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은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 중인데, 사실 나는 내심 두렵다. 결혼 후 4년간 우리의 가사 분배는 최적에 가까워졌다. 청결에 대한 기준이 달라 여전히 종종 부딪히지만 내가 출퇴근을 하고 프리랜서인 남편이 집에 있는 우리 집은 평등한 분배가 쉬운 편이었다.
특히 내가 요리로부터 물러나며 결정적으로 평화가 왔다. 이렇게 말하면 치사할까. 그 후로 나는 청소를 조금 더 한다고 쉽게 억울해하지 않는다. 성별에 따라 부과되는 역할을 조금씩 배반하면서 우리는 나름의 균형을 찾았다. 그러나 출산은 미지의 영역이다. 나는 우리가 오랜 시간 공들여 맞춰온 균형이 출산과 함께 와르르 무너질까 봐 겁이 난다.
『여자 공부하는 여자』의 서문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의 결론이 어디로 흘러갈지 무척 궁금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열 살, 일곱 살 난 두 아이를 키우며 남편과 함께 조그마한 콘텐츠 제작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의 평소 일과는 이랬다.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일곱 시에는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혀서 유치원과 학교에 보낸 뒤 사무실에 출근해 다시 회사 일을 시작했다. […]
저녁 내내 뒤를 쫓아다니며 쫑알대는 아이의 목소리를 건성으로 받아넘기는 내 머릿속은 회사 업무와 집안일, 내일 아침 찬거리와 주말 계획 등으로 항상 뒤죽박죽 했고 일상적이고 자질구레한 일들 사이에서 언제나 우왕좌왕했다.
일도 육아도 포기할 수 없는 여성들의 흔하고, 너무 흔해서 잘 인지되지도 않는 고통. 저자는 육아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고, 일을 할 수 없게 되며 육아 우울증을 겪자 창업으로 경단을 돌파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면 일과 육아를 도맡는 상황에 불평하기 어려운 처지란 얘기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했다.
아마 남편에게 더 많은 가사 분담을 요청하지 않는 것 또한 그녀의 선택일 것이다. 별 문제의식 없는 남편에게 가사를 분담시키자면 거기에 따르는 에너지 소모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노동과 묘한 양가감정이다. 일과 육아의 기쁨도, 죄책감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없는 여성들은 그 사이를 불안하게 왕복 운동한다. 여기까지는 많은 여성의 현실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로부터 걸어 나갈 것인가.
일과 육아 2교대로 녹초가 된 여성이 답을 찾는 여정
『여자 공부하는 여자』는 이렇게 일과 육아 2교대로 녹초가 된 여성이 페미니즘 안에서 자신의 답을 찾아간 독서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꾸렸다가, 특별 수강생으로 대학원 수업을 수강하고 정식으로 여성학 석사 과정에 등록해 페미니즘 공부를 확장해가는 저자의 여정은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스테퍼니 스탈을 떠올리게 한다.
민혜영과 스탈 모두 페미니즘을 접하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외롭지 않음’이다. 그녀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전히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사 노동을 떠안게 된다는 것, 남성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는데 여성만이 그 사이에서 찢어진다는 것, 그럼에도 가사 노동에 대한 사회의 평가가 어마어마하게 박하다는 것, 가사 노동과 비슷한 것까지 여성적인 것으로 싸잡아 폄훼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기란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앎은 그 자체로 고통을 경감시킨다. 내 고통의 구조와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전처럼 고통스럽지 않다. 가장 참기 힘든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이다. 갈급하게 책을 읽어치우고 글을 써 내려갔던 그녀들이 얻고자 했던 건 결국 자신의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고, 그건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해석은 현실의 해결책까지 길어낼 수 있을까.
페미니즘 고전부터 최신 화제작까지 저자의 독서기를 따라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건 ‘그래서 그녀는 2교대 노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였다. 새로 획득한 페미니즘의 통찰과 언어로 남편을 설득해 그로 하여금 지금보다 많은 가사와 육아 노동을 감당하게 하는 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는 그보다 먼저 케이시 웍스의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에 기대 자신이 너무 완벽한 노동자가 되려 했음을 자각한다. 저자에 따르면 더 많은 성취를 하고 자신의 유능함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했던 게 스스로를 소진한 일차적인 원인이었다. 그런 완벽한 노동자는 아내가 있는 이들에게만 도달 가능한 이상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등·하원을 걱정하지 않고 내일 당장 짐을 싸 2박 3일 출장을 갈 수 있는 노동자는 아내가 있는 남성뿐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는 데 쓰는, 이런 자본주의가 원하는 이상적인 노동자가, 여성도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최선일까. 또 다른 여성-돌봄 노동자(보모)를 고용하며 남녀 모두 평등하게 일 중독이 될 자유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저자는 ‘시간 주권’과 ‘기본 소득’을 제시한다. 시간 주권은 유급 노동(일)과 무급 노동(가사)을 스스로 분배할 수 있는 주권이다. 많은 노동자는 유급 노동의 양을 스스로 결정하기 어렵지만,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는 저자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도 아마 일을 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육아와 가사를 나누는 더 적절한 균형을 찾았다.
자기 사업을 하는 건 그녀의 자원으로,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기본 소득을 이야기한다. 기본 소득이 보장된다면 남녀 모두 일과 삶에 있어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유급 노동을 일시적으로 혹은 영속적으로 줄이더라도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도록 국가가 보장하는 것이 기본 소득이다.
여성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통스럽다
『여자 공부하는 여자』는 3년의 기록이다. 페미니즘을 3년 공부했다고 모든 것이 나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삶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울화증만 늘었을 수도 있다. 보이는 문제가 훨씬 많아졌는데, 이제는 ‘다 그렇게 살아’나 ‘애들 크면 괜찮아져’ 같은 말로 대충 퉁 치고 넘어갈 수 없으니까.
가정 내에서 애써 만들어놓은 균형은 변수가 생기면 금세 흔들려 우리를 좌절시키고, 기본 소득이라는 답을 찾았다고는 해도 당장 도입될 수 있는 정책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독서의 결과로 어떤 굳은살을 갖게 된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모든 논쟁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은 결국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믿음, 그 다른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세상이 가능한 듯이 요구하고 행동하는 삶이 존재할 때만, 비로소 다른 세상이 생겨난다.
물론 이건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며, 경단을 창업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고, 석사 과정을 다닐 만큼 여력 있는 여성의 이야기다. 김지영 씨를 보며 ‘보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라면 저자 역시 ‘보편’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가? 여성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통스럽다. 비슷하고, 연결된 이유들로. 자신에게 필요한 길을 스스로 찾으면 된다.
이 독서기는 그런 자구의 사례로서 유용할 것이다. 절실한 자에게 독서와 글쓰기만큼 구원인 것은 없다. 내 고통에 해석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에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 접근이 가능할지 궁금한 여성들에게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이다.
※ 해당 기사는 웨일북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