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로 출근하는 월요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커피의 향이 짙어진다는 사실을 하늘도 아는 걸까?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가 커피잔을 들 시간임을 알려준다. 문제는… 오직 문제는 내 손에 우산이 없다는 것뿐이다. 뭐야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날씨가 괜찮았잖아.
이대로 나갔다간 100% 감기다. 커피콩을 볶는 냄새는 분명 나는데 나갈 수가 없다니. 그때 한 남자가 쭈뼛쭈뼛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촉이 왔다. 이놈의 유명세. 마시즘 독자셨구나. 그는 말한다.
닌텐도 스위치 미개봉 사러 오신 분 맞죠?
아니다. 그는 카페로 출근하는 남자. 마시즘이다. 그냥 우산이 없는 거라고요! 그… 근데 그거 얼마에 파는데요?
카페로 출근하는 남자, 지하철역 카페 투어를 시작한다
카페 탐사를 간다고 말했는데. 이대로 사무실로 출근할 수 없다. 찬바람이 휘센인 지상을 피해 지하철역 안으로 후퇴를 했다. 다행히 편의점에는 우산을 팔았다. 감사한 마음에 들어갔다가 0 하나가 더 붙은 가격에 놀랐다. 이걸 샀다간 오늘 아무 음료도 마실 수 없잖아. 수요와 공급의 법칙! 애덤 스미스! 나쁜 손!
결국 비가 그치거나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며 지하철 안에 숨기로 했다. 졸지에 겨울잠 자는 개구리 신세가 되다니. 그때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지하철역 안에도 카페들이 많았지. 음료계의 두더지 마시즘. 오늘은 서울의 지하세계에 포진한 카페들을 찾아간다.
청담역의 크렘 드 마롱: 프랑스 국민 밤 라테는 말이야
첫 번째는 청담역이다. ‘왜 이곳에 왔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그냥 이 동네는 고급진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뚜벅뚜벅 걷다가 네온색 간판을 보게 되었다. ‘STAYTION’이라니. 이럴 수가 철자가 틀렸잖아요(아니다).
이곳의 이름은 ‘크렘 드 마롱(Creme de Marrons)’. 하지만 저 밤톨이 캐릭터를 본 적 있다. 프랑스에 가면 문익점 목화씨 숨기듯 사 온다는 밤잼 클레망 포지에(Clement Faugier)가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물어보니 ‘마롱’은 우리말로 ‘밤’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밤잼도 있고, 밤빵도 있고, 밤 라테도 있다. 나는 마롱 라테와 크루아상을 시켰다. 보통의 밤 라테가 바밤바 녹인듯한 맛이 난다면, 마롱 라테는 질감을 살린 편이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따뜻한 라테가 추위로 뾰족해진 기분을 한 꺼풀 벗겨준다.
무엇보다 이런 하얀 공간에서 마롱 라테를 마시면 파리지앵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이 바로 청담의 멋. 아니 아니 프랑스의 멋일까? 때마침 옆에 계시던 어머님께서 주섬주섬 가방에서 요구르트를 꺼내 주셨다. “젊은 친구 고생 많이 하는데 이거나 먹어.” 사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감사합니다 어머님.
선릉역의 40240 독도커피: BTS가 독도수비대가 된다면
다음 행선지는 가까운 선릉역이다. 외국에서 온 멋짐을 마셨으니 애국으로 채울 때가 된 것이다. 예전에 지나가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가지 못했던 카페가 있었는데 오늘 오게 되었다. 바로 ‘40240 독도커피’. 이름만 들어도 애국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가. 심지어 40240은 독도의 우편번호라고.
이곳은 모든 메뉴 이름 앞에 독도가 붙어있다. 독도 커피, 독도 우유차, 독도 아이스티, 독도 쿠키. 이름만 독도가 아니라 블렌딩 스타일도 ‘독도의 고결하고 강인한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이곳 사장님의 애국심은 진짜다. 판매 수익마저도 독도의 역사교육을 위해 사용된다고 밝힌다.
나도 모르는 애국심으로 독도 커피를 시켰다. 그것도 대왕 사이즈로. 얼마나 크겠냐 싶었는데 1리터짜리 독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타났다. 이리도 후한 독도 인심에 놀라고, 원액을 진하게 탄 강함에 놀랐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카페에 메뉴판만큼 크게 달린 BTS, 방탄소년단의 사진 때문이다. 고르고 고른 사진을 큼지막하게 달아놓은, 생일 이벤트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국위선양의 현주소는 BTS다. 독도와 BTS라니. 예전에 한 선인이 한 말씀이 떠오른다. BTS 멤버를 독도 수호대로 보낸다면 세계가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라고 인정할 것이라고. 전 세계의 아미들이 힘을 쓸 테니까.
잠실역의 떡가게 종춘 1975: 이곳이 미래형 방앗간일까
세 번째는 잠실역이다. 알고 보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지하철을 타고 다녀도 강남 3구 손바닥 안에 있었다. 인파를 따라 흘러 흘러가다 보니 사람들이 들어가는 카페가 보인다. 고급스러워서 들어갔더니 떡을 판다. 아니 나는 뼛속까지 신토불이였던 것인가.
이곳의 이름은 ‘떡카페 종춘’이다. 1975란 숫자는 이곳이 태어난 연도가 분명하다. 나는 장유유서 법칙에 따라 겸손하게 이곳에 들어가서 떡을 쓸었다. 마카롱도 마들렌도 아닌 떡과 함께 커피를 마시다니. 심지어 떡을 만드는 모습도 오픈되어 있는데, 가게에서 당일 만든 떡을 당일 판매한다고 한다.
떡 이야기는 그만하고 마실 것을 논하자. 마시즘이 고른 것은 시즌 음료인 ‘단호박 라테’다. 떡과 먹기에 뭔가 어울릴 것 같잖아. 절편과 함께 단호박 라테를 마시니 익숙한 향기가 난다. 이것은 추석에 고향에서 먹었던 엄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건강차와 큰집에서 얻어온 떡이잖아.
핸드메이드의 향기, 고향의 향기를 이렇게 고급진 지하 카페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엄마에게 카톡을 하게 만드는 맛이 난다. 엄마. 나 지하철에 갇혀 있어.
강남역의 차얌: 가성비 밀크티의 종점
마지막은 강남역이다. 슬롯머신을 하는 심정으로 이곳에 왔다. 나 같은 길치에게 이 넓은 상가들은 미로보다 복잡하기 때문이다. 분명 똑같은 곳을 맴도는 것 같은데 화장실 안내판의 숫자만 달라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열심히 길을 찾다(라고 쓰고 잃었다고 읽는다) 보니 카페거리에 도착했다. 정말 카페가 가득하구나. 문제는 이제 하루 용돈이 텅텅 비었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차얌(CHAYAM)’이다. 이곳은 한국에서 데자와를 압도할 수 있는 가성비의 카페다. 일단 밀크티가 900원이다. 최고의 가성비를 위해 주문도 기계로 받는다. 말하고 카드를 건네는 시간조차 아끼려는 전략이다. 펄을 추가하면 300원이 더 들었다. 하지만 펄을 추가하고 집에 걸어가는 펄짓(?)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밀크티만 시켜봤다.
카드 결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밀크티가 나온다. 고급 밀크티의 맛과 양을 기대했다면 조금 아쉬울지는 모르지만 적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나름 모양새를 살렸다. 심지어 밀크티 종류도 많아서 이것저것 부담 없이 시식해볼 수도 있다. 나는 밀크티를 받고 만족하며 카페 골목 사이에 있는 광장 벤치에 앉았다. 좌석 공간마저도 아껴버리는 갓성비의 강남역. 오늘 하루는 카페인으로 불태워 버렸고만.
하늘이 무너져도 음료 마실 카페는 있다
뜻밖의 겨울비 덕분에 재미있는 추억을 남겼다. 종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역 안의 카페 투어라니. 바쁘게 지나쳤을 때는 보지 못했던 지하상가 카페들의 매력을 볼 수 있었다. 뭐랄까 땅 위의 날씨가 아무리 춥고, 비가 와도 이곳만은 따뜻하게 나를 맞아줄 것 같은 기분이랄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쉼터가, 누군가에게는 자신만의 비밀 아지트가 될 수 있는 지하철역 안의 카페를 찾아두는 것은 어떨까? 언제 겨울비가 내릴지 모르니까.
원문: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