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톨스토이의 이 질문을 지금 제기하면 한가하고 물정 모르는 소리라며 타박받을 일이다. 고쳐 묻자. 서울 아파트는 얼마 정도의 가격이 적당한가. 나는 부동산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왜 이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는지 의문이다. 기준이 있어야 비싸다 아니다 말을 할 거 아닌가. 기준이 있어야 사실 이 정도 금액이 적정한데 지금은 너무 올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우문일지도 모른다. 시장에서 가격이 이미 모든 걸 말하지 않는가. 가격은 그 가격에 거래되었음을 의미하고 그것이 곧 그 상품의 가치를 표시한다. 그런데 정말? 근데 비트코인 하다 망한 사람들은? 그 가격이 코인의 가치라고 믿었다가 한순간에 폭락해 거덜 난 사람들은?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바로 시장의 조정 능력이라 할 텐가. 그 과정에 올라탔다 손해 보는 사람은 개인의 판단이니 어쩔 수 없다 할 건가.
물론 지금 서울 아파트값을 걱정하는 사람은 비트코인이 급락한 것처럼 서울 아파트값이 급락해서 집주인들이 손해를 볼까 봐 염려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반대다. 이대로 계속 올라 도저히 서울에 집을 살 수 없을 거라 절망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꼭 서울에 살아야 할까?
거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청소기를 생각해보자. 차이슨도 있고 일렉트로룩스도 있고 다이슨도 있고 엘지 코드제로도 있다. 왜 청소기가 100만 원이 넘는지, 청소기에게는 얼마만큼의 가격이 적당한지 사람들은 의아해하지만 굳이 오래 캐묻지는 않는다. 100만 원이 비싸면 50만 원짜리 쓰면 되고 50만 원짜리가 비싸면 20만 원짜리 쓰면 된다.
100만 원짜리 청소기를 쓰는 사람과 몇만 원짜리 청소기를 쓰는 사람 사이엔 엄연한 계급 격차가 있다. 그러니 어떤 청소기를 사용하는지는 계급적 분할의 지표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계급 재생산의 핵심적인 기제는 아니다. 하지만 집은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집터는 다르다 해야겠다.
집은 계급 분할의 지표인 동시에 계급 재생산의 핵심적 요소이다. 집터는 학력 및 문화자본 획득의 수월성 여부와 연결되고 그건 다시 경제적 자본의 획득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로 연결된다. 서울은 그 자체로 자본 획득의 기회이며 그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진다는 것은 나뿐 아니라 내 자식들도 자본 획득의 기회로부터 멀어진다는 걸 뜻한다.
그러니 서울 아파트는 일종의 계급 투쟁의 전선이다. 그런데 이 계급 투쟁은 고전적인 노자 적대의 전선이 아니다. 어차피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자계급이 서울의 요지에 아파트를 살 수는 없다. 관건은 새로운 중간층이 미래의 중산층으로 상승할 수 있느냐다. 지금의 아파트값 상승은 그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과거보다 그 문이 훨씬 좁아짐을 의미한다.
중간층은 기득권화한 중산층에 비해 더 진보적이고 역동적인 정치의식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조국 사태 때 문재인에게 등을 돌린 집단도 이 집단이지 싶다. 서울의 집값이 그 중간층들이 중산층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수준으로 안정되지 않는 이상 내년 총선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 액수로 얼마가 적당할까? 실수령액 350 정도의 맞벌이 부부 기준으로 매달 수령액의 50%를 15년 정도 모아서 살 수 있는 금액이라면 그들도 만족하지 않을까. 서른 정도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마흔다섯 정도에 내 집 장만이 가능한 정도. 이 정도도 웬만한 서민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낮춰 잡아도 여전히 진입장벽은 높다. 하지만 모든 수요를 맞춰줄 수는 없다. 모두가 서울에 살 수 없다면 최대한 지방에서도 학력-문화자본을 획득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내가 생각해본 가안은 지역교육학습관을 읍면 단위에 만들어 전국의 석박사 대학원생 및 수료자 및 노는 석박사들을 하방하는 거다.
인당 년 3000만 원과 숙소를 제공해주고 2년간 읍면 단위의 학습관에서 지역 초중고생들에 독서, 토론, 자연과학, 외국어 기타 등등의 커리큘럼을 만들어 교육한다. 원하면 연장 가능. 국가가 나서서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커리큘럼을 통해 입시와는 무관한 인문 자유교육을 하면 된다.
이미 시행하는 방과 후 교육을 더 철저히 인문주의적으로 강화하는 거다. 일종의 ‘인문 뉴딜‘이다. 왜 인문주의냐고 묻는다면 지방 출신 학생이 성공적으로 학력 및 문화자본을 획득하는 가장 유력한 루트가 책과 사유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부모가 모두 대학을 나온 아이들은 다르겠지만 학력이 낮은 부모를 둔 시골 아이들은 리터러시를 획득하기 쉽지 않다.
리터러시는 단순한 읽기 능력이 아니라 공부 전반에 작용하는 원천적인 힘이다. 가난한 시골 아이가 서울 아이처럼 영어 유치원에 다닐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아이보다 더 깊이 셰익스피어를 읽는 아이로 자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게 시골의 현실이다.
그러니 국가는 강남 아파트 집값만 쳐다보지 말고 리터러시 획득의 평등을 과제로 삼고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강사법 시행으로 대학에서 자리를 잃은 인력엔 일자리가 보장되고, 지역에선 우수한 고학력자에게 어려서부터 공부를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이라는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해고된 철학 강사로 편의점에서 일하며 날마다 모멸감과 수치심에 힘겨워하는 인물이다. 만약 그녀에게 ‘인문 뉴딜’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아마 수치와 모멸에 허덕이는 대신 지역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으며 다른 아이들과 새로운 공부와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어릴 때 대학생을 본 적이 없다. 대학이 뭔지도 몰랐다. 내 공부의 근본 없음을 절감할 때마다 핑계처럼 탓해본다. 나 어릴 때 함께 책을 읽고 공부를 가르쳐줄 대학생 형이 있었더라면! 오래전 전태일의 외침은 지금 시골의 학생들을 향해야 한다.
서울의 집값이 중간층과 중산층 간의 계급투쟁이라면 지역 학생들의 리터러시 강화 프로젝트는 민중들의 계급 투쟁이 될 것이다. 서울 공화국을 없앤다면서 공공기관 몇 개 이전하는 건 별 의미 없다. 청와대가 아니라 청와대 할애비를 옮겨도 안 된다. 지역의 아이들이 수준 높은 지식과 정보를 이른 시기부터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에도 중요하다 생각했던 거라 내려온 지 얼마 안됐을 때 지역 도서관을 찾아 무료로 아이들과 독서모임을 할 수 있겠냐고 물은 적이 있다. 가능만 하다면 몸담은 출판사에서 책도 저렴하게 지원받아 최대한 부담을 줄일 생각이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서관 직원은 인상을 쓰며 명함 있냐고 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명함이 없다. 없다고 대답하니 일어서서 손을 내저으며 나를 사무실 밖으로 쫓아냈다. 그때 깨달은 건 이건 개인의 선의로 진행할 일이 아니라 국가의 엄정한 의지와 목표 아래 추진되어야 할 일이라는 거. 헛된 공상 같지만 마음 먹고 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이상한 저출산 대책에 수십 조 쓰지 말고, 연구재단 통해 이상한 지원사업만 벌이지 말고 여기에 연 3조 정도만 쓰면 된다. 작은 서점 하나만 문을 열어도 동네의 풍경과 분위기가 바뀐다. 지역을 살리고 인문학도 살리는 길이다.
원문: 한영인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