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면서 관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릴 때 나는 여유로워 보이는 이를 질투했고, 그 부러움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대강 덮었다. 취향이 없는 걸 들킬까 봐 다른 사람들이 쌓은 취향을 낭비라고 무시하려 애썼다. 그렇게 쌓인 신 포도에 걸려 자주 넘어졌다.
가난하면서 물욕이 없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가난한 이들은 소유한 것 자체가 별로 없어 계속해서 살 것이 남아있다. 무언가를 자주 사는 것 같은데도 자꾸만 살 것이 생긴다고 느끼는 이유는 애초에 산 것들의 질이 좋지 않아 사용 연한이 짧으므로 싼 것을 자주 사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면서 솔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보고 싶은데, 내가 먼저 보자고 하면 밥을 사야 할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었는데 참가비가 없단 말을 할 수 없어서 바쁜 척했다. 유행인 걸 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아예 관심 없는 척을 했다. 이 모든 말을,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솔직하게 할 수 있지만 그땐 그걸 들키느니 주변을 잃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가난하면서 자기 주관으로 결단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후회 없는 결정이란 건 실패해도 괜찮고 실제 경험치도 많을 때,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옷을 사서 여러 번 실패한 적이 없는데 이 옷이 나에게 잘 어울릴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1년에 영화를 두세 편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가. ‘이게 아니면 끝’이라 생각하면 안전한 선택만 하게 되지만 ‘아니면 말고’라고 할 수 있으면 도전적인 결심도 할 수 있다.
이들의 쇼핑 사이트 장바구니에는 혹시 더 싼 것이 나올까 봐 보류해놓은 것들과 최저가 찾은 것을 갱신할 때마다 업데이트되는 목록으로 가득하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지니 위시리스트에 물건이 쌓일수록 정작 결제 단계로 가기가 어렵다. 가난한 이는 10시간을 투자해서 1,000원이라도 싼 제품을 사는 게 합리적 소비라 생각하지만, 10분을 투자해서 정가에 제품을 사고 나머지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소비일 수 있다. 부자인 이들은 돈을 써서 시간을 아끼는데, 가난한 이들은 시간을 써서 돈을 아낀다. 가난할수록 더 바쁘다.
“그거 안 하면 죽냐?” “돈지랄이다” “그 돈이면 □□를 할 수 있다” 같은 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특히 자식에게 주문처럼 하게 되는 말이다. 이런 질문을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남들처럼 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 과도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런 기준으로 김밥은 괜찮지만 마카롱은 사치품이다. 여행이나 유학을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가성비만을 기준으로 하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당장 적은 돈이라도 빨리 버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게 된다. 현재를 견디는 데만 급급하면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개념을 갖기가 어려워서 자꾸만 같은 자리에 머무른다.
지갑이 가난해지면 높은 확률로 마음도 가난해진다. 취업 후 나는 성격 좋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밥을 얻어먹으면 후식은 내가 살 수도 있고, 먼저 연락해서 밥을 살 수도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돈이나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걸 선택하는 걸 볼 때도 더 이상 바보 같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선택이라는 건 항상 합리적일 수 없고, 세상에 가치 있는 것 대부분은 가성비로 치면 무모하고 나쁜 일이다. ‘결국 다 똑같을 거야’란 식으로 뭉개서 세상을 보지 않고 디테일을 보게 되자 열린 마음으로 안 해본 것을 접하게 되며 취향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생겨났다.
나였던, 나일 수도 있었던 이가 아직 세상에 너무 많다. 꿈꾸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에 더 익숙해진 젊은이를 돕기 위해 서울시는 2016년부터 미취업 청년 중 신청자에게 매월 50만 원씩의 청년수당을 지급한다. 참여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이 덕분에 취업, 창업, 창작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일자리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답했다.
2016년부터 고려대는 국내 대학 중 최초로 성적장학금을 폐지하고 저소득층 학생 지원을 늘렸다. 서강대, 이화여대도 저소득층 학생 지원을 늘렸으며 서울대는 최근 성적장학금 폐지를 적극 논의 중이다. 가정에서 지원을 받는 학생이 공부에만 전념해서 높은 성적을 받는 동안 저소득층 학생은 학비 마련을 위해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다 보니 성적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저소득층 학생 장학금 지원 확대와 관련해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박경신 교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나 최고공립대학들도 모두 성적장학금을 폐지하고 거의 100% 저소득층 장학금이다. 덕분에 이런 곳 합격만 하면 저소득층인 사람도 등록금, 생활비 걱정 없이 학교를 마칠 수 있다. 나도 수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니, 그게 없었다면 학교를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대 와서도 학부 가르칠 때는 생활비, 등록금 알바 때문에 수업 시간에 결석하거나 자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F를 줄 때 정말 가슴 찢어졌다.
민간연구소 LAP2050은 최근 한국의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기본소득제’를 제시했다. 유럽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본 자본’을 활발히 논의 중이다. 파리경제대 교수 토마 피케티는 최근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국가가 청년에게 종잣돈을 제공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만 25세가 되면 1인당 자산의 평균치 25%인 12만 유로(1억 5,000만 원)의 기본소득을 청년에게 일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지원하는 건 단순히 적선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이 그동안 사재기해 왔던 시간과 기회를 선물하는 것이다. 과정에서 더 공평해지자는 것이다.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면접관이 아나운서를 꿈꾸는 애라를 꾸짖는 상황에서다. “저 친구들이 유학 가고 대학원 가고 해외 봉사 가고 그럴 때 뭐 했어요? 열정은 혈기가 아니라 스펙으로 증명하는 겁니다.” 그러자 애라는 답한다. “그럴 때 저는 돈 벌었어요.” 면접을 망친 뒤 그는 혼잣말한다.
우리는 항상 시간이 없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보다 늦게 자는데도 시간이 없었다. 누구보다 빡세게 살았는데.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면 그만큼의 시간이 생겨난다. 생활비가 확보되면 도전에 실패해도 훌훌 털고 다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돈부터 벌어두고 시작하지 않아도 될 때 추진력은 강해지며 ‘어떻게’가 아니라 ‘언제’만 고민한 후 바로 시작해볼 수 있을 때 모험심이 왕성해진다.
돈 있는 이가 그 덕에 쉽게 가지게 된 자신의 장점과 경험을 자랑하는 걸 볼 때마다 서글프다. 그에 어떻게든 맞서보려고 타임푸어인 이들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은 먹는 비용과 잠자는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혹사당했던 몸은 시간이 흘러 반드시 크고 작은 고장을 내며 자신을 돌보지 않은 주인에게 보복하고야 만다.
청년들이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모르는 척했던 것들을 많이 해볼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의지로 극복하라고 윽박지르지 말아야 한다. 불평등을 줄이려는 지원이 많아져야 불운했던 이들도 여분의 마음이 생겨 자신과 남을 덜 미워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존엄과 성장은, 단순히 살아남기를 목표로 하는 것 외의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영화 〈노예 12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는 단지 목숨을 이어가고 싶지 않소. 인간다운 삶을 원할 뿐이지.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
원문: 정문정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