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대개 타인에게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사실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라는 것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연기, 거짓, 적당한 맞춰줌이나 허위 같은 것들이 없으면 제대로 유지될 수가 없다.
심지어 끝도 없는 솔직함은 부부나 가족, 연인이나 절친처럼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대부분 독이 된다. ‘끝도 없는 솔직함’의 관계란 사실 불가능하다. 이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다. 상대에게 가령 내가 느끼는 모든 순간순간의 감정들과 생각들을 다 전달한다고 하면, 결국에는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도 전달하지 못한 결과가 될 것이다.
우리 안에는 너무 다양한 느낌이나 생각들이 있고, 사실 그것들을 걸러내는 ‘틀’ 자체가 ‘나’라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때론 당신이 시큰둥하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밉기도 하다. 그래도 더 근본적으로, 더 지속적으로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그 모든 사소한 순간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는 거의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다.
사실 타인의 끝도 없는 솔직함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내가 나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적은 일기장이 있다면 그 일기장을 보여줄 만한 존재는 신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크고 작은 온갖 욕망, 편협하거나 혐오스러운 생각들, 누군가를 한순간 터무니없이 미워했던 순간이나 단지 재미 삼아 해보았던 온갖 망상을 다 전달해도 좋을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관계 맺기란 어디까지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놓아도 좋은 존재라 승인하는가의 문제고, 곧 내 안에서 어디까지를 나 자신이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또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군가와 나의 모든 걸 교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점이다. 가능하면 나를 쪼갤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는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내가 된다면, 다른 누구를 만났을 때는 투박하고 거친 내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누군가와는 나의 찌질함을 공유하고, 다른 누군가와는 나의 화사함과 화려함을 공유하는 것도 좋다. 사실 인간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란 그렇게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나의 전체를 공유할 수 있는 관계는 없다. 어디까지나 나의 일부만을 그 누군가들과 겨우 관계 맺을 수 있을 뿐이다.
인간관계를 특히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와 친해지면, 그에게 나의 솔직하고 진실한 면모를 가감 없이 다 꺼내야 한다고 느낀다. 관계란 늘 어느 정도 은폐하고 가장된 것들이 있고, 말할 수 없거나 말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도, 그런 걸 좀처럼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정립해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 온전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모든 쪼개져 있음, 말할 수 없음, 선별과 골라냄을 견뎌낼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은 스스로의 내면에서부터 계속 다져나갈 수밖에는 없다. 어찌 보면 이런 관계의 법칙은 삶의 다소 서글픈 비극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가 전적으로, 완전하게 솔직할 수 있는 존재란 내면의 깊은 서랍 속 일기장이나 새벽기도로 만나는 신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 내면의 무게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 견뎌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결코 그 누구도 완전히 나를 감당해줄 수는 없고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홀로 고독하게 짊어져야만 하는 부분이 모든 이에게 운명처럼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운명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린다. 삶을 지탱하는 관계도, 나를 지탱하게 하는 현실도 말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