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계의 오트 쿠튀르, 혹은 요지경이 되어버린 우유 이야기
매일 아침 한 잔의 우유로 시작하는 하루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실천하는 거의 유일한 습관이다. 엄마는 우유를 마셔야 키가 커진다고 항상 우유를 데워주었고(키는 크지 않았다), 나는 바나나 우유나 딸기 우유를 달라며 한바탕 입씨름을 해야만 했다. 그때는 형형색색의 우유들이 참 맛있어 보였는데.
… 지금은 다르다. 흰 우유, 바나나우유, 딸기우유, 초코우유 정도였던 가공유의 세계가 갑자기 커졌다. 이게 다 가공유 세계의 원톱 ‘바나나맛 우유’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우유’를 만들겠다며 오디 맛, 감귤 맛, 리치피치 맛, 바닐라 맛을 내더니 올 10월까지 누적 2,000만 개 정도를 파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곳들도 간다. 그렇게 다른 우유 브랜드들도 참전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대 가공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늘 마시즘은 가공유 중에 독특한 7가지 음료를 리뷰해본다.
고구마는 거들뿐, 호박고구마맛 우유
- 장점: 인싸의 기분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 단점: 고구마의 탈을 쓴 바나나맛 우유인데?
이 모든 원흉(?)인 빙그레의 최신 에디션은 바로 ‘호박고구마 맛 우유’다. 빙그레는 독특한 것도 독특함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음료들을 다시 마실 수가 없는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때문에 맛이 아니라 시간이 중요해져 버린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호박고구마 맛 우유에는 빙그레의 전략이 잘 들어있다. 일단 음료의 향과 색깔에서는 고구마가 연상된다. 하지만 베이스가 되는 맛과 우유의 가벼움은 바나나맛 우유다. ‘유니크하면서 익숙한’이라는 상사들의 유니콘 같은 주문을 빙그레는 해내버리고 만 것인가?
같지만 다르다, 서울우유 호박고구마
- 장점: 신화백제고구마 아이스크림 맛 남
- 단점: 신화백제고구마 아이스크림이 더 맛남
소년만화에 주인공과 라이벌이 있듯 빙그레에게는 서울우유라는 막강한 가공유 라이벌이 존재한다. 하얀색 우유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서울우유는 나름 가공유의 종류가 있었다. 그리고 올해 초, 복숭아 맛 우유를 출시하며 패션위크 같은 가공유 전쟁에 참전했다.
하필 라이벌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이 호박고구마 맛 우유다. 하지만 같은 콘셉트여도 두 우유는 다르다. 빙그레가 라이트 한 맛이었다면 이 녀석은 진짜 고구마를 흉내 냈다. 굉장히 걸쭉하고 무거운 단맛이 느껴진다. 이게 바로 호구마… 아니 호박고구마구나. 나문희 선생님 보고 계신가요?
우유계의 프리허그? 슈크림을 품은 우유
- 장점: 달콤한 첫 만남
- 단점: 두 번 만에 느끼해짐
항상 명화가 걸려있던 덴마크(나라 아니라 회사)에서도 특이점이 온 가공유 시장에 참전했다. 슈크림을 품은 우유라니! 나처럼 슈크림도 잘 모르는 친구(저는 빵을 잘 안 먹습니다)를 위해 ‘슈크림 궁금해!’라는 문구까지 써준 친절함을 보여줬다.
달다. 엄청 달아서 행복하다. 빵 안에 있는 크림의 맛이 느껴질 정도로 미끌미끌한 우유가 들어온다. 빵이 자꾸 생각나는데 없으니. 패키지에 그려진 빵을 보면서 위안을 삼자. 이런 자린고비 같은 우유를 내다니. 다만 느끼할 수 있다는 게 함정. 때문에 에스프레소를 넣거나 녹차를 넣어서 가공유에 또 다른 가공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과일 콤비네이션, 우유 속에 망고 패션후르츠
- 장점: 우유 속에 참 대단한 것을 넣었다
- 단점: 그러니까… 왜 그 대단한 것을 우유에
우유갑에 글씨를 써서 유명세를 탔던 매일우유는 기존의 망고 맛을 업그레이드 한 망고 패션후르츠 맛을 냈다. 저거 패션후르츠 뷔페 가면 먹고 얼굴 꾸깃꾸깃해지는 뷔페 과일계의 신 포도가 아닌가.
패션후르츠라면 신물 나게(?) 무서워하지만 일단 마셔보기로 하자. 향은 역시 공포의 상큼한 패션후르츠 향이 난다. 하지만 마셔봤더니 의외로 망고 맛이다. 망고의 맛이 진해서 약간 느끼한 단맛이 될 뻔한 것을 패션후르츠가 향으로 막아준 것 같다. 다행이다 패션후르츠 맛은… 악! 끝 맛에서 살짝 난다. 방심했다.
우유로 국내 여행, 여수 쑥 우유
- 장점: 괴상한 콘셉트지만 의외로 맛있음
- 단점: 하지만 너무 괴상한 콘셉트라 용기가
드디어 도착했다. 인디안밥 우유, 바나나킥 우유 같은 과자 맛 우유로 시동을 걸던 푸르밀이 드디어 급발진하기 시작했다. 여수 쑥 우유라니. 왜 우유에 여수산 쑥을 담은 건데? 콘셉트를 보는 순간 웃음이 나서 나도 모르게 사고, 그렇게 오늘까지 3번을 사서 마시게 되었다.
데워도 마셔봤고 차게도 마셔봤는데 일단 쑥의 향이 제대로 난다. 우유의 색깔부터 걸쭉한 녹즙 색이라 두려워할 수도 있겠지만 은근 맛은 괜찮은 편이다. 녹차라테의 풍미와는 한 끗 다른 쑥라테 맛이 난다. 녹차가 정규 교육을 받은 듯한 자연의 맛이라면, 이건 약간 거칠고 진한 스트릿 출신의 맛이다.
우유로 국내 여행을 또, 청도 홍시 우유
- 장점: 생각보다 맛없진 않음
- 단점: 근데 무슨 맛인지는 모르겠어
푸르밀이 무서운 것은 쑥 우유 말고도 홍시 우유, 쌀 우유까지 3가지 괴우유(죄송합니다)를 한 번에 출시한 것이다. 아니 홍시랑 우유를 같이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 도대체 감이 안 잡힌다. 무슨 맛이 나는 거지.
홍시 우유를 마셔봤다. 향은 잘 나지 않는데. ‘이게 뭔 맛이지’를 반복하는 맛이다. 홍시를 홍시라 하지 못하고, 우유를 우유라 하지 못하는 맛인데. 가장 가깝게 연상되는 맛이 ‘메로나’ 아이스크림이라 머리가 더욱 복잡해지는 맛이 난다. 그러니까 이게 홍시 우유인데 왜 메로나 맛이 나는 거야.
국내 여행 마지막, 이천 쌀 우유
- 장점: 진하고 고소한 아침햇살
- 단점: 예상 가능한 곡물 우유 맛
우유로 떠나는 국내 여행 시리즈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2+1이다. 사실 독특한 두어 개만 소개하고 싶었는데 결국 1개를 더 받아왔다. 이래서 패키지 여행은 맘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아니다).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진하다. 쌀우유에서는 헤비급 아침햇살의 맛이 난다. 두유와 미숫가루가 생각나는 진함을 자랑한다. 콘셉트만 보면 진짜 센캐 같은데 마시고 나면 ‘알고 보니 나쁜 애는 아니야’하는 게 우유로 떠나는 국내여행의 교훈인가.
하지만 아직 국내에는 특산품이 많이 남았다. 보은 대추 우유, 임실 치즈 우유, 안동 간고등어 우유… 기대해본다. 물론 마실지는 모르겠어요. 미안해.
개성과 취향을 한 자리에, 가공유의 신세계
가장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우유가 이렇게 독특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것은 우유를 구매하는 곳이 주로 편의점이며, 독특한 것을 즐기는 소비자들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매일 아침 음료로 시작하던 나의 잔잔한 삶이 그날의 가공유의 종류에 따라 희로애락이 되어버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다. 조금만 더 열심히 만들면 옆 나라에서도 놀라워할 한국 우유 어벤저스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는걸?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