 ‘헛되이’ 허송세월한 것이 뭐 어디 막 드러낼 만한 자랑은 아니므로 감히 큰 소리를 내진 못하겠으나, ‘백수’라는 신분과 그것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입을 열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할 수 있음을 공인하는 어떤 자격증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취득할 기본적인 ‘요건’ 정도는 충분히 갖추었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 모든 직장인의 꿈은 백수이고, 우리나라 모든 백수의 꿈은 직장인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생각해보면 꽤 슬픈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이탈할 수 없는 ‘밥벌이’의 굴레에 대한 자조이자 오로지 ‘직장’을 통해서만 사람 구실을 확인하고 존재를 증명하도록 세뇌된 뿌리 깊은 의식에 대한 자포자기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30살? 까마득히 어린놈이 직장 생활을 해 봤으면 얼마나 해 봤고, 인생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인생 다 산 원로처럼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야?
둘 다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은 없다. 더욱이 나도 뭐 대단할 것 하나 없는 범부라서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처지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냥 그런 생각이 있고, 그런 생각 때문에 가끔 씁쓸한 마음이 든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넘어선 별다른 특별한 의미는 없다.
백수 신분의 최대 강점
약 2년의 백수 경험을 통해 이끌어 낸 백수라는 신분의 최대 강점을 하나 꼽자면, 그것은 곧 학생, 직장인 등과는 다른 시간대를 부지런히 살아가는 백수는 하루 24시간을 바라보는 완벽히 새로운 눈을 뜰 수 있다는 점이다.
평일 오전 11시의 NBA 올스타전 생중계 전후로 흘러나오는 TV 광고에 대해서, 평일 오후 1시의 아파트 단지 내 익숙한 풍경 그리고 그 아파트 단지 내 공기를 무겁게 감싸는 섬유유연제 냄새에 대해서, 평일 오후 2시의 홈플러스 주차장의 뜨거운 온도와 여유 주차 공간 여부에 대해서, 평일 새벽 3시에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로 맥주 캔을 들고 앉는 집 앞 벤치 주위로 조용하게 몰려드는 선선하고 고요한 바람 등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동네 알-백수’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일이나 공부를 하며 부지런히 낮 시간을 죽이고, 밤에는 잠을 자며 부지런히 꿈을 꾸는 직장인과 학생들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동네 알백수’는 온몸으로 경험하고 만끽한다. 그것은 분명 ‘새로운 눈’이고,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자가 누릴 수 있는 최대 호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장점 내지는 강점이 인생에 뭔 도움이 되느냐고? 백수들은 그런 생각 잘 안 한다. 한숨 한번, 시팔 소리 한 번으로 ‘효율’이나 ‘보람’ 같은 건 개나 줘버리면 그만이다. ‘카르페디엠’은 백수들이 써야 아주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긱 이코노미(Gig Economy) 같은 개념들이 쏟아져 나오고, 기존의 직장/직업의 개념이 곧 사라질 거란 때로 불안 섞인 전망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그런 커다란 개념과 현상들은 둘째로 치고라도 이제 ‘백수’들의 전성시대가 분명히 열릴 것이란 확신이 내게는 있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생각과 관점을 퍼블리싱할 수 있는 이 전례 없이 스마트하며, 심지어 그 스마트한 상태에 다가가기도 무척이나 편리한 스마트폰 세상 위에서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자기 관심 분야에 대한 밀도 높은 덕질 능력 하나만 갖추어도 ‘인플루언서’니 ‘인스파이어러’니 하는 멋진 수식어가 달라붙는 요즘인데, 아, 앞으로 무엇이 더 그리 두렵고 힘들겠는가.
세상을 너무 단순하고 손쉽게 1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라고,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아주 죽을 듯이 들여야만 겨우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런 말씀들과는 정반대 되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흔하게 벌어지는 요즘이다. 솔직히 나도 ‘답’은 모르겠다. ‘답’을 알면 이렇게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앉아 있을까.
하지만 어쨌든 나는 ‘백수’들의 힘을 믿는다. ‘백수’들은 생각보다 힘이 세고, 기본적인 성실성과 책임감이라는 무기를 장착한 백수라면, 그들의 무한한 잉여 시간과 새로운 시각이 합쳐져 가리키는 곳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을 지도 모른다.
원문: 스눕피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