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벼락 같았던 영업정지 행정 처분
2017년 봄. 당시는 게임회사 홍보팀에서 1인 홍보 담당자로 일하던 때였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 갑자기 폭탄이 터졌다. 회사 게임 중 하나가 진행했던 순금 이벤트 때문이다. 이벤트가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제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날 갑자기 행정기관으로부터 영업정지 행정처분을 받게 된 것이다.
영업정지의 범위는 문제가 있었던 ‘그 게임’뿐 아니라 ‘회사 전체’다. 냉장고 속 반찬 하나가 상했는데 냉장고까지 다 버리라고(…) 게임 하나가 잘못했는데 몇 달 동안 아예 회사 문을 닫으라는 그런 상황이다. 과한 처분이라 생각돼 당황스러웠지만 어쨌든 나는 눈앞에 벌어진 이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공시가 올라가기 전 부랴부랴 사업 담당자를 통해 상황 파악을 하고 예상 Q&A를 만들었다. ‘별일 아니다’라는 뉘앙스와 함께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죄송하고, 앞으로 회사와 유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극 힘쓰겠다’는 것이 대표님과 논의한 미디어 응대의 주된 내용이다.
공시가 뜨고 예상대로 전화기에 불이 났다. 사건 경위를 세세하게 물어보는 기자부터, 고생이 많다고 되려 나를 위로해주는 분도 있었고(감사했습니다), 간단히 멘트만 문자로 달라는 분도 계셨다.
약 1–2시간 동안 급한 응대를 마치고 미디어의 반응을 정리해 대표님께 보고했다. 보고 후에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홍보 대행사에서 일할 땐 늘 팀이었고, 주변에 홍보 전문가도 가득했다. 상사 혹은 클라이언트의 지시에 따라 나에게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해내면 됐다. 이제 상황이 다르다.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 회사의 공식 입장이 기사 코멘트에 잘 반영되었는지 실시간으로 기사를 확인하고,
- 혹시나 왜곡되어 나온 기사가 있다면 담당 기자와 다시 잘 커뮤니케이션 하고,
- 밀어내기용 보도자료도 충분히 준비해 놓고,
- 제삼자의 시각으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회사의 편에 서서) 우리를 대변해 줄 칼럼이나 취재 기사가 나올 수 있도록 내부 자료 준비와 함께 적당한 미디어와 기자가 있을지 체크하고,
- 당시 미디어의 반응을 토대로 회사에 유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논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
이 정도가 당시의 내가 생각한 홍보 담당자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갑자기 대표 지시가 떨어졌다.
직원 대상 Q&A를 준비해주세요.
네? 저 지금 대외 커뮤니케이션하느라고 엄청 바쁜데요…?
홍보 담당자가 아닌 회사의 한 직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나는 앞으로 쏟아져 나올 기사들과 미디어 응대 등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상장사가 관련 법률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게임 이벤트를 진행했다는 점에서도 비난을 면치 못하는 상황. 주주들은 또 어떻고. 이런 와중에 갑자기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Q&A를 준비하라는 지시는 다소 생뚱맞게 느껴졌다.
전사 미팅을 통해 직원들이 궁금해하는 점에 공개적으로 답변을 해주겠다는 건데, 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일의 우선순위에서는 살짝 뒤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홍보 담당자 입장에선 전사 미팅에서 나온 Q&A 내용이 기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돼 기사로 노출될 수 있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막막했다. 직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홍보 담당자가 아닌 회사의 한 직원으로 돌아가서 이 문제를 생각해 봤다.
당장 영업정지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회사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까? 출시 예정인 게임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영업정지의 범위는 어디까지인 건지, 계열사까지 포함인 건가? 당장 유저들에게 어떻게 공지를 해야 하며, 해외 유저들에게도 공지를 해야 하는 걸까? 만일 영업정지가 된다면 그 기간엔 출근해야 하나? 월급은 나오나? 구조조정이 있을까? 개발사가 손해배상 청구를 하면 어찌해야 하지?
사업부서의 입장이 되어보니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생각할 땐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홍보 담당자가 아니라 사업부서다. 사업부서는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 특히 월정액 결제를 한 유저들의 반발에 대응해야 하고, 개발사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고, 해외 퍼블리셔와도… 게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다양한 외부인들과 커뮤니케이션 해야 한다.
대표님은 직원들에게 공지할 메일을 직접 작성하셨다. 내가 미디어 반응 보고차 공유한 내용이 일부 들어가 있었다. 오늘 영업정지 공시가 나간 후 일부 미디어는 “해프닝이라 생각하겠다” “별일 아닌 것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는 내용을 차용한 것. 기자라는 제삼자 입장에서의 코멘트를 공유함으로써 직원들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사 미팅 이후 ‘공격적 방어’로 대외 커뮤니케이션 방향성 전환
이후 전사 미팅이 진행됐다. 더 전문적인 대답이 필요할 수도 있어 담당 변호사도 자리에 함께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그리고 더욱 디테일한 질문이 쏟아졌다. 사실 예상 Q&A를 작성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홍보 담당자가 어렴풋이 짐작해서 쓴 예상 Q&A가 실제 현업에 있는 분들의 궁금증을 다 헤아릴 수 없었겠지. 나의 능력 부족.
전사 미팅 이후 법적인 이슈, 회사 차원의 대응 이슈 외에 홍보단에서 사업부를 위해 해야 할 일도 좀 더 명확해졌다. 회사가 서비스하는 게임들이 주로 여성향 게임이기 때문에 여성 유저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그만큼 회사의 부정적인 이슈에도 다른 게임회사 유저에 비해 화력이 막강하다는 사업담당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슈가 터지고 난 후 다소 방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했다면, 이제는 커뮤니티 등에 더이상 부정적인 이슈들이 퍼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사 미팅 전후로 직장인 블라인드 앱의 게임 라운지에서도 회사와 관련된 내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영업정지가 진짜냐, 회사 문 닫는 거냐, 게임 재밌게 하고 있는데 서비스는 어떻게 되는 거냐 등의 내용이었다.
이때 전사 미팅이 빛을 발했다. 전사 미팅을 통해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게 된 직원들이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외부에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업정지가 바로 이뤄지지 않으니 게임 서비스는 계속 이어 갈 거고, 회사는 영업정지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등 직원들이 댓글로 작성한 내용이 퍼져 나갔다.
만약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 회사 직원들마저도 동요되어 블라인드 앱에선 추측성 글과 댓글이 올라가고 이게 마치 사실인 것처럼 업계에 퍼져 나갔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부메랑이 되어 다시 회사로 돌아왔을 것이다.
이후 회사는 영업정지 취소 소송을 진행하고, 공격적 방어로 커뮤니케이션 방향성을 바꿨다. 이벤트 도중 잘못된 것을 깨닫고 유저들에게 실제로 순금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 이벤트는 게임 콘텐츠가 아닌 게임 외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법률을 위반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회사가 잘못했다 해도 영업정지는 과한 처분이라는 점 등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외부에 알렸다. 많은 분의 노력 끝에 법원은 영업정지 행정처분에 대한 효력을 정지했다.
마치며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홍보 담당자의 의지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CEO와 임원진, 또 어떤 경우엔 외부 투자자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최대한 직원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회사의 생각을 직원들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특정 이슈가 생긴 이유를 내부에 설명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홍보 담당자는 CEO, 임원진, 외부 관계자, 그리고 직원들 사이에서 전사 회의든, 사보든, CEO의 메일이든,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최대한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직원들 한 명 한 명이 홍보 담당자가 될 수도 있을 정도로 긍정적 효과가 클 것이다.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이유다. 우리 부서 이름이 홍보팀이 아닌 커뮤니케이션팀인 이유이기도 하다.
원문: 르미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